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20억 벌었던 트로트계 막내 가수 “4중 추돌 교통사고 하반신마비” 어떤 상황인지 지금 확인해 보세요

원조 트로트 황태자 박현빈은 행사의 제왕이라고 불리던 그는 전성기 시절, 하루에 무려 여덟 군데의 무대에 섰고, 어마어마한 수입을 벌어들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수중에 남는 돈은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박현빈의 안타까운 사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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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지금에야 젊은 트로트 가수들이 대거 등장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트로트는 중장년층의 전유물이라는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그때 혜성처럼 등장한 젊은 트로트 가수가 바로 ‘박현빈’이었습니다.

박현빈은 82년 당시, 스타 노래 강사 어머니와 색소폰 연주자였던 아버지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 안에는 예술 쪽에 재능이 있는 인재가 많은데,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이모 역시 유명한 노래 강사고, 형은 성악가이며, 이종사촌 동생은 배우 이윤지입니다. 이렇게 선천적으로 재능을 타고난 박현빈은 2006년, 20대의 나이에 데뷔해 단숨에 ‘트로트계의 황태자’로 급부상했습니다.

행사의 제왕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한 그는 2002~2005년까지 공군본부 군악대에서 성악병으로 군 생활을 하다가, 군 행사 중 알게 된 트로트의 매력에 푹 빠져 제대 후 트로트 가수로 데뷔를 치렀습니다. 20대의 데뷔를 치른 박현빈은 잘생긴 외모와 성악을 전공하였고 탄탄히 다져진 노래에 실력으로 단번에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트로트를 즐기는 연령까지 낮췄습니다.

지금에야 트로트라는 장르가 대세가 되어 경쟁자가 많아졌지만, 그는 한때 행사라는 행사는 모두 휩쓰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 평균 5번, 많을 때는 무려 여덟 군데의 행사 무대에 섰다고 합니다. 보통 트로트 가수들의 행사비가 1회당 수천만 원을 훌쩍 넘는다고 알려졌기에, 그의 수입 역시 어마어마했을 겁니다. 항간에는 박현빈이 준재벌급에 재산을 비축해 뒀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실제로 곤드레만드레로 활동할 당시 그는 쉬는 날 없이 여기저기서 부름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당시 그는 한 달에 행사를 약 200군데 가까이 다녔다는데, 아침부터 점심, 저녁, 밤무대까지 돌고, 몸이 아픈 날에도 링거까지 맞아가며 행사를 소화했습니다. 박현빈이 받는 행사비에 대한 구체적인 액수는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대략 천만 원 선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회당 1천만 원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는 한 달에 행사로만 20억 가까이 버는 셈입니다. 게다가 방송 활동도 왕성하고, 다른 분야에서도 활약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실제 수익은 훨씬 더 웃돌 것으로 예상됩니다.

남자 장윤정

넉넉했던 박현빈의 집안은 IMF를 겪으며 급격히 기울었고, 나빠진 가정 형편 때문에 박현빈은 여러 불편함을 겪어야 했습니다. 박현빈이 성악을 전공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인데, 원래 박현빈은 성악이 아닌 바이올린을 전공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 신동 소리를 듣고 자랄 정도로 실력이 꽤 뛰어났는데, 가정 형편상 악기를 감당하기는 무리였고, 돈이 덜 드는 성악으로 진로를 변경했습니다.

그렇게 성악과를 진학한 박현빈은 등록금 역시 스스로 마련해야 했는데, 그마저 여의찮아 보이자 학업을 중단하고 입대하게 됐습니다. 스무 살 때까지는 용돈만 받았고, 등록금도 스스로 마련했어야 해서 학교를 못 다니고 군대에 갔다고 합니다. 성악병으로 입대한 박현빈은 군 행사를 다니며 트로트 가수의 꿈을 꾸었고, 재대 후 ‘남자 장윤정이 되어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장윤정의 소속사를 찾아가 오디션을 보게 되었습니다. 소속사는 처음 박현빈을 탐탁치 않게 여기며 그를 영입할 것을 거절했지만, 박현빈은 끈기 있게 그들을 설득해 나갔습니다.

특히나 오랫동안 다져진 성악 실력이 관계자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빠라빠빠’라는 싱글 앨범과 함께 데뷔한 박현빈은 거의 데뷔와 동시에 주목받았고 ‘앗 뜨거’, ‘곤드레, 만드레’, ‘샤방샤방’, ‘오빠만 믿어’ 등 연이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최정상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여기저기서 그의 노래가 울려 퍼졌고 방송은 물론 행사에서까지 그는 섭외 영순위로 급부상했습니다.

수중의 돈 ‘0원’

하지만 그렇게 큰 인기와 그에 걸맞은 수입에도 박현빈의 자산은 좀처럼 불어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한 방송에서 “곤드레만드레의 활동 당시 통장에 남은 돈이 0원이었다.”라고 밝혀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그가 수중에 돈 한 푼 남지 않았던 것은 가족들 때문이었습니다. 부모님과 형,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자신을 포함해 총 6식구의 생계를 책임졌던 박현빈이 버는 돈은 좀처럼 모이지 않았습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매우 강했던 건데, 지금도 박현빈은 한 아파트에서 부인과 아들, 딸은 물론 부모님, 조부모님, 외삼촌 식구들까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가족애가 대단한 것입니다. 가족들에게 돈을 썼다고 해도 어떻게 한 푼도 안 남을 수 있었냐?라는 궁금증이 생기는데 여기에는 이미 있던 엄청난 빚이 한몫했습니다.

박현민의 어머니는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던 때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수십억대의 엄청난 빚을 지며 절망적인 삶을 살았다. 도전하는 사업마다 연거푸 실패했고 결국 중소기업체들이 질만한 어마어마한 빚을 졌다. 희망이 안 보였다. 빚 다 갚고 죽자는 것이 삶의 목표였다. 부모님이 힘들어하시는 걸 본 박현빈은 자신이 그 짐을 나눠서 지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시 20대 중반이었는데 지금 정리가 안 되면 어차피 내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이 빌린 적은 돈까지 모두 수첩에 적어 하루 벌어 올 때마다 갚고 수첩에서 지워나갔다.” 부모님이 진 빚을 모르는 체할 수도 있었지만, 박현빈은 아주 적은 금액까지 수첩에 적어 다니며 채무를 갚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한시도 쉬지 못하고 행사를 뛰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한 달에 150~ 200회 정도 무대에 올라갔고,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자기도 했었습니다. 후속곡 오빠만 믿어로 활동할 무렵, “마지막으로 남은 몇천만 원의 빚을 다 갚았고, 20여 년 만에 집안의 빚이 사라졌다. 온 집안이 그날 눈물바다였다.” 너무 바쁘게 움직였던 탓에 몸이 아플 때도 있었지만, 그때에도 박현빈은 링거까지 맞아가며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빚을 갚느라 데뷔 후 2년간 1만 원 한 장을 만져보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모든 빚을 청산하고 행복만 남은 거로 생각했을 때 박현빈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옵니다.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

4월 29일, 박현빈은 서해안 고속도로 상행선 줄포ic 부근에서 4중 추돌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차는 폐차가 될 정도로 파손되었고, 박현빈은 오른쪽 다리, 허벅지 골절상, 운전했던 매니저는 안면이 함몰될 정도로 큰 사고였습니다. 오른쪽 대태부와 정강이뼈가 산산조각이 난 박현빈은 두 번의 수술을 겪었고 하반신 마비로 1년 반을 꼼짝없이 병상에 누워 지내며 몸과 마음 모두 아파했습니다. “가족을 다시 못 볼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었고, 걷지 못하게 될 거라는 두려움도 있었다.

치료 후에도 오래 갔다.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6년간 연애한 김주희와 결혼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라 더 마음이 아팠을 겁니다. 많은 걱정 속에 슬픈 시간을 보내고 다행히 그의 몸은 점차 회복되어 갔습니다. 웬만하면 차량 탑승을 꺼리는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지만, 꾸준한 치료로 정신 건강 역시 많이 나아졌습니다.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그의 몸과 마음이 다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잠시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하며 번 돈으로 수십억의 빚을 대신 갚아준 박현빈은 원래부터 책임감 넘치고 가족애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고를 겪으며 가족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더 강해졌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일을 줄이면서라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이제 빚도 모두 청산했으니 가족들과 행복한 추억 많이 만들길 바라며 박현빈의 앞날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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