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모 아들 뇌종양 투병 중 결국 “연이은 대출, 8번의 이사 모두 내탓” 그의 안타까운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대한민국의 거물 평론가 임진모는 모두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가수 배철수부터 윤도현, 자우림까지 음악평론가로써 인정하고 나섰습니다. 32년차 음악평론가 임진모는 향년 32세 아들을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사망원인은 뇌종양이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그가 아들을 일찍 하늘로 보내게 된 안타까운 사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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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를 그만두고 평론가가 된 사연

이후 임진모는 처음 평론가 일을 시작했을 때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상황을 회상했습니다. 그는 “제가 내외경제 기자 때, 사표 내고 평론가에 전념하려고 했을 때, 저를 운전해준 기자 동료가 있었다. 그 동료가 한 말이 가슴 속에 오래 남았다. 진모! 네가 너무 젊어서 사정을 모르고 그러는데 잘못하면 패가망신한다라고…. 그땐 젊었다. 저만 생각한 거다. 내가 음악 좋아하니까 이렇게 한다고…. 아내에게, 가족에게 그렇게 힘든 것이라고는 깨닫지 못했다.”라고 털어놨습니다.

이어 “돈 못 벌어서 집안이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집에서 아들과 딸을 데리고 나온 날, 어머니 혼자 사는 좁은 집에 사람이 셋이 들어갔다. 그날도 제가 평론을 썼다. 딸이 아빠 오늘도 일해?라고 했다. 음악평론을 하다 보니까 ‘패가망신하겠다’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습니다.

처음으로 음악 평론하는 거 후회했습니다. 다른 거 했으면 더 나았겠다 싶더라.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이 아빠 왜 우리 집은 이렇게 이사를 많이 가?라고 했다. 현재 아파트까지 8번 이사했다. 항상 전세 대출이었다. 죽은 우리 아들이 금호동에 처음 깨끗한 방 얻었을 때, 뒹굴뒹굴 구르면서 정말 좋다라고 한걸 잊을 수 없다. 정말 미안하다.”라고 안타까움을 전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가족의 응원

특히 임진모는 “아들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 모두 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 사춘기 때 용돈 많이 못 준 게 가장 미안하다. 아들 잃고 나서 더 그랬다. 나 좋다고 평론했는데 결국 가족들한테 조금은 나은 환경을 제공하지 못한게 늘 미안했다.”라며 가족들을 향한 미안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임진모의 첫째 딸 임효나 씨는 “아빠랑 보냈던 시간들이 많았다. 항상 주말에 만화영화 보면서 라면도 끓여 먹고 아빠가 음악도 틀어준 기억이 있다. 어릴 때 집이 풍족하진 않았지만 저는 오히려 제가 어릴 때 아빠한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용돈 100만 원 받는 거랑, 그때만큼 사랑받고 용돈 못 받는 거 생각하면 금전적인 것과 별개로 아버지를 그때나 지금이나 존경스럽고 멋지다고 생각한다.”라고 아버지를 향한 애정을 전했습니다.

이에 임진모는 “경제적으로 단 한 번도 행복한 적 없다. 하지만 음악적으로 한 번도 불행한 적 없다. 아들, 딸이 응원군이다”라며 “너무 행복하다. 아들, 딸이 합창하면서 응원해준다.”라고 했습니다.

임진모의 아들 뇌종양 5년간 투병했지만…

임진모의 아들은 20대에 처음 뇌종양 판정을 받고 5년간의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임진모는 “군대 갔다와서 대학교 3학년때 ‘오늘 병원에 다녀와야할 것 같다’라고 하더라. 그래서 병원 갔다 왔다. 제가 일하고 있는데 ‘아빠, 나 뇌종양이래’라고 하더라. 마지막 수술을 넘지 못했다. 병원에 들어가서 다시 치료 받고 수술하고 나서 경과가 안 좋았다. 신장 기능이 점점 줄어들고 모든 기능이 떨어지면서 서서히 지켜봐야했다. 이틀 가까이 중환자실에서, 그 후로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임진모는 소중하게 보관해두고 있던 아들의 액자를 꺼내보더니 “제일 중요한게 이거다. 우리 아들. 세상에서 최고의 사람. 나는 우리 아들이라고 본다”라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그는 “곳곳에 아들 흔적이 있다. 이 사진이 아들이 병세가 좋아졌을 때다. 우리 아들 얼굴이 벌써 창백하지 않냐? 졸업식날 너무 좋았다. 나는 우리 아들이 꼭 완치해서 다시 돌아와주길 바랐고, 이때만 해도 완전 정상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신념화 했다. 지금 보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이건 우리 아들 책상이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아들이 쓰던거 하나도 안버리고 놔뒀다. 죽은 아들 유품 다 태우라고 하는데, 그러기 싫다. 신발도 버리기 싫더라. 아들이 좋아했던 신발은 지금도 신고 다닌다.”라고 털어놨습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

그는 “아들과 딸은 2살 차인데 싸우기도 싸웠지만 정말 좋은 사이였다. 딸도 참는 거다. 그런 오빠를 잃었으니 오죽했겠냐? 아버지인 내가 부족해서 그렇게 된 거다.”라고 자책했습니다. 임효나 씨는 “저도 힘들고 슬프지만 제가 부모가 돼보지 않았으니까, 아버지로서의 고통이 어떨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래서 더 어떻게 보면 아빠 힘들지?라는 질문을 해보진 않았다. 차마 이야기를 꺼내기가 힘들어서. 아빠가 만약 오빠 생각으로 힘들면 나한테 편하게 기대고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임진모는 “언제든 늘 그런다. 근데 난 자식을 잃었지만, 또 많은 사람은 감정을 잃고 행복을 잃고 관계를 잃고 그런 사람이 얼마나 많냐. 어차피 인생은 슬픈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자 한다. 이제 괜찮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극복했냐?라고 물으면 그렇다라고 말할 순 없다. 그래도 차츰차츰 올라가고 있다. 가족들 덕분에….”라고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아들을 지키지 못한 아버지

아들과 함께 일했던 과거도 떠올렸습니다. 임진모는 “내가 아들 계속 설득했다. 어차피 아빠가 일을 계속하는데 아들이 운전할 줄 알고 의상 감각을 갖고 있었다. 아빠가 어떻게 옷을 입는게 좋은지 관심 많았다. 내 매니지먼트를 해달라고 했다. 너무 좋아했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 5개월간 같이 다니면서 꿈에 부풀었다. 아들이 내 일을 해준다고… 아들은 아빠 일을 돕는다며, 세상을 떠난 아들이 가장 큰 팬이었다. 나비넥타도, 아들이 거의 나비넥타이를 강요하는 수준이었다. 건강하게 살아있다면 내 매니저가 됐을거다.”라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이후 임진모는 “지금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방송 요청 들어오는건 충실히 따르고 있다. 아직도 그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이 ‘자식도 하나 간수 못하는 놈이 무슨 방송활동을 하고 공적인 활동을 해?’라고 할 것 같다. 실제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저는 그 소리가 들린다. 정말 미안하다. 우리 아들! 아들도 지키지 못한 아버지가…”라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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