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장관에 집은 900평의 놀라운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저는 늘 죽고만 싶었어요” 그녀의 안타까운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올해로 데뷔 61년 차가 된 국민 배우 김혜자의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인생 스토리가 화제입니다. 그녀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자세한 내용 알아보겠습니다.

금수저
👉”김수미의 연이은 실수로 김혜자 아들까지 해명해야 했던 상황” 어떤 상황이었는지 확인해 보세요.

김혜자의 아버지

김혜자는 일제강점기 시절인 1941년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 격인 경기도 경성구 남부에서 출생했습니다. 김혜자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대한민국 TV 방송 사상 최장수 드라마로 무려 22년 동안 방영되었던 MBC 전원일기에서 보여준 소박한 쪽진 머리에 과거 한국의 전형적인 어머니상 이미지이거나 아니면 최고 시청률 64%를 찍은 역대 최고의 화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보여줬던 파자마차림의 그저 평범한 동네 아주머니 그리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모자를 눌러쓰고 아프리카를 다니며 약자들을 돌보던 헌신적인 이미지 등일 것입니다.

그런 이미지 때문인지 김혜자가 엄청난 금수조 엘리트 집안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아 보입니다.
김혜자 아버지 김용택 박사는 그 옛날 일본 명치대학과 미국 미시간주의 호프 대학을 거쳐 시카고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경제학 박사가 된 입지전적의 엘리트입니다. 김용택 박사는 유학 시절 북미 유학생 총회 이사장과 총회장을 겸했고 중국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에도 참여한 독립운동가였죠. 이 일로 김용택 박사는 1940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감옥에 갇히는 시련도 겪었다고 하네요.

해방 후 그는 대학 시절 가깝게 지내던 미국인의 추천으로 미군정 때 현 재무장관 격인 재무부장 자리에 올랐고 특유의 청렴함과 깔끔한 업무 수행 능력을 높이 평가받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의 제1 공화당 시절 지금의 보건복지부 격인 사회부 차관을 3년 동안 역임했습니다.

금수저 집안

김혜자의 할아버지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김혜자의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시절 군산의 엄청난 땅을 소유하던 재력가로 군산상공회의소 의원과 미도장도 직접 운영한 사업가로 지역에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김혜자는 반짝 졸부 집안이 아닌 뼈대 있고 재력과 덕망을 과시하는 초상류층 엘리트 집안의 귀한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김혜자는 자신의 유복했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재무부 장관이었기 때문에 거실만 200평에 대지가 900평이 되는 큰 사택에서 자랐어요.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집이 너무 커서 여기가 공원인 줄 알고 놀러 들어오기도 하고 그랬죠. 저희 집에는 맨날 손님들이 찾아와 사교 모임도 하고 부부 동반 댄스 파티를 열고 그랬어요. 심지어 영화사에서도 저희 집을 빌려 영화 촬영지로 사용하곤 했었는데 저는 아직도 그때 들었던 음악 소리와 음향들 그리고 집으로 놀러 온 서양 사람들이 아버지를 닥터 킴, 닥터킴이라고 부르던 것들까지 다 기억을 해요.” 김혜자의 범상치 않은 가정 환경은 그녀의 양력을 잠깐만 살펴봐도 단번에 느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최고의 엘리트 코스

김혜자는 당시 여학생들의 최고 엘리트 코스로 불렸던 경기여중, 경기여고를 거쳐 1961년 이화여대에 진학했습니다. 그 때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흔하지 않던 시기라 여자들은 남자를 잘 만나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가는 것이 최고의 미덕으로 통하던 시절이었고 그렇게 소위 장관 사모님 라인으로 불리던 최고의 신붓감 코스가 바로 경기여고에서 이화여대로 이어지는 코스였는데 김혜자가 바로 그런 장관 사모님 라인을 거친 최고의 예비 신부감이었던 것이죠.

이처럼 김혜자는 겉으로 보기엔 부모 잘 만나 인생의 위기 없이 탄탄대로를 달리며 모두가 인정하는 국민 배우로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최고의 자리에서 마냥 행복하게 성공적인 삶을 살아온 듯 보이지만 신은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다는 말처럼 김혜자 역시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고통스럽고 힘든 자신만의 수많은 위기들과 치열하게 싸우며 지금의 자리에 오른 산 증인입니다.

늘 불행했던 삶

김혜자는 최근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한 “생에 감사해”라는 책을 통해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인생 스토리를 공개했는데 책에서 소개한 바에 따르면 김혜자는 우울한 성품을 타고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정신이 강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부잣집 큰 저택에 살면서 밝고 사교적이고 화려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법도 한데 이와는 정반대로 김혜자는 사람들과 활발하게 소통하는 걸 힘들어하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하죠.

그런 성향 때문인지 고등학교 시절에는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 그냥 죽어버릴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실제로 수면제를 입에 털어놓고 병원에 실려가 위세척을 해야만 했던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고 합니다. 남들은 김혜자의 환경을 부러워했을 수도 있지만 정작 김혜자는 늘 불행하기만 했던 아이러니한 상황이죠.

김혜자의 어머니

김혜자의 어머니 역시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는 최고의 엘리트이자 장관 남편을 둔 사모님으로 남들이 봤을 땐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화려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녀에게도 인생은 절대 녹록지 않았습니다. 조선시대만 해도 남자는 15살에 혼인이 가능했고 그렇게 과거에는 어린 신랑이 많았던 것처럼 김혜자의 어머니도 19살의 나이에 두 살 아래인 17살의 어린 신랑에게 시집을 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김혜자의 어머니가 딸 둘을 낳은 후 남편은 17년간의 긴 유학길에 올랐고 그렇게 17년 동안 김혜자의 어머니는 남편과 생이별을 한 채 고생이란 고생은 혼자 다 하고 지내게 됩니다. 김혜자는 아버지가 유학 후 돌아와서 늦게 나온 딸이기 때문에 김혜자와 언니들과의 나이 차이는 15년 이상이 난다고 하죠. 남편을 유학 보내고 김혜자의 어머니는 친정에서 두 아이를 홀로 키우며 지냈는데 친가 역시 군산 지역에서는 거상 집안이라 김혜자의 어머니는 매일 사랑방에 드나드는 손님들의 식사를 챙기느라 아침마다 상을 열여덟 번씩 차리곤 냈다고 합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혼자 아이들 키우랴 집안 살림을 도우랴 정신없이 힘들게 지낸 탓에 폐결핵에 걸려 죽을 뻔도 하고 6.25 때는 가족이 전명할 뻔한 큰 위기를 겪게 됩니다. 그렇게 시대적으로 환경적으로 모진 풍파를 견디며 살아와서인지 김혜자는 자신의 어머니가 활짝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며 안타까워 한 바 있습니다. 김혜자의 어머니는 “아유 머리야”라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사셨는데 그렇게 늘 아픈 어머니를 보면서 어린 김혜자는 “왜 우리 엄마는 항상 저렇게 머리가 아프고 얼굴이 창백할까?” 라고 늘 생각했다고 합니다.

아픈 엄마를 대신해 김혜자는 주로 큰 언니의 손에서 자랐는데 그렇게 자매들과도 나이 차이가 워낙 심했던 탓에 김혜자는 그 큰 집에서 주로 혼자 책을 보며 시간을 보냈고 늘 마음 한 켠에는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속은 비어있는 우울한 학창 시절을 보낸 김혜자는 뚜렷한 목표 의식도 없었고 대학교는 가야 했기 때문에 이화여자대학교 생활미술학과에 진학하게 됩니다.

연기를 시작한 계기

김혜자는 어렸을 때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 추천으로 연대 세브란스 의전 학생들의 연극 공연에서 개에게 물려 공수병으로 죽어가는 아역을 처음으로 연기한 적이 있는데 그때 어린 김혜자가 어찌나 연기를 잘했는지 객석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들이 제발 아이를 죽이지 말라고 공연 중에 아우성을 치고 난리였다고 합니다.

내성적인 소녀였지만 아마 그 순간 김혜자의 마음 속에 연기에 대한 희열과 열망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김혜자는 어렸을 때부터 영화도 좋아하고 막연히 연기도 하고 싶었지만 이화여대에는 그런 과가 없었기 때문에 미술학도로 대학 생활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학업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무기력한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그녀에게도 큰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대학교 2학년 겨울방학 무렵 당시 KBS가 개국을 하면서 탤런트를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죠. 김혜자는 무턱되고 준비도 없이 방송국에 찾아가 탤런트 시험을 보게 되었고 그렇게 김혜자는 KBS 공채 1기 탤런트로 덜컥 합격을 하게 됩니다. 드디어 그렇게 하고 싶었던 연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집안의 반대

하지만 당시만 해도 배우나 코미디언, 가수 같은 연예인들은 딴따라로 불리며 하대받던 시절이다. 김혜자는 가족들에게 자신이 텔런트시험에 붙었고 배우를 하겠다는 얘기를 쉽게 꺼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겨우 가족들에게 사실을 말했더니 역시나 예상대로 어머니와 언니들은 김혜자에게 “네가 미쳤다”고 난리를 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집에서 유일하게 아버지만은 김혜자의 편이 되어 주었죠. 미국에서 유학을 하며 자유롭고 예술가적인 기질을 지니게 된 아버지는 김혜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은 배우가 돼서 좋은 연기를 한다면 다른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좋아. 열심히 해봐라”라고 말이죠. 그렇게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기를 하고 싶었던 김혜자였지만 그런 그녀에게 공채 탤런트 합격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갑작스런 결혼

김혜자는 연기자가 되고 싶다는 의혹만 있었을 뿐 전혀 연기에 기초를 갖추고 있지 않았던 탓에 제대로 된 연기를 선보일 수가 없었고 오히려 그런 자신의 모습에 큰 충격과 수치심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고 실망스러웠죠. 그렇게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김혜자는 연기도 학업도 모두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으로 공채 탤런트 연수도 채우지 못하고 학업도 중단한 채 스물두 살의 나이에 11살 연상의 남편을 만나 현실에서 도망치듯 결혼을 선택합니다. 당시 이화여대에는 금혼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김혜자는 사실상 대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그렇게 도망치듯 선택한 결혼으로 김혜자는 또 다른 인생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결혼을 하면 곧 아이의 엄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과 결혼으로 자신의 위치가 어떻게 바뀌는지 등에 대한 깊고 구체적인 생각을 해볼 겨를도 없이 김혜자는 벌컥 첫 아이를 임신하게 된 것이죠. 준비 없이 텔런트가 되어 스스로 큰 상처를 받았던 김혜자였기에 이번에도 준비 없이 덜컥 엄마가 되어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김혜자는 아이에게만 온 정신을 쏟기로 하고 출산 전부터 인형을 가지고 목욕 연습을 하는 등 철저히 준비된 엄마가 되기 위해 극성을 부렸습니다. 그렇게 아이가 태어나고 네 살이 될 때까지 김혜자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조차 끊은 채 아이에게만 집중했다고 하죠.

깊은 우울증

다른 사람이 자신의 아이를 안는 것조차 견디지 못할 정도로 김혜자는 아이에게 집착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집착은 또 다른 시련으로 이어졌습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젖을 먹일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고 아이가 엄마보다 친구들과 밖으로 나가 노는 것을 더 좋아하는 순간이 찾아오면서 김혜자는 어떻게 내 아이가 저럴 수가 있나 싶은 생각에 다시 한 번 깊은 고독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을 잊고 아이의 엄마로 한 남자의 아내로만 살다 보니 어느새 김혜자는 인생의 허무함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더 커져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 순간 남편도 싫고 아이도 싫고 결혼한 자신도 싫고 모든 것이 싫어진 깊은 우울증에 빠지게 된 것이죠. 당시 김혜자는 자기 자신이 한 편의 부조리한 연극 그 자체라고 느껴졌을 정도로 삶의 방향을 완전히 상실한 채 방황하게 되었고 신경정신과 의사를 만나 정신 상담을 받아야 할 정도로 정신이 피폐해졌다고 합니다.

다시 연기를…

그런데 그렇게 길을 잃고 헤매던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과거 그녀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수치심을 안겨준 연기였습니다. 김혜자는 아는 선배의 소개로 작은 소극장에 들어가 연극을 하고 연기의 기초를 하나 둘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연습을 하고 차근차근 기초를 탄탄하게 세우니 어느덧 연기에 자신이 굳고 무대 위에서 보람도 느끼게 되었죠.

그렇게 김혜자의 무너졌던 자존감은 조금씩 회복이 되었고 그제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인생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깊은 우울증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고 그렇게 바닥을 몇 번 찍은 후에야 점점 씩씩해질 수 있었다고 김혜자는 말합니다. 이후 4년 동안 신나게 연극에 몰두한 김혜자에게 또다시 기회가 찾아옵니다. MBC가 개국하면서 김혜자가 스카우트 되었고 이후 6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국민 어머니로 국민 배우로 김혜자는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오고 있는 중입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과거를 회상하며 김혜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아이의 엄마 그리고 아내와 며느리라는 위치를 잊고 오직 배우 김혜자로서만 있고 싶었던 순간이 자주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저는 지금도 아이들과 먼저 하늘나라에 간 남편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라며 김혜자는 연기자로서는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가족들에게는 늘 부끄러운 엄마였고 부족한 아내였다고 자신을 질책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김혜자는 1998년 췌장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의 얘기가 나올 때면 늘 울컥하곤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혜자의 남편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도 “세상 물정 모르는 아내가 자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 라며 자신보다 혼자 남겨질 김혜자를 더 걱정해 준 정말 따뜻하고 자상한 좋은 남편이었다고 하네요.

평소 김혜자는 어디 가서 축의금이나 부의금 같은 것을 낼 때 남편이 멋지게 한 문으로 대신 써준 봉투에 담아 내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런 아내를 위해 남편은 세상을 떠나기 전 수많은 봉투에 “축의”, “부의”라는 한문을 적어주고 떠났다고 합니다. 이런 에피소드만 들어봐도 김혜자가 얼마나 남편에게 사랑을 받았고 큰 축복을 받은 인생을 살았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김혜자의 요즘 제일 큰 관심거리는 어떻게 하면 나를 잘 끝 마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라고 합니다. 어느덧 80년이 넘는 인생을 살아왔고 60년이 넘게 연기를 해왔으니 언젠가는 끝도 올 텐데 그런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잘 마치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는 것이죠. 김혜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이제는 대사를 외우는 게 예전 같지 않아요. 예전에는 10번 만에 외웠을 걸 이제는 20번 30번을 반복해야 외워져요. 이렇게 해도 안 외워질 때는 연기를 그만둬야 해요. 언젠가는 그런 순간이 저에게도 올 텐데 그런 게 두렵죠. 하지만 지금은 그래도 외워지고 아직까지도 외울 수 있게 해주시니까 그런 게 저는 너무 감사하죠.

언젠가 하나님이 네가 더 세상에 있다가 와라 그러시면 앞으로 더 외우게 해주실 거고 이제 올 때가 됐다라고 하시면 못 외우게 되겠죠. 저는 지금도 앞으로 무슨 역이 좋아질까를 생각하면 설레요 그러니까 지금은 연기를 더 해야겠죠. 저는 생에 제가 연기를 이렇게 할 수 있게 해주신 것에 감사해요.” 라며 천생 연기자로서의 서명을 잘 감당해온 자신의 인생을 덤덤하게 되돌아봤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건강하시고 국민 어머니로 온 국민에게 따뜻함과 큰 울림을 선물해주는 좋은 연기를 오래오래 보여주시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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