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일 사망 후 딸이 발견한 놀라운 유품 “엄앵란 뒤늦게 폭풍 오열한 이유”에 대해 확인해 보세요

우리나라 50~60년대 최고의 은막의 스타 엄앵란 씨의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는 인생과 근황, 그리고 신성일 씨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딸이 놀라운 유품을 발견했는데, 그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배우
👉”한지붕 세가족 아역배우 배우로 설 자리 잃더니 결국… 안타까운 소식” 그의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엄앵란 배우 데뷔

엄앵란 씨는 부잣집 막내딸 같은 이미지와는 다르게 아주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음악 공부를 한 유명한 섹스폰 연주자 엄재근 씨였고, 어머니는 놀랍게도 여배우 노재신 씨였습니다. 이런 연예인 유전자를 받은 엄앵란 씨는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방랑벽이 있어 가정마저 돌보지 않아 어머니가 살림을 꾸렸는데, 판잣집에서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습니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6.25 전쟁이 나서 대구로 피난을 갔는데, 시장에서 어머니랑 떡 장사를 하며 또 온갖 고생을 다 했습니다. 그때 16살밖에 안 됐었는데, 피눈물 나는 고생을 하며 가족을 먹여 살렸다고 합니다.

자존심이 세면서도 의지가 강한 그녀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어머니가 반대했지만, 대학에 진학하려고 아는 사람에게 돈을 얻어서 숙명여대 가정학과에 입학합니다. 그러나 다음 해, 등록금이 걱정이던 엄앵란 씨는 사무 보조 일을 구하는 영화사 사무실에 방문합니다. 위기가 기회라는 말이 딱 들어맞게도, 그녀를 본 감독이 배우를 제안해서 운명처럼 배우로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톱스타 등극

대학 1학년 19살 때인 1956년, 단종애사라는 영화로 데뷔했는데, 흥행에 성공하며 데뷔하자마자 스타로 등극했습니다. 1년 후,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고 불리는 김지미 씨가 혜성처럼 등장했고, 두 사람은 쌍두마차로 한국 영화사의 중흥기에 맹활약했습니다. 그때는 영화에서 배우의 임무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던 때인데, 엄앵란 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김지미가 장미 같은 화려한 배우라면, 나는 그보다 수수하지만 당당하게 자기만의 색깔로 꽃 피우는 채송화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역이 따로 있으리라 생각했다. 만일 그때 배우를 포기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수백 편의 영화를 찍었고, 60년대를 풍미한 영화배우가 되었습니다. 당시 연예인은 딴따라라고 하며 무시당하던 직업이었는데, 그녀는 절대로 자존심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숱한 유혹이 뒤따랐는데 저녁 먹자 하는 사람이 많았지. 그런데 절대 안 갔어. 중앙정보부에서 오라고 해도 우리 엄마가 배앓이하고 있다면서 다 막아줬어. 여자 연예인들을 다방 마당으로 보고, 남자들이 종아리부터 훑어보는 게 정말 너무 싫었어. 내가 연예인 값어치를 올리겠다는 생각으로 이 악물고 대학을 졸업했어. 내가 여자 연예인 1호 대학 졸업자야.”

신성일과 결혼

이렇게 자존심이 세고 콧대가 높았던 그녀가 한 남자에게는 무방비로 마음을 열어버립니다. 1960년 로맨스 빠빠라는 영화에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났는데, 엄앵란 씨는 이미 우리나라 최고의 스타였고, 신성일 씨는 첫 데뷔작을 찍는 신인에 불과했습니다. 처음에 신성일 씨는 그녀에게 차마 말도 붙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50편이 넘는 영화를 함께 찍으며 엄앵란 씨는 그의 남자다운 모습에 점점 마음이 끌렸고, 두 사람은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로 활동하며 결국 정분이 납니다.

함께 영화를 찍던 어느 날 밤, 신성일 씨가 몰래 엄앵란 씨의 숙소로 들어와 두 사람은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얼마 가지 않아 1964년 두 사람은 세기의 결혼식을 올립니다. 수천 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성대한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러나 이 결혼이 이루어지기까지 실로 놀라운 비밀이 있었습니다.

사실 시어머니는 그를 재일교포 출신의 여배우 공미도리 씨와 결혼을 시키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엄앵란 씨는 이미 임신 3개월째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걸 비밀에 부치고 두 사람은 결혼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엄앵란 씨는 결혼 후 거의 활동을 중단합니다.

또 다른 시련

그런데 결혼은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이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안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엄앵란 씨가 그동안 벌었던 돈을 친정에 두고 와 더욱 미워했다고 합니다. 엄앵란 씨는 혼수는 하나 빠짐없이 다 해왔지만, 시어머니는 도통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런 고부 갈등으로 엄앵란 씨는 살이 찌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의리상 마지못해 결혼 4년째인 1968년, 영화 아네모네 마담에 출연했는데, 불어날 때로 불어난 몸이 된 엄앵란 씨의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고, 그 이후 더욱 출연이 줄어들다가 결국 영화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한편, 무려 20년간 최고의 영화배우로 군림하던 신성일 씨도 나이가 들면서 배우로서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도약을 위해 영화 제작 등 사업에 뛰어들었고, 정치에 대한 야망으로 국회의원에 도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두 다 실패하고 그 많이 벌었던 돈을 모두 탕진하고 빚까지 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울음 같은 웃음을 쏟아내며 당신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영화 제작한다고 난리, 극장 짓는다고 난리, 정치한다고 난리, 태평극장 사서는 나더러 표 받으라고 해서 매표소에서 표까지 팔았어. 나는 배우가 아니고 걸레였어. 물 엎지르면 물 훔치고, 때타면 때 닦는 걸레.” 엄앵란 씨는 그런 남편과 헤어지기는커녕 그가 벌여놓은 일들을 다 처리하고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대구로 내려가 수년간 비빔밥 장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대구에서 비빔밥 장사를 해서 장사를 마치고 집에 갈 때는 돈을 쇼핑백에 담아서 갈 정도로 많이 벌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번 돈을 신성일 씨는 또 다 날렸다고 합니다. “왕년의 청춘스타였던 제가 3,500원짜리 비빔밥 장사가 됐을 때, 또 그렇게 수년 간 모은 돈을 남편 선거운동에 다 날리고, 빚쟁이들에게까지 시달려야 했을 때, 그 마음고생은 정말 아무도 모를 겁니다.”

‘제2의 인생’이 시작되는 싶더니…

결국 엄앵란 씨는 제2의 인생을 살아보자 결심하고 서울로 올라와 방송 리포터를 시작한 것이 58살 때의 일입니다. 왕년의 대스타로서 자존심을 내려놓고, 그녀는 방송 리포터 일에 매달렸습니다. 리포트 생활 1년 만에 KBS 아침마당에 출연하면서 과거의 명성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엄앵란 씨의 매력은 솔직함에 있었습니다. 가식 없이 자기를 드러내는 말에서 사람들은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때 신성일 씨는 두 번째 도전에서도 고배를 마신 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뛰어든 제16대 총선에서 금배지를 가슴에 달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토록 갈망했던 정치 때문에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고통도 맛보아야 했습니다.

2005년, 불법 정치후원금 수수 혐의로 구속되어 교도소에서 2년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덩달아 엄앵란 씨는 남편 일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어렵게 얻은 인기를 뒤로 하고 방송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신성일 씨를 위한 구명운동이 벌어졌고, 결국 그는 2007년 특별사면을 받아 애초 받은 5년 실형보다 3년이나 빨리 출감할 수 있었습니다.

씻을 수 없는 상처

이후 두 사람이 좀 편안하게 사는가 싶었는데, 신성일 씨는 또 한 차례 엄앵란 씨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줍니다. 2011년, 자서전을 출간하며 엄앵란 씨마저 몰랐던 과거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이미 아이 셋을 가진 아버지인 상태에서, 동아방송에 김영애 아나운서를 만나 사랑에 빠져 주로 외국에서 만났다고 하였습니다.

김영애 씨는 아이까지 가졌으나 그의 입장을 생각해 지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내 생애 최고의 사랑이라며 그녀에 대해 추억했고, 이에 크게 상처를 받은 엄앵란 씨는 3개월이나 집 밖에를 나가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아내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만 것입니다.

그래도 이혼하지 않는 그녀를 보고 많은 사람은 의아해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부모가 예능인이었는데, 딴따라 자식이라 이혼할 줄 알았어~, 이런 얘기를 절대로 듣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이렇게 그녀는 평생을 자존심으로 견뎠는데요.

유방암 선고, 그리고 신성일의 죽음

신성일 씨로 인한 고통이 암이 되었는지, 2016년 방송 촬영 중 유방암을 발견하고 절제하는 지경까지 갑니다. 남편 신성일 씨는 여러모로 미안했던지 잠시 별거를 깨고 그녀의 곁에서 성심성의껏 간호했습니다. “54년의 결혼생활 중 겨우 5년 정도만 함께 살고 별거 했다.”라고 털어놓기도 했었습니다.

이렇게 ‘이제는 철드나…’ 싶더니, 2017년에는 이번에는 그가 폐암 3기라는 것이 밝혀졌고, 결국 2018년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재산을 단 한 푼도 남기지 않았고, 엄앵란 씨에게 이 말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의 임종을 지켜보던 아들 석현 씨 귀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엄마한테 수고했고, 고마웠다고 전해줘.” 엄앵란 씨는 어쩌면 ‘사랑한다’라는 말을 가장 듣고 싶어 했을지도 모르는데, 경상도 출신의 무뚝뚝한 상남자였던 신성일 씨는 ‘사랑한다’라는 말을 직접 대놓고 엄앵란 씨에게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뒤늦게 발견된 놀라운 유품

그의 엄앵란 씨에 대한 사랑은 그가 죽고 나서야 발견되었습니다. 막내딸 강수화 씨가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다가 신성일 씨가 혼자 별거하면서 거처했던 서울집의 침실에 엄앵란 씨와 찍은 결혼식 사진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진을 침실에 걸어놓고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뭔가 영화 같기도 하고 가슴이 찡합니다.

엄앵란의 근황

엄앵란 씨는 신성일 씨가 돌아가시고 난 후 4년간 거의 두문불출하며 방송 출연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고 합니다. 또한 촬영 중 넘어져 무릎 수술을 해서 지팡이를 짚게 되었고, 절뚝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털어놓았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누구보다 자존심이 센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 남자와 가정을 위해서는 자존심을 버렸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진정한 사랑 아닐까요? 평생 한 사람이라도 진정으로 사랑하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면 그 인생은 성공이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평생 신성일 씨에게 배신당한 불쌍한 여자가 아니라, 숱한 역경을 극복하고 사랑을 지킨 최고봉을 완성한 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없는 지금 더욱 외로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최근 2023년 4월 4일에는 60년 우정 현미 씨도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현미 씨는 “엄앵란은 내 제일 친한 친구”라면서 “엄앵란이 없으면 어떻게 살까? 엄앵란이는 나 없으면 어떻게 살까?”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가족을 위해 항상 자신을 버리고 희생하고 헌신한 엄앵란 씨는 우리의 어머니를 생각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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