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발탄’ 국민 성우 만성신부전으로 결국 “순재야 먼저가서 기다릴게” 그의 안타까운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때로는 인심 넉넉한 할아버지 같은 고소한 입담으로 때로는 시사 평론가 못지않은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줬던 이가 있습니다. 바로 모두가 아는 목소리의 주인공 오승룡입니다.

오승룡은 KBS 1기 남자 성우이자, 활동 중인 한국 남녀 성우 중 최고령, 최고 선임자였습니다. 그는 한국 방송 역사의 산증인으로 손꼽히는 라디오 스타였습니다. 오래된 활동 기간만큼 다수의 작품을 남긴 살아있는 전설이었습니다.

오승룡은 지난 2016년에는 그 공을 인정받아 공로상까지 받았습니다. 당시 수상 소감처럼 오래도록 방송에 이바지할 줄 알았으나 얼마 전 돌연 비보를 전해 많은 이들을 슬픔에 빠뜨렸습니다.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가 세상을 떠나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은 성우 오승룡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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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 데뷔와 활약

성우 오승룡은 1935년생으로 1954년 경기고 3학년 12월, 중앙대 입학을 앞둔 상태에서 서울중앙방송국 현재 KBS 성우 극단원 1기로 뽑혀 연기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한국 남성 성우 최초의 최연소 데뷔 성우로 성인이 되자마자 성우에 입문한 셈입니다. 오승룡은 어린 시절부터 연기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유치원 때 어린이극을 접하고 중·고등학교 때 연극반 활동을 하며 연기에 대한 꿈을 더 키웠습니다. 그리고 대학생이 된 후에는 우연히 신문에서 방송 극단 연구생을 뽑는 모집 광고를 보고 응시하였습니다.

그렇게 순풍에 돛단 듯 그는 성우로 데뷔했습니다. 성우로 데뷔한 오승룡은 장희빈, 청실홍실 등 라디오 드라마에 출연하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는 성우 월급으로 양담배를 피울 정도로 남들보다 풍족한 생활을 했습니다. 오승룡은 라디오 드라마에서 이름을 알린 후, 일반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구수한 입담으로 점점 인기를 얻었습니다. 방송휴게실이라는 음악 프로그램에서 라디오 디제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고 내시 목소리를 처음 개발한 것도 오승룡입니다.

오승룡은 한국 방송 역사의 산증인으로 손꼽히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 나갔습니다. 오랫동안 맹활약한 오승룡은 그동안 받은 상만 나열해도 입 아플 정도입니다. 그는 제7회 방송 대상 성우 상, 대한민국 방송 대상, 라디오 연기대상, 2011년 제2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보관문화훈장 등을 받으며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오발탄’으로 인기 얻으며..

라디오 진행자로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던 오승룡은 61년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면서 활동 영역을 넓혔습니다. 수많은 프로그램 중 그에게 가장 뜻깊은 프로그램을 꼽자면 단연 오발탄을 꼽을 수 있습니다. 국내 방송 최초의 사회 고발 프로그램인 오발탄은 군사정권 시절 부정부패와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프로그램입니다. 1963년 첫 회를 시작해 1970년대 초까지 10년 가까운 세월을 전부 오승룡이 도맡아 방송한 장수 프로그램입니다.

오승룡은 오발탄에서 박진감 넘치는 일인다역 목소리 연기를 선보여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오발탄은 5분 동안 방송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1분부터 4분까지 비판하다가, 남은 1분 동안은 모든 상황을 비꽈버린 후 “오~발~탄”하고 끝내는 방식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잘못 쏜 총, 오발탄이기 때문에 비판의 상대가 더 몰아갈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통쾌한 풍자를 하는 오발탄의 인기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당시 오승룡의 동료들은 곤란한 상황이 생기면 으레 그를 부르며 상황을 모면했습니다. 오발탄을 진행하는 오승룡의 동료라는 사실만으로도 상대방이 쩔쩔매면서 오승룡 동료의 편을 들어주기도 했습니다. 오발탄은 인기리에 방송된 프로그램이고 오승룡의 이름을 널리 알려준 고마운 프로그램이지만 절대 쉽지만은 않은 방송이었습니다.

방송에 위기 순간

방송이 한참 진행되던 1964년은 6월은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을 때입니다. 그렇기에 당시 방송되는 프로그램들에도 압박이 들어왔습니다. 오발탄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계엄군이 방송국을 지키며 압박을 주던 상황에서도 오승룡은 멈추지 않고 방송했습니다. 오승룡은 당국으로부터 직접 해코지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알게 모르게 많은 주위와 간섭을 받았다고 합니다. 훗날 오승룡은 “난 백도 없었는데 무사했어요.”라며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기관원들의 감시와 눈초리가 끊이질 않아서 방송국이 아닌 곳에서 숨어 녹음을 진행한 적도 있었다.”라고 밝혔습니다. 방송국의 감시가 심해질 때는 건물 수위의 도움도 받았다고 합니다. 수위를 통해 방송국 안에 수사 요원이 있는지 확인 후 방송국에 출입했습니다. 또한 이런저런 사정이 여의찮을 때는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하며 방송을 사수했습니다. 방송 엔지니어와 짜고 구석에서 짧은 녹음을 마친 뒤 생방송 시간에 맞춰 테이프를 꽂아 방송했습니다. 생방송 테이프만은 수사 요원들이 건들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한 것입니다.

긴박한 진행으로 검열을 피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제작진들과 연락도 긴밀하게 했고 방송국에 출근하지 않고 몰래 건너편 다방에 숨어 대기하며 다방 아가씨를 통해 제작진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5분짜리 방송을 위해 숨 막히는 노력을 한 것입니다. 이 사실들로 그가 얼마나 애정을 갖고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상황이 여의찮음에도 오발탄은 계속해서 날카롭게 사회 현실을 풍자하는 방송을 진행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시 정부 부처에서는 오발탄 담당을 따로 꾸려 주시했습니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의 프로그램은 폐지되었지만, ‘오발탄’은 사회의 한 획을 그었고 오승룡에게도 잊지 못할 경험을 남겼습니다. 오승룡이 두각을 나타낸 곳은 사회 풍자 부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연기에도 능통했습니다.

어떤 역할을 맡던 높은 몰입도와 완벽한 소화력으로 극의 재미를 더했습니다. 그가 악역을 맡을 때면 서늘한 느낌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으며 코믹한 역할을 맡을 때면 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다양한 배역을 소화해냈던 그는 내시 목소리도 최초로 연기하며 기준점을 세웠습니다.

원조 내시

오승룡은 KBS 아침마당에 출연해 최초 내시의 역할을 맡았던 당시의 자세한 내막을 알렸습니다. 장희빈이 라디오 극으로 방송되던 시절, 오승룡은 극중 내시 역할을 배정받았습니다. 당시 장희빈은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작품에 합류하게 된 오승룡은 처음에는 뛸 듯이 기뻤지만, 내시 역할을 맡았을 때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내시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감조차 잡지 못했고 그저 어렵기만 했습니다. 오승룡은 내시의 이미지를 청취자에게 어떤 식으로 전달해야 하나?, 어떻게 라디오에서 표현해야 하나? 한참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직접 발 벗고 나서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연구했다고 합니다. 경기도 송추의 내시촌을 찾아가 보았고 효자동 통인시장의 내시가 운영하는 가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오승룡이 직접 만난 내시들은 체격은 건장하지만, 행동은 여성스러운 특성이 있었습니다.

이에 고민하던 오승룡은 건장한 체격 조건보다는 여성스러운 특성을 살리고자 결심했습니다. 얇은 코맹맹이 소리를 만들어 내시 역할을 소화해냈습니다. 오승룡의 이런 노력으로 내시 목소리라는 것에 기준점이 잡혔습니다. 지금까지 내시 목소리가 얇고 여성스러운 이미지로 자리 잡은 데에는 오승룡의 피나는 노력이 큰 몫을 했습니다.

공로상 수여

작은 역할에도 온 힘을 기울였던 그는 2016년에는 그동안 방송이 이바지한 바를 인정받으며 한국방송대상 공로상을 받았습니다. 시상은 이순재의 소개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순재는 오승룡을 “지금도 활동하고 있으며 방송사의 길이 남을 명품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치켜세웠습니다.

그리고 무대에 오른 오승룡과 뜨거운 포옹을 나누며 트로피를 건넸습니다. 오승룡은 “앞으로도 맹활약하겠다.”라는 포부를 밝히며 많은 이들에게 기대감을 심어줬습니다.

안타까운 비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방송 활동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만성 신부전을 앓던 오승룡은 2021년부터 급격한 건강 악화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2021년 말에는 심장에 물이 차는 증상으로 수술까지 받았습니다. 다시 일어나라는 많은 이들의 염원에도 그는 2022년 2월 향년 8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유가족은 물론 방송 관계자들도 슬픔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대한민국 방송사에서 큰 별이 하나 졌다라며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습니다. 일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오승룡 60년이 넘게 방송 생활을 하면서도 지각 한번 없이 근면 성실하게 활동했습니다. 사생활 논란도 한 번 없던 그저 방송에만 인생을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방송에 대한 오승룡의 책임감과 열정 깊은 태도는 앞으로도 방송계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지금 계시는 그곳에서는 걱정하는 일 없이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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