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미남배우 충격 근황 “100억대 자산가에서 마트 점원으로…” 그의 안타까운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배우 한지일은 1970년대 장동건이란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인한 배우의 얼굴 값을 제대로 해내며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였습니다. 그는 영화배우뿐만 아니라, 영화 제작자로서도 이름을 떨쳤고, 이후 비디오 영화 전문회사 한시네타운을 세워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성인 영화 젖소부인 바람 났네를 시작으로 300여 편이 넘는 영화를 제작하며 성공 가도를 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990년대 당시 100억 대의 자산가라 할 정도로 남부럽지 않은 인기와 재산을 가졌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어느 날 그는 이 모든 부귀영화를 내려놓고 대중들 앞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당시 그는 하루아침에 이 모든 걸 잃고, 심지어 한때 사랑했던 아내에게 찾아가 방화를 저지르며 옥살이까지 해야 했던 배우 한지일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배우
👉”80년대 대표 여가수의 충격 근황 아들 잃고 칠성파 행동대장과 재혼 후 결국” 그녀의 안타까운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이름을 알리지만 정치적 압박으로

한지일은 1·4 후퇴 때, 남으로 내려온 황해도 출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유복자로 태어났으며, 비록 어머니 혼자서 그를 키우셨지만, 당시 유치원을 다녔을 만큼 상당히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가 배우가 된 계기는 고등학교 시절 영화배우 윤일봉이 홍콩에서 활동하다가 한국에 돌아왔는데, 그때 한지일의 집 2층에서 한 1년 정도 살게 되었고, 그때부터 촬영장에 아저씨, 아저씨 하며 따라다니며 영화배우의 꿈을 키웠다고 했습니다. 그 후 그는 틈날 때마다 영화배우 오디션을 보러 다녔고, 그런 와중 1972년에 명동을 걷다 신상옥 감독에게 길거리 캐스팅되어 여러 작품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1973년 ‘바람아 구름아’부터 본격적으로 본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뜬금없이 정치적 탄압을 받기 시작하는데, 당시 권력의 반대 세력인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둘째 아들 김홍업과 대학교 시절 친한 친구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당시를 그가 고백하길,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난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단, 친구가 좋았고, 그의 아버님이 좋아서 두 집안이 오랜 친분을 쌓았을 뿐인데, 내가 점점 유명해지기 시작하면서 너무도 많은 압박을 받았고, 내가 찍은 영화는 개봉조차도 할 수 없으니, 어느 감독이 나와 영화를 찍으려 하겠는가? 그때 신 감독님이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홍콩 배우 리칭반혼녀라는 영화를 준비하고 계셨는데, 그 작품을 찍기 위해 홍콩으로 가려 했지만, 그마저도 결국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훗날 정작 그분의 아버지가 당선되자 오히려 안가에 끌려갔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그분의 이름을 팔고 다니지 않았느냐?라며 추궁했고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쓰자, 대통령 각하라고 부르라며 죄인 다루듯 지시하며 하대했다. 그런데 속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분이 대통령 되었으니 좋겠다고 하자,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헛웃음이 나왔다.”라고 했습니다.

최고의 배우

아무튼 다시 돌아와 80년대 정치적 탄압으로 영화에 출원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던 그는 당시 이미 군대를 전역한 상태였지만, 미군을 지원하며 군대를 두 번이나 다녀오게 됩니다.

이유는 한국에서는 정치적 탄압이 심하니 미군 자격으로 영화를 찍기 위해서였고, 그렇게 미국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 그에게도 기회가 왔습니다. 바로 이두용 감독의 ‘뉴욕 44번지’와 홍의봉 감독의 ‘캘리포니아 90006’의 주연으로 출연하게 됩니다. 다행히 두 작품 모두 10만 이상의 관객으로 당시로서는 대단한 흥행을 기록하며, 이때부터 그는 영화계의 정상급 스타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다행히도 두 작품 이후에는 별다른 제약 없이 약 40여 편의 영화를 줄기차게 쏟아낼 수 있게 되었고, 당시 여러 시상식에서 상이란 상을 다 휩쓸며 한때 최고의 배우로 주목받기도 했습니다.

‘젓소부인 바람났네’로 대박났지만..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한지일은 1990년대 초 영화사까지 차리게 됩니다. 이때 그 유명한 젖소부인 바람났네를 제작해 한국 영화 산업이 바닥을 치던 그 시절,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이후 흉내부인 살판났네, 암소부인 바람났네, 젖소 남편 열받았네 등 성인 영화 약 300여 편을 제작하며 에로 영화 비디오의 대부라고 부를 만큼 엄청난 히트를 쳤고, 그 덕에 어마어마한 돈도 벌었다고 했습니다.

훗날 이때를 그가 고백하길 “젖소부인 바람 났네를 찍었는데 이게 대박이 났고, 이후 성인 영화만 찍기 시작했는데 4천만 원, 5천만 원 들여서 제작하면 5억, 6억이 그냥 막 들어왔다. 당시 나는 평택에 무궁화 3개짜리 호텔을 사고, 대전의 5층짜리 건물도 사고, 영화사의 건물과 거주하던 주택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성공한 사람이었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늘을 찌르던 그의 기세도 결국 IMF 금융위기 앞에서 철저히 무너지게 되는데, 앞서 이야기한 호텔과 부동산을 무리하게 짓는 바람에 사채와 은행 금리가 눈덩이로 불어났고, 그리고 이때 사실 모든 일의 진행은 아내가 독단적으로 벌려놓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100억 대의 성공 신화 주인공이었던 한지일은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고 나락으로 떨어졌고, 심지어 이때 그는 절대 해서는 안 될 일마저 결국 저지르고 말게 됩니다.

한순간의 분노

아내의 과잉 투자로 자신의 삶이 망가졌다고 판단해, 당시 아내가 운영하던 영화사에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순간 이성을 잃고 아내에게 ‘나와’라고 소리를 쳤는데, 안 나오니까 더 화가 나 결국 주유소에 가서 휘발유를 산 후 몹쓸 짓을 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한순간의 분노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고, 그나마 다행히도 큰 불은 나지 않아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이 일로 결국 그는 감옥에 가서 몇 달을 살아야 했습니다. 결국 전 재산을 다 날리고, 이혼도 하고, 교도소까지 다녀온 그에게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짐들이었습니다.

재기를 꿈꾸지만..

이러한 충격과 좌절에 이후 한국을 떠나 베트남 하노이로 가서 월급 사장도 했지만, 수시로 물건을 빼내는 직원과 마찰로 그만두고, 하롱베이로 가 관광객 상대로 실크 장사를 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사업 파트너를 잘못 만난 데다, 결국 쫓겨나 때려치우고 라텍스 사업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경쟁자가 그에게 생명의 장난을 가하며, 오토바이를 탄 누군가가 그의 얼굴에 나쁜 가루를 뿌릴 것이라는 그 말에 오만정이 떨어져 결국엔 베트남을 나와 la로 가게 됩니다.

그렇게 그가 베트남을 떠나 la로 갔던 때가 2005년인데, 이때부터 미국에서 10여 년간 온갖 허드렛일을 했습니다. 그는 한인 마트에서 한국산 젓갈을 팔기도 했고, 그 외 접시닦기, 자동차 판매원 등 27개의 직업을 전전하며 바람처럼 떠돌았다고 했습니다. 한편 이러한 그의 극심한 생활고를 겪는 근황이 2014년 당시 TV 프로를 통해 널리 알려졌습니다. 당시를 그가 고백하길, “툭 하면 질질 짜는 내 모습이 TV에 방영된 뒤로 난 그저 불쌍한 놈이 돼버렸다. 그래서인지 더욱 오기와 투지가 솟는다. 그리고 미국에서 고생하면서 조금 모은 돈이 있는데, 그 돈으로 다시 영화를 만들어 날개를 펴고 싶다. 어떤 영화냐면 다시 젖소부인이다. 다시 돌아왔음을 알리기 위해 제목을 돌아온 젖소부인이라고 하고 싶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3년 후 2017년에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아쉽게도 그가 바란 대로 돌아온 젖소부인을 제작하지는 못했지만, 한국에서도 전철 택배와 주차요원, 주유소 웨이터 등 화려했던 자신의 과거를 버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전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지일 그가 고백하길, “내가 지금 10억을 모을 수는 없다. 아니, 5억도 못 모으고 심지어 1억도 못 모은다. 하지만 나는 지금이 행복하다. 비록 돈이 많지는 않지만, 그런데 취직이 되고 내 주머니 사정이 조금 좋아지니까 ‘나도 남한테 밥 살 능력이 되네’ 이거면 충분하고 그럼 나는 성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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