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조용필의 전 매니저 최동규 씨가 한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알아보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우리의 60년대 시절, 술에 취한 미군들을 상대로 했던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노래가 마음에 안 들면 군용 라이프까지 던지며 폭행하는 등 매우 위험한 상황들이 빈번했습니다.
그런데 그 공연 하필 조용필의 앞차의 가수가 미군에게 폭행당해 실려갔습니다. 이에 최동규 씨는 공연을 취소하자고 제안했지만, 조용필은 말없이 독한 보드카 한 병을 원샷으로 마신 뒤,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무대로 올라갔습니다.
병사들은 쌍욕과 야유를 하며 미국 가수를 부르라라고 위협했지만, 무대에 올라간 조용필은 잠시 눈을 감은 뒤 기타 연주를 시작했고, 이 순간 모두가 조용해졌습니다. 그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가왕 조용필의 영화 같은 인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린 시절
조용필은 아시다시피 역대 가요대상 최다 수상자이자, 대한민국 가요 그 자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엄청난 기록과 커리어를 써낸 살아 있는 전설입니다. 키가 작은 조용필이지만, 그의 카리스마는 여러 사람에게 회고되고 있습니다. 조용필 1950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시에서 태어난 그는 염전업을 하던 집안의 7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4대 독자로서, 할아버지 재산을 물려받아 화성시 최고의 부자 집안으로 그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조용필은 그의 어린 시절 추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버지는 큰형을 데리고 사냥 나가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나는 총에 맞아 피 흘리는 동물들의 모습이 불쌍해서 잘 따라나서지 않았다. 아버지의 성격은 너무나 완고하고 권위적이어서 나와는 잘 맞지 않았기에, 사실 음악을 시작하려는 내게 가장 큰 걸림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사냥을 나가면 나는 방 안에서 하모니카를 불고 기타를 치며 음악을 했다. 그런 나를 보고 아버지는 ‘못난 놈’이라며 혀를 차셨다.” 그렇게 조용필은 학창 시절에 ‘비틀즈’에 푹 빠져 살다가, 1968년인 고등학교 3학년의 가출을 수차례 감행하게 됩니다.

음악에 대한 아버지의 반대가 워낙 심했기 때문입니다. 조용필은 그의 가출 시절에 대해서 밝히길, “처음 가출할 당시만 해도 평생 음악을 하리라고는 절대 생각 못 했다. 우리는 ‘비틀즈’ 세대니까 그냥 하고 싶은 건 해야 했을 뿐이다.” 그렇게 가출을 해버린 고3 조용필은 미8군 클럽 무대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게 됩니다. 당시 음악계에서 미8군이 주는 상징성에 대해 잠깐 얘기해 보자면,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모든 시작이 이루어진 곳으로, 60~80년대 음악인들이 활동하던 가장 큰 무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어린 고3인 조용필의 기타 실력이 당시에도 인정받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오는 안락함과 가족과의 관계까지 포기하고,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로 이런 결단을 내린 일화를 통해 우리는 조용필의 음악에 대한 독기를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승승장구하는 듯 하였으나..
그는 미8군 무대에서 그룹 애트킨즈, 하이브, 핑거스, 김트리오 등을 걸쳐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하면서 전설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1979년 ‘위대한 탄생’이라는 그룹을 결성하고, 공식적인 1집 앨범 ‘창밖의 여자’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 앨범은 100만 장을 팔아치우는 기염을 토해냈습니다.이후 내놓는 앨범마다 히트를 치면서 1980년대 최고의 인기 가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운명 같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사실 숨겨진 사연이 있습니다.
그 사연에 대해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살다 보면 전혀 뜻밖의 행운이 찾아오기도 한다. 내게는 75년에 그랬다. 첫 독집 앨범을 내던 당시에 구색 맞추기를 끼워놓은 노래였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대한민국 전역을 휩쓸어버린 귀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로커로 자부하고 있던 내가 트로트 한곡으로 졸지에 스타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의 겨울, 나는 무대를 마치고 사법 경찰에게 끌려갔다. 죄명은 대마초 흡연이었다. 그렇게 남산 마약반으로 도착해 보니 거기선 무조건 마약쟁이 50명을 불어야 했다. 주전자 고문도 치가 떨렸지만, 더 가혹했던 고문은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벽돌 사이로 나를 밀어놓고는 무시무시한 각목으로 사정없이 찔러댔던 고문이었다.

거기에는 인간미가 없었다. 그렇게 많은 음악인들이 좌절했고, 한대수 같은 사람은 아예 이 땅을 떠났다. 나는 대마초와 관련해서 너무나 억울했다. 당시 대마초는 흔하게 유통되었고 불법도 아니었다. 그나마도 내가 대마초를 피운 건, 대마초 관련 법률이 제정되기 훨씬 전이었다.
미8군에서 활동할 당시에 4차례의 대마초를 피우게 되었는데, 같은 하숙집에 살던 미군 병사가 담배라고 권해준 것을 피운 것이고, 그마저도 피부병이 발생해서 4차례 흡연 후에 끊은 것은 참작되지 않았다.” 이런 사건으로 이내 조용필은 대마초 가수라는 공격받게 되었고, 1977년 고문 후유증에 따른 상처로 스스로 음악을 포기할 정도였습니다.
음악에 모든 것을 투자하며..
그리고 1979년 다시 창밖의 여자 앨범 이후로 그는 현재까지 음악에 미쳐 있는 음악 중독자로서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가 음악에 얼마큼 미쳤었는지 당시 여기에 관한 유명한 인터뷰가 있습니다. 조용필의 2집 활동쯤, 한 기자가 조용필 아버지를 인터뷰했습니다. 조용필의 아버지가 말하기 “내 아들이 누가 봐도 대한민국에서 지금 돈을 제일 많이 버는데, 아직도 제 집 하나 없이 전세를 살고 있다. 아무래도 매니저가 됐든, 누가 됐든, 중간에서 해 먹는 것 같다. 우리 기자님이 여기에 대해서 한 번 알아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에 대해 해당 기자가 말하기에 “아버님, 누가 중간에서 해 먹는 게 아니라, 조용필이 100을 벌었다 치면 90 이상을 음향 장비와 악기에 투자하고, 해외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1등급 장비로 모두 맞추려 하니까, 아드님이 명성에 대비, 돈이 없는 겁니다.” 이만큼 조용필은 당시 엄청난 음향 장비를 운송하려고 덤프트럭을 두 대씩 사서 끌고 다닐 만큼 최정상의 자리에서, 오히려 더 나아가기 위해 음악의 모든 걸 전부 재투자했던 인생이었습니다.
이렇게 위축이 되면 돈을 모으는 게 사람의 심리인데, 오로지 자신의 음악에 대한 완벽함을 추구하기 위해 끊임없는 재투자를 했던 일화는 왜 그가 가요계의 슈퍼스타가 될 수밖에 없는지를 말해줍니다. 음악밖에 모르던 그는 31곡의 히트곡 저작권을 소속 레코드사에 2013년까지 빼앗긴 슬픔이 있고,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비공식적으로 기부 금액이 100억 원이 넘어가며, 코버스지에서 선정한 ‘아시아의 기부 영웅’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후배들에게 존경의 대상
이런 그의 영화 같은 일상은 많은 음악 후배들에게 존경받았는데 카리스마로 유명하고 선배들에게도 꼿꼿하기로 잘 알려진 호랑이 임재범마저 조용필을 처음 봤던 순간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나는 평소 락커 선배들에게도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하루는 조용필 선배를 방송국에서 뵌 적이 있는데, 정말 빛이 났었다. 난 그전까지 아우라라는 게 뭔지 몰랐는데, 그를 보고 알게 되었다.
나보다 키가 작으심에도 불구하고 뿜어져 나오는 그 카리스마에 저절로 허리를 완전히 접으며 인사하고야 말았다. 지금 생각인데, 도저히 눈을 쳐다볼 수가 없을 만큼의 기운을 느꼈기에, 한 남자로서 보자마자 자동으로 90도 인사가 왔던 것 같다. 뭔가 졌지만, 존경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서 기뻤던 하루였다.”

방시혁마저 절절매는 이유
연예계 최고 재벌인 방탄소년단의 소속사 빅히트 회장 방시혁마저 조용필을 만난 후, 손을 다소 고이 모으고 90도 인사를 한 일화도 유명합니다. 그는 자신이 조용필을 만난 사진을 개인 SNS에 올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보고 싶어 하실, 두 번은 못 볼 저 방시혁의 90도 인사입니다.
가왕에게 이 정도 존경심은 당연한 거죠. 마음 같아서는 솔직히 그 자리에서 저는 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악수를 한 이 손을 당분간 씻지 않겠습니다.” 방시혁 역시 매서운 눈빛에서 나오는 독설과 재력으로 유명했기에, 네티즌들은 독설가 방시혁이 임자를 제대로 만난 것 같다, 방시혁이 어린아이 같은 수줍은 미소를 처음 보았다더니 신기하다라는 반응을 보이며 즐거워했었습니다.
이렇게 자존심 센 남자들은 임재범과 방시혁마저 저절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을 표시한 것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용필이 신인 시절 방송 녹화를 하고 있었는데, 한 노인이 인파에 밀려서 넘어지는 걸 목격했었다. 당시 녹화 방송은 중간에 멈추면 또다시 3시간을 다시 찍어야 했기에 신인이 공연을 멈추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신인 조용필은 갑자기 노래를 멈추더니 무대를 뛰어 내려가 그 노인을 부축했고, 담당 PD는 달려와서 조용필에게 쌍욕을 날렸었습니다.
그런데 조용필은 PD 멱살을 잡더니 “노인네 병원 가는 걸 볼 때까지 공연을 안 하겠다.”라며 거부를 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인이 구급차를 탄 걸 본 이후에야 공연을 시작했는데 PD는 당시 조용필 매니저에게 말하길, “내가 방송판에서 20년 구르면서 신인한테 쫄기는 처음이다. 얘, 물건은 물건이다. 잘 키워라.”라며 이렇게 감탄했던 일화는 방송계에서 꽤나 회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가왕 조용필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시길 바라며 응원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