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이소룡’ 액션 배우 간암으로 결국 “잘 가시게 멋진 사나이…” 그의 안타까운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쾌남~ 스킨광고 액션배우 기억하시는지요? 한국과 홍콩에 오가며 액션배우로 활약했던 배우 신일룡 씨가 2022년 5월 26일 향년 74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故 신일룡 씨는 지난해 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해오다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1970~80년대 전성기를 누렸는데 신성일 씨, 신영일 씨 등과 함께 당대 최고의 전설적인 미남 배우로 꼽힌 인물입니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있다`라고 할 만큼 깜짝 놀랄 정도였는데 당시 보기 드문 근육질 몸까지 아주 대단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고인의 인생은 한 편의 영화와 같이 파란만장했습니다. 지금부터 신일룡 씨의 인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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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데뷔와 승승장구

신일룡 씨의 본명은 조수현씨입니다. 고향이 이북이라고 합니다. 밑으로 남동생이 3명 있는데, 막내 남동생이 그 유명한 가수 조정현 씨입니다.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 슬픈 바다 등으로 아주 유명한 가수입니다. 신일룡 씨는 공부도 잘했습니다. 1970년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69년 연극배우로 첫 데뷔 했고, 이듬해 1970년 故 신상욱 감독의 영화 이조 괴담으로 영화배우로 데뷔했습니다.

신 감독은 그를 캐스팅한 후 자신의 성을 붙이고 용처럼 크게 뻗어가는 명배우가 되라는 의미에서 신일룡이라는 예명을 붙여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데뷔하자마자 그야말로 승승장구했습니다. 1973년 섬개구리 만세로 제10회 청룡영화상 신인연기상을 수상했고, 1976년 아라비아의 열풍으로 제15회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특히 그가 출연한 이두용 감독의 영화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는 1984년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돼, 한국 영화로는 처음 칸 진출 기록도 갖고 있습니다.

애마부인2 등의 남자 주인공으로 출연해 대중들의 인기도 끌었습니다. 1년에 1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기도 할 정도로 영화배우로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영화 출연 외에 광고 모델로도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1980년대 남성 스킨로션 쾌남의 모델로 발탁됐는데, 스킨을 손바닥에 뿌리고 뺨을 때리듯 바르던 주인공이 바로 그입니다. 당시 그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팬들이 집 앞에 진을 치고 있어 세컨하우스에 며칠씩 머물고, 술집에서는 한 잔씩 권하는 바람에 경호원이 필수였다고 합니다. 식당 주인들이 한사코 밥값을 받지 않아 공짜로 밥 먹는 날이 예사였다고 합니다.

이소룡의 후계자

그는 합기도 5단의 무술 실력을 바탕으로 한 액션 연기로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홍콩 액션 스타 이소룡이 숨지자, 홍콩에 스카우트되어 그의 대역으로 홍콩 영화계에도 진출했습니다. 실향민의 아들로서 가난하던 시절,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신문 배달, 아이스크림 장사 등 닥치는 대로 일했습니다. 신문 200장은 꽤 무거운데, 어렸을 때부터 그 무거운 신문을 들고 뛰어다니면서 저절로 운동이 되었다고 합니다.

젊어서부터 워낙 운동을 잘했고, 운동 신경이 뛰어났던 신일룡 씨는 합기도 5단의 무술 실력을 지니고 있어서, 영화감독들의 권유로 액션 무술 영화에 출연하게 됩니다. 무술 천재 이소룡 씨가 죽은 이후, 홍콩의 골든하베스트사에서는 이소룡 씨를 대체할 수 있는 무술 고단자들을 찾는 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1974년에 신일룡 씨는 드디어 홍콩 영화계에 진출해서 심판자라는 무술 영화에 출연해 본격적인 무술 스타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신일룡 씨는 홍콩 무술 영화 심판자에서 특유의 우람한 근육과 멋지고 화려한 발차기 기술을 선보이면서 수많은 홍콩 관객들을 사로잡으며 무술 스타로서 인기를 끌게 됩니다.

이렇게 첫 홍콩 무술 영화에서 입지를 다진 신일룡 씨는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홍콩 무술 영화에 출연하며 주가를 높여 나갔습니다. 그렇게 무려 7년을 홍콩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70년대 당시 홍콩 영화계에서는 홍콩인이 아닌 외국인을 절대로 주연 배우로 기용하지 않는 관행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게 되고, 결국 1970년대 후반 홍콩의 골든하베스트사에서는 이소룡 씨의 후계자로 성룡을 선택하게 됩니다.

사업 실패로 전 재산 잃어

그런데 신일룡 씨는 홍콩에서 영화배우로 활동하다가 중국인들이 밤마다 마작하는 것을 보고, 제주도에 카지노 사업을 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어 올인한 것이 일생일대의 실패가 됩니다. 신일룡 씨는 홍콩에서 조연이었지만, 수많은 영화에 출연해서 명성도 높이고 돈도 많이 벌어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또한 그동안 8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영화인으로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는 사업가로도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에게 배우는 부업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대학 졸업생일 때, 이미 레스토랑 경영을 시작했는데, 배우를 하면서도 1970년대에 하얏트호텔 인근에서 레스토랑 등을 운영했습니다. 그리고 봉제공장을 차려 롯데백화점에 여성, 남성 캐주얼 의류를 무려 70% 정도를 납품하는 등 영화배우 수입보다 사업 수입이 더 많은 정도로 사업 수완도 좋았습니다. 목욕탕, 출장, 뷔페 등 손을 안 댄 사업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의 사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전공 또한 경제학이라 그동안 무려 100여 개의 업체를 운영해 봤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사업을 하면서 한 번도 실패를 해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자신감에 사업을 확장하고 싶어 제주도에 카지노 사업을 벌이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90년대 후반, ‘제주의 라스베이거스를 만들어보자’라며 그는 잘 되던 사업들을 다 접고 집이며 빌딩이며 땅 등을 팔아 모든 자산을 탈탈 털고 빚까지 얻으며 제주 중문단지에 투자했습니다. 투자금은 약 120억 원으로, 20년이 넘는 과거였으니 지금 시세로 치면 거의 1,000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정부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아, 그만 불발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대출만 60억 원이 들어갔는데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한순간에 전 재산이 압류에 들어갔고 파산을 맞았습니다.

눈물의 ‘호두파이’

그는 인생 후반기에는 호두파이 사업에 뛰어들어 자신의 이름을 딴 가게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게 됩니다. 환갑 때쯤 시작한 호두파이 가게를 10년 이상 운영하면서 일흔이 넘은 나이에 호두파이 가게로 재기에 성공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욕심과 자만심을 내려놓아야 되고, 자기가 잘 모르는 것을 하면 안 된다. 화투도 칠 줄 모르면서 카지노를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좌절하지 말고 포기하지 마세요. 열정을 가지고 살아야 해요. 꿈이 없으면 죽음이에요. 말로만 꿈꾸지 말고 도전하세요. 목숨 걸고 하면 다 됩니다.”

마지막으로

고인의 지인인 배우 한지일은 이날 “제 친구 신일룡이 세상을 먼저 떠났다”라면서 “잘 가시게 멋진 사나이”라고 넋을 기렸습니다. 배우 신일룡 씨는 수많은 명작에 출연해서 우리 영화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고 이렇게 뜻깊은 일도 하신 훌륭한 어르신이었습니다.

좀 더 오래 함께하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뿐이지만, 훌륭한 분이라 반드시 좋은 곳으로 가셨으리라 믿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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