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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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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표 운동화

국제그룹은 1947년 양정모 회장이 부산에 세웠던 고무신 생산업체에서 출발했습니다. 이 기업이 출시한 제품은 그 유명한 왕자표 고무신입니다. 당시 경쟁업체 고무신은 여러 가지 품질 문제가 즐비했는데요. 왕자표 고무신은 부드럽고 즐기며 모양도 좋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죠. 그러나 1960년 공장에 대형 화재가 발생하면서 큰 위기가 찾아옵니다.

이때 양정모 회장은 고무신 대신 운동화를 제작하여 성장을 이어 나갑니다. 산업화가 시작되고 국민소득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고무신 부대는 운동화의 수요가 높아지던 시기로 왕자표 운동화는 많은 사랑을 받았었죠. 이 운동화는 국내 최초로 미국에 진출해서 싸고 질 좋은 운동화로 인정받으며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1970년대 미국의 마라톤 전문지에서 최고 품질의 운동화로 평가받기도 했죠.

종합무역상사로 지정

그리고 1975년 국제그룹은 정부로부터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되었는데요. 삼성물산, 대우실업, 쌍용산업 다음으로 국내 네 번째 종합상사였습니다. 당시 모든 기업들은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정부가 수출을 장려하던 때로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되면 은행 이자는 7%만 내면 되었습니다.

반면 일반 기업은 그보다 두 배인 15%의 이자를 내던 때였습니다.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된 이후 본격적으로 몸집을 불리기 시작 조광무역 국제종합기계 연합철강 등을 인수하고 호텔 건설업까지 진출합니다.

프로스펙스 브랜드

80년대 초반 양정모 회장은 소득 수준이 높아진 국민들이 나이키, 아디다스 운동화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인지하고 국산 신발 브랜드 프로스펙스를 선보였습니다. 당시 프로스펙스는 나이키, 아디다스에 밀리지 않았고 교복 자율화 힘 입어 학생들에게 큰 인기였습니다.

학교에서 신는 운동화는 부의 상징으로 등골 브레이커의 기원이었죠. 고가에 속하는 라인으로는 나이키, 프로스펙스, 아식스, 미즈노 등이 있었고 프로 월드컵과 타이거, 아티스 등이 뒤를 이었습니다. 특히 검정 바탕에 노란 줄무늬가 있는 타이거는 이 중 안전핀으로 유명했죠.

재계 순위 7위

이뿐 아니라 국제그룹의 계열사 조광 무역은 리바이스 청바지를 국내에 도입하여 판매하기도 했죠. 이처럼 80년대 초반 국제그룹의 위상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습니다. 21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순위 7위까지 오른 대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1982년 서울 국제무역박람회에 설치되었던 국제그룹의 전시관의 규모는 국내 원톱 현대그룹의 전시관과 규모가 비슷했습니다. 이웃한 부산의 라이벌 기업 롯데그룹의 비교에서도 더 큰 규모였죠. 이뿐 아니라 국제그룹의 상황만 봐도 당시의 위상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6

3빌딩의 버금가는 용산의 국제 빌딩이 본사 건물이었죠. 당시 국제그룹의 위치는 현재의 롯데그룹과 거의 유사한데요. 부산을 거점으로 성장했으며 재계 등을 고려해 볼 때 딱 들어맞는다는 평가가 많죠.

국제그룹의 해체

그리고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국제그룹은 하루아침에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국제그룹이 해체된 시기는 1985년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이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국제그룹의 주거래 은행이었던 제일은행을 동원하여 단숨에 국제그룹을 해체했습니다.

재무구조가 부실한 국제에 더 이상의 자금 지원은 곤란하다는 게 은행의 발표였죠. 용산 사옥 신축으로 인한 자금난 건설업 적자 등으로 부채가 자본금의 9배가 넘는 방만한 경영을 했다는 것이 해체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얼마 없었고 전두환 정권에게 밉보인 결과로 받아들였었죠. 실제로 국제그룹 해체와 관련하여 헌법재판소가 정부의 개입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미운털 해체를 정설로 받아들이는 이가 많죠.

전두환 대통령과의 악연

양정모와 전두환의 악연의 역사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정부는 미얀마에서 순직한 희생자 유족에 대한 지원을 목표로 일해재단을 발족합니다. 이때 정부는 대기업들에게 자발적으로 모금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죠. 이에 따라 현대그룹이 51억 원을 삼성그룹이 45억 원을 헌납했습니다. 하지만 양정모가 낸 금액은 5억 원이었습니다.

실제 그룹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액수가 적은 편이었는데 그것도 어음으로 냈다고 하죠. 이후 새마을 성금을 기부할 때도 양쪽 문은 달랑 3억 원으로 떼우면서 전두환의 눈총을 받게 됩니다. 당시 3억 원은 납부금액 30위에 해당했다고 하죠.

거기에 이번에도 현금이 아닌 어음으로 제공했습니다. 이렇게 타 기업들에 비해 정치자금을 적게 내고 그것도 어음으로 내는 양정모는 전두환에게 미음을 잔뜩 사게 되었습니다. 평소 양정모는 꼬장꼬장한 성격에 한드폰 아끼면서 기업 키우기에만 매달렸다고 하죠.

대통령의 분노

그리고 1985년 총선이 국제그룹의 결정타였습니다. 당시 전두환은 권력 유지를 위해 총선의 승리가 절실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재계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재벌 총수들을 소집하여 만찬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부산에서 출발한 양정모는 폭설로 항공기가 연착하여 늦게 도착하고 말았습니다.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양 회장에게 전두환은 “우리 국제 양 회장님은 어디 외국이라도 갔다 오셨나요.” 라며 눈치를 주었다고 하죠. 이에 양정모는 눈치도 없이 “부산 지역 경기가 낙후하여 민정당 지지 기반이 취약하니 임해공단을 건설해달라”는 말을 불쑥 꺼냈다고 하죠. 그리고 이번 총선에서는 김영삼의 텃밭인 부산 지역은 매우 중요한 변수였습니다.

전두환은 국제 그룹의 기반인 부산으로 직접 내려와 양 전 부회장에게 선거를 위해 힘써줄 것을 부탁합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양 회장이 막내 아들의 49제와 겹쳤고 아들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하루 만에 부산을 떠났습니다. 이를 들은 전두환은 대통령인 내가 부산에 있는데 멋대로 여기를 뜬다며 분노했다고 하죠.

국제그룹의 몰락

이렇게 전두환에게 찍힐 대로 찍힌 상황 총선에서 신민당이 부산 의석을 모두 차지하자 모든 분노는 양정모 회장에게 향했습니다. 제일은행이 국제그룹의 발행어음을 모두 부도 처리하라고 지시했으며 국제그룹 해체가 신속하게 이뤄졌습니다. 총선이 끝나고 9일 만의 일이었습니다. 양정모는 그룹 해체 사실을 발표 30분 전에 통보받고 “이게 다 내 탓이다.

운명을 받아들이자”고 말했다고 합니다. 설상가상 양 회장의 부인은 녹내장으로 눈이 멀어가고 있어 미국 병원에 수술 예약을 해놓은 상황이었습니다. 수술 시기를 놓치면 영영 앞을 못 보는 상황임에도 정부는 출국을 시켜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양 회장은 완강히 버티다가 각종 경영권 양도 문서, 주식 매매 계약서 등지에 도장을 찍게 되었다고 하죠. 양 회장의 장남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그들은 부친을 도장 찍는 기계처럼 여겼다. 그렇게 양정모의 국제그룹은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한일합섬이 프로스펙스를 인수했고 동국제강은 연합철강을 극동건설은 건설과 증권사를 인수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대기업이라도 권력이 밉보이는 경우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재벌들은 더욱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1988년 정주영 현대 회장은 청문회에 출석하여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국제그룹 해체를 보고서 정치자금 액수를 두 배 이상 올렸다.” 그리고 양정모 회장은 청와대 주최 만찬에 있었던 일을 고백했습니다. “만찬 도중 각하께서 술이 상당히 됐는데 각하는 내가 기업을 키워주려면 키워줄 수 있고 죽이려면 죽일 힘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 그 자리에는 우리나라 10대 재벌 총수가 다 앉아 듣고 있었는데 가슴이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지나 보니 바로 나를 두고 한 말이더라 이렇게 하루아침에 그룹을 잃어버린 양정모는 은둔 생활에 들어갑니다.

법정 투쟁 하지만…

87년 6월 항쟁으로 전두환이 퇴임하자 이때부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하죠. 8년 동안 양복 한 벌 새로 사지 않았고 2,300원짜리 도시락으로 버티며 끈질기게 법정 투쟁을 하였습니다. 결국 1993년 헌법재판소는 정부가 국제그룹 해체를 지시한 것은 기업 활동의 자유를 침해한 것으로 위헌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이어 국제그룹을 되찾기 위해 주식인도 청구 소송을 진행했으나 다음과 같은 이유로 패소했습니다. 정부가 기업 활동의 자유를 침해한 것은 사실이나 이로 인해 개인 간 계약까지 무효화될 수 없다. 그렇게 현재 국제그룹은 그 흔적도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 되었고 양 회장은 실의에 빠진 채 부산에서 칩거하다가 2009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국제그룹 외손녀의 근황

배우 왕지원은 국제그룹의 외손녀입니다. 아버지인 왕정홍은 행정고시 출신으로 사무총장을 거쳐 방위사업청장으로 재직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1988년생으로 본래 발레를 전공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엘리트 코스를 밟았는데요. 선화예중 – 영국 로열발레스쿨 –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거쳤습니다. 이후 전국 신인 무용 콩쿠르에서 특상을 수상한 적도 있고 국립발레단 단원으로 활동했다고 하죠.

하지만 부상으로 휠체어까지 타야 했던 그녀는 발레를 포기하고 배우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시트콤으로 데뷔하여 드라마 로맨스가 필요해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등에 출연했습니다. 그리고 22년 뒤에는 3살 연하의 발레리노 박종석과 결혼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둘은 발레를 통해 인연이 되어 2년간 연애한 후 결혼에 골인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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