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꽃미남 가수 촬영 중 비행기 추락 “100만분의 1의 확률 사고로 결국” 그의 안타까운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원조 꽃미남 가수 김원준은 90년대 가요계를 주름잡은 영원한 오빠로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비주얼 때문에 인기가 많다는 선입견이 있었고 이 음악적인 실력에 대해서 높이 평가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김원준은 처음 데뷔할 때부터 작사 작곡을 해온 싱어송라이터며 다른 가수들 곡도 종종 씁니다.

데뷔곡인 모두 잠든 후에는 데뷔 전 학창 시절을 만들었던 곡이고, 자기 노래의 대부분이 자작곡이라고 합니다. 김원준은 무려 300곡이 넘는 자작곡을 남기고 있는 싱어송라이터입니다. 김원준의 이미지로 보면 평생 꽃길만 걸어왔을 것 같은데, 모든 사람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잘 나갈 때가 있고, 또 잘못 나갈 때가 있는데, 그의 인생 또한 마찬가지였으며 심지어는 죽을 고비와 생활고를 겪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그의 인생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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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김원준은 1973년생으로 우리나라 나이로 52세라고 합니다. 보통 10년만 어려 보여도 동안이라고 하는데, 그는 20년 정도 더 어려 보이는 초 동안입니다. 동안의 비결은 삼시 세끼를 챙겨 먹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고향은 서울 서초구로 서울 토박이이며, 아버지는 산부인과 전문의로 개인 병원을 운영하는 병원장이었고, 어머니는 간호사 출신으로 아버지가 인턴으로 일하던 병원의 간호사였습니다.

그 사이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으리으리한 집안이 화제가 된 적도 있습니다. 할아버지, 고모부, 친형도 모두 의사입니다. 그러나 의사인 아버지가 지나치게 엄격하게 훈육했다고 합니다. 데뷔 초 일간 신문에 연재된 어린 시절 회고를 보면 사실 의외로 굉장히 우울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김원준의 유아 시절, 놀이 상대는 오로지 강아지와 자전거였으며 말도 없고 사람의 살이 몸에 닿기만 해도 깜짝 놀랄 정도로 소심해서 주위 사람들이 자폐증 걱정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가 용산구에서 개인 병원을 하던 시절,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런 가정 교육과 소심한 성격은 초등학교 진학 후에도 계속되어서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같이 놀았던 친구나 추억이 전혀 없었으며 중학생쯤에야 겨우 외향적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교 시절에는 4인조 아마추어 밴드 쥬크박스를 결성해 활동했고,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예술대학이 진학하였습니다. 재학 중에 메탈 그룹 라스트신을 거쳐 통기타 클럽인 예음회에서 활동하면서 음악에 더욱 심취하게 됩니다.

오디션과 데뷔

91학번 동기인 유재석은 대학 입학하자마자 대학 개그제에 입상하여 그를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훗날 방송 ‘슈가맨’에서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김원준은 1차 서류 전형부터 계속 탈락하자, ‘나는 이쪽은 아닌가 보다, 졸업이나 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의기소침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1992년 예음회 선배가 한 오디션을 추천했는데, 광고 모델을 뽑는지만 노래가 가능한 모델을 뽑는다고 알려졌습니다. 그 당시 장발이 유행이라 김원준도 머리가 길렀고 1차, 2차 통과 후 마지막 관문에서 심사위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머리만 자르면 딱인데…”라는 말을 듣고 바로 머리를 자르고 합격했다고 합니다.

그 광고가 바로 추억의 ‘카운트다운’ 광고로 당시 제일기획에서 개최한 가수 오디션에 합격한 것입니다. 당시 제일기획에서는 같은 삼성그룹 계열인 삼성물산의 의료 사업부에서 런칭한 새로운 패션 브랜드인 ‘카운트다운’의 광고 기획을 맡았는데 참신한 신인 가수를 발굴해서 음악과 cf를 동시에 선보이며 유행을 만들어가는 파격적인 광고 전략이 수립되어 ‘오렌지’라는 레이블로 음반 사업을 시작했고 cf 전속 모델을 겸하는 신인 가수를 발굴해내는 과정에서 김원준이 뽑힌 것입니다.

이 오디션에서 불렀던 노래가 자작곡인 ‘모두가 잠든 후’입니다. 제일기획은 곧바로 김원준의 데뷔 앨범 제작에 착수했고 김원준의 자작곡들을 비롯해 작곡가에게 받은 노래를 모아 음반 작업을 진행하고 동시에 김원준은 ‘카운트다운’ 광고 촬영과 밤샘 작업을 통해 음반 녹음을 수행하는 등 톱니바퀴가 맞물리듯이 딱딱 짜여진 계획 속에서 데뷔 준비 과정을 거치며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결국 김원준은 오디션 합격 후 단, 45일이라는 단기간에 cf 모델과 가수로 데뷔하는 기염을 토했으며 데뷔 앨범 타이틀곡 ‘모두 잠든 후에’는 가요차트에서 17회나 1위를 차지하면서 김원준은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리며 성공적인 데뷔를 했습니다.

이영자와 보디가드

데뷔 당시 대표적 미남 스타 신인 아이돌의 이미지가 강했던 지라, 롱런을 예상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93년부터 각종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에도 적극적으로 출연해서, 당시 MBC 대표 예능 프로그램인 특종 TV 연예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습니다.

당대 최고의 개그우먼 이영자와 함께 영화 보디가드를 패러디했는데, 최고 가수로 나오는 이영자를 괴한이 총으로 위협하며 인질로 삼는데, 괴한의 총에 왼쪽 어깨를 맞음에도 불구하고 발차기로 괴한을 제압한 뒤, 육중한 이영자를 김원준이 엎고 나가던 장면은 그야말로 큰 화제를 일으키며 김원준의 인지도는 전 국민 아이돌로 급상승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말 못할 비밀이 숨어있다고 김원준이 훗날 고백했습니다. 이 장면을 찍기 전에 리허설했던 김원주는 있는 힘을 다해도 이영자를 들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제작진은 이영자의 어깨를 부축해서 걸어 나가는 것으로 촬영 내용을 수정했는데, 이영자가 김원준에게 귓속말로 “너, 나 들어올리면 난리 난다. 대박 날 거다.”라고 얘기했고 그래서 신인 시절의 김원준은 이를 악물고 이영자를 무려 8번이나 들어 올렸습니다. 방송이 나간 다음 날, 김원준 집 앞 복도까지 아이들로 꽉 찼을 정도로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승승장구

그리고 1990년대 초·중·반의 대표적 문화현상이었던 x 세대의 아이콘으로 등극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크게 얻기 시작했습니다. 1993년 2집에서 락과 댄스 등을 절묘하게 결합한 자작곡 언제나를 타이틀곡으로 사뭇 다른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 그는 골든디스크 본상, MBC 10대 가수상, KBS 올해의 가수상을 받은 등 오디오와 비디오가 결합한 가수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어 1994년 30대의 인기가 절정이었는데 너 없는 동안으로 정열적인 허리춤, 치마 패션으로 일약 신드롬이 불러 일으키며 가요 톱10에서 5주 연속 1위 골든 컵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동시에 드라마, 영화 제의가 쏟아졌으나 가수 활동에만 전념하겠다고 고집하다가 1995년에는 결국 배우로도 영역을 넓혀 공군사관학교 생도의 생활을 그린 KBS 드라마 창공의 주인공으로 활약했고 이 드라마의 주제곡인 세상은 나에게도 김원준이 직접 작곡해 불렀습니다.

하지만 이후 그는 싱어송라이터로 아티스트가 되어야 한다라는 강박 관념에 빠지게 되면서, 과거와는 달리 과감하고 새로운 시도를 통해 음악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앨범 제작을 하는 바람에 대중성은 그만큼 멀어지기 시작했으며, 앨범들은 전성기만큼의 인기를 얻지 못하면서 최고의 톱스타로서 지휘는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그의 전성기도 차츰 저물어 가게 되었습니다.

경비행기 추락 사고

그러다가 생명을 위협하는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1998년 화성에서 경비행기를 탔다가 갑작스레 경비행기가 추락하게 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이에 김원준은 “극과 극 체험이라고 남희석, 박수홍 형님이 진행하시던 예능 프로그램이 있었다.”라며 “난 그 안에서 가장 싼 비행기를 타고 상대는 가장 비싼 비행기를 타는 역할을 맡게 됐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당시 그 조종사가 내게 비행기가 절대 추락할 일이 없다라고 했다. 확률이 100만분의 1이라고 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탔는데 착륙할 때 맞바람에 힘없이 꺾여서 그냥 밑으로 떨어졌다.”라고 회상했습니다. 비행기가 추락하다니 경비행기 추락 사고는 대부분이 죽고, 생존 확률이 적은 사고인데 크게 다치지 않고 살아난 것만 해도 기적입니다.

사고 당시 기절에서 응급진료 후 서울로 후송, 서울 영동 세브란스에 입원했으며 정밀검사 후 팔과 다리, 목 등의 골절상, 약한 장 파열 등이 발견되어 일주일 정도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무리한 퇴원 후 팔과 목 깁스를 하고서 미리 짜인 스케줄을 소화하는 등의 투혼을 발휘했습니다.

생활고

게다가 1999년 병역 문제에 연루되면서 이미지에 심한 손상을 입었고 마음고생하는 등 예기치 않았던 순환도 겪었습니다. 의혹 내용은 의사였던 아버지가 아들 몰래 뇌물 수수에 연루 김원준이 아버지의 뇌물로 면제받은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사 결과 대가성이 없다는 판단과 여러 차례의 공개 재검을 통해 습관성 어깨 탈구를 동일 사유로 면제 판정을 받으며 의혹을 벗었으니 결국 억울할 수 있는 사례였습니다.

전성기 시절 벌어놓은 전 재산을 탈탈 털어 지은 녹음실 디어넷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직접 음반 제작까지 참여하게 되었는데 6집 음반 발매 이후에 계속된 실패로 결국, 정규 9집 발매 후에는 생활고에 빠집니다. 잘 나가던 시기에 좋아하는 모델을 종류별로 사놓을 정도로 많았던 자동차들, 적금과 부동산도 정리하면서 재산은 밑바닥을 드러내게 됩니다.

또한 아들이 스스로 일어서길 바라는 아버지가 지원하지 않았고 결국 그는 스스로 재개하기로 마음을 먹고 2002년부터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행사를 뛰었고 잘 나갈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드라마 등에도 출연하는 등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연예계 활동을 하면서 재기에 어느 정도 성공하게 됩니다.

그의 결혼

김원준의 결혼은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맛집 동호회에서 지인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상대방의 직업을 서로 잘 몰랐다고 합니다. 김원준은 사람을 보고 먼저 만났고 그 후에 직업을 알게 됐다고 합니다. 신부는 무려 검사입니다.

검사 공부만 했던 사람이라 TV를 거의 안 봐 김원준을 잘 몰랐다고 박소현을 닮은 미녀 법조인으로 더욱 화제가 되었습니다. 무려 14살 나이 차이 나며, 결정적으로 마음을 굳히게 된 계기는 김원준은 어머니와 대화를 거의 하지 않는데, 자기 집에 인사하러 와서 예비 신부가 어머니와 대화를 잘 나누며 어머니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내 인생을 전부 걸어도 되겠다라는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만난 지 3개월 만에 초고속으로 결혼합니다. 그리고 9개월 후인 2017년 첫 딸을 낳아 아빠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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