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 사고로 전신이 불에 탄 배우 “31번의 수술을 견뎠지만 끝내” 그의 안타까운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2015년 1월 서울 논현동의 한 상가 빌딩에서 펑 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아 올랐습니다. 불은 순식간에 사람들을 덮쳤습니다. 지인을 만나러 잠깐 들린 젊은 연극인 이동근도 이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 화재로 이동근은 전신 50% 3도 화상을 입고 30번 가까이 되는 수술을 받으며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고통스러운 수술을 견디면서도 그는 연극에 대한 꿈을 놓지 않았습니다. 연극 사회 기업을 설립하여 제2의 삶을 살아가며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주먹 쥐고 치삼”이 막을 내린 지 두 달 만에 비보가 전해집니다.

그렇게 2017년 이동근은 31세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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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포기한 이유

1987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난 이동근은 중학생 때 처음으로 무대 위에 올랐습니다. 무대에 느낀 찌릿했던 감정에 매료된 이동근은 연극을 배우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연극을 위해 고1 때부터 직접 아르바이트도 시작했습니다. 그는 350만 원을 스스로 벌어 방학이면 강남 구립 청소년 극단 근처 하숙집을 얻어 생활했습니다.

학창시절 내내 남해에서 서울까지 왕복 10시간의 버스를 타고 오가며 연극을 배웁니다. 꿈에 그리던 청주대학교 연극영화과에 도전하지만 결국 떨어지고 다른 대학교 연극영화과는 등록금이 없어 진학하지 못했습니다. 연극에 대한 꿈은 잠시 접고 우선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스무 살 이동근은 밤 9시부터 아침 9시까지 12시간 김밥 집에서 일을 시작합니다. 그는 2년 반 동안 지각 한 번 안 할 정도로 성실했습니다. 하지만 온통 연극이 가득 차 있던 이동근의 머릿속에서 연극을 지워야 했던 때가 오고 맙니다.

이미 세 번의 연극영화과 입시에 떨어져 있던 차에 그의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져 사지마비가 온 겁니다. 고작 스물한 살의 이동근은 엄청난 아버지의 병원비를 홀로 책임져야 했습니다. 이동근은 세상이 미웠습니다.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에 군입대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동근은 소년 가장이기에 병역도 면제받았습니다. 결국 스물한 살의 이동근은 또다시 꿈을 접고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살아갑니다.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다시 시작…

캐피탈 회사에서 대출을 권유하는 업무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첫 달에 7만 원을 벌고 시간이 흐르고 안정되게 벌게 됐습니다. 스물다섯 살에는 아버지를 모실 생각으로 부산은행으로 이직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맙니다. 그가 돈을 벌던 이유가 사라진 셈이었습니다. 세상이 미웠던 만큼 세상을 비웃고 싶은 마음에 외제차도 구입해 봤습니다. “봤지! 나 이렇게 잘 살아 이렇게 잘 살 수 있어!”라고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돈을 많이 써도 이동근은 행복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때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렸다고 생각했던 연극이 떠올랐습니다.

우연히 이동근은 열정 대학을 알게 됩니다. 열정대학은 자기주도적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열정대학에는 싱어송라이터 학과, 대안 치유 그림 학과 등 각양각색의 학과가 있었습니다. 바로 직접 교과목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학기당 등록금도 6만 원에 가지 못한 대학생활의 미련을 불러 다니게 됩니다. 이곳에서 이동근은 직접 공연 문화 비평 학과를 개설했습니다. 이동근은 “남들과 얘기할 수 있는 소재가 연극밖에 없었는데 모르는 게 훨씬 많아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었어요.” 라고 과를 개설한 이유를 밝힙니다.


이동근은 그 과목에서 만난 친구들과 미친 듯이 공연을 보고 다니게 됩니다. 1년에 200편의 연극을 보고 평론가 협회에서 주최한 비평 워크숍도 들었습니다. 28살 이동근은 무턱되고 만나고 싶은 연극인들의 리스트를 정해 연락했습니다. 평론가 허순자, 연출가 정범철, 배우 김소희, 김태훈, 등을 만나 인터뷰하며 행복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이동근은 연극인으로서 보탬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 공연을 제작하고 더 나아가 공연기획 전문 사회적 기업을 만들자 라는 목표를 잡습니다.

그는 1년 반의 열정 대학 생활 중 총학생회장도 맡고 연극 페스티벌을 열기도 했습니다. 영하의 날씨에 이루어진 축제에서 맨땅에 헤딩하듯 직접 쓴 극본의 연기도 참여했는데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이후에 본격적으로 사회적 기업에 대한 계획부터 사무실과 투자처도 알아보는 등 아주 바쁜 나날을 보냅니다. 이동근은 이때를 인생에서 정말 행복하게 뛰어다닌 시절이라 추억했는데요.

전신화상 31번의 수술

하지만 이동근은 인생 최대의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다음 축제를 계획하던 2015년 1월 이동근은 지인의 부름을 받아 서울 논현동 한 상가 빌딩 사무실에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펑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아 올랐고 불은 순식간에 사람들을 덮쳤습니다. 이동근은 그때를 회상했습니다. “사무실 안에서 터져오른 불길이 나가는 길목에 제가 있었어요.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서 편의점 유리에 비친 모습을 봤는데 얼굴이 하얗게 떴어요.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에 가는 동안 아프지 않았어요. 3도 화상으로 신경까지 손상돼서 그랬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죠. 전신에 화상을 입은 그는 손가락도 4개를 절단하고 30회에 가까운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이동근은 입원 당시 너무 억울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의사 간호사한테 매일같이 화를 냈다고 합니다.

성대가 달라붙어 목에 꽂은 튜브에 손을 대지 않고는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고난을 이겨내고

괴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는 그러다 모든 게 스스로 한 선택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는 중환자실에서 같이 있던 환자들 중 10명이 넘게 눈을 감은 것을 보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라고 느낀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이동근은 살아나면 진짜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자고 맹세했습니다.

그는 죽을 고비까지 넘기고 다행히 8개월 동안 필사적으로 고통과 싸우고 퇴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수술을 견디면서도 그는 연극에 대한 꿈을 놓지 않았고 제일 먼저 대학로로 갔습니다. 이동근은 바쁘게 연극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다짐했습니다. 나도 다시 이렇게 연극 곁에서 살아가야지 사고가 남긴 건 화상으로 달라진 얼굴과 화상 보험금 6억 원이었습니다. 퇴원 당시 몸무게가 43킬로그램이었던 이동근은 사람들의 시선이 힘들었습니다. “좋은 위로로 혹은 아무 의도 없이 나를 바라보는 것도 안 좋게 보였어요. 괜히 지나가는 사람한테 시비 걸고 위협적으로 행동했어요. 살이 오르고 나서야 남의 시선에 조금 무뎌졌어요.”

그리고 이동근은 6억 원의 화상 보험금으로 연극인을 돕는 사회적 기업 아이디 서포터즈를 차렸습니다. 아이디 서포터즈는 신진 연극인의 불가능한 꿈을 도와주겠다는 취지로 설립된 것입니다. 그곳에서 이동근은 2015년 10월부터 공연 10편을 기획해 진행합니다. 이 가운데 불후의 명작 – 대한민국 희곡 작가전은 20대부터 70대까지 대표 작가의 희곡을 낭독극으로 올려 언론의 주목도 받았습니다.

마지막 유작 – 주먹 쥐고 치삼

소외된 화상 환자들과 소방관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다루고 싶었던 이동근은 자신이 겪은 사고와 살아가는 과정을 담은 자전적인 내용의 작품을 만듭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그린 “주먹 쥐고 치삼”입니다. 이 작품에는 이동근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습니다. 이동근은 연극을 통해 포기하지 않고 꿈꾸며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연극은 결국 이동근의 유작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먹 쥐고 치삼”이 막을 내린 지 약 2개월 뒤인 2017년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연극 하나만 보고 달려온 그의 모습이 주위에 큰 귀감이 된 바 있어 연극계 인사들이 인재를 잃은 큰 슬픔의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이동근은 “과거 저는 더 이상 내 일을 말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오늘 행복해지고 싶어요. 매일 연극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일들을 열심히 해나가고 싶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이겨냈던 그는 자신의 행복과 꿈을 끝까지 놓지 않고 노력하던 청년이었습니다. 연극 사회 기업을 설립하여 제2의 삶을 살아가며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주먹 쥐고 치삼”이 막을 내린 지 약 두 달 만에 비보가 전해져 더욱 안타까운데요. 부디 그곳에서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연극과 함께 행복하게 지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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