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하이틴 가수 폭발 사고로 결국 “일주일 만에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 그의 안타까운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가수
👉”유명 개그맨 방화 사건으로 처참하게 사망” 참혹했던 마지막 10분에 대해 확인해 보세요.

가수 데뷔

가수 김민우는 1969년 5월 18일 태어나 올해 나이 54세입니다. 1990년 1집 앨범 ‘사랑일뿐야’로 가수 데뷔를 했으며, 대원외고에서 단짝 친구인 윤종신을 만나 밴드 활동을 하며 음악에 눈을 뜨게 되고, 경원전문대학 입학 후 대학 선배였던 가수 김정민과 함께 1980년대 후반 아마츄어 헤비메탈 그룹 ‘보헤미안’을 결성해 대학가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압구정의 카페에서 서빙 및 주방보조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에 단골 손님인 송창의 PD가 주변으로 부터 김민우의 노래실력을 전해 듣고서, 자신의 생일날 가수 이문세, 김종찬, 김완선 등 인기 가수들이 포진한 파티 자리에서 김민우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무대 기회를 만들어 주었고, 그 자리에서 ‘백두산’으로 유명한 유현상과 음반기획자 김광수로부터 동시에 러브콜을 받습니다.

참고로 이 두 사람은 1980년대 후반 당시 여자 솔로의 양대 산맥으로 활약한 이지연과 김완선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한 사람들이었는데, 당시 김민우는 김완선의 열렬한 팬이었던지라 김광수를 선택하며 본격적인 데뷔 작업에 들어가게 됩니다.

가수 데뷔 3개월만에 활동 중단

1988년부터 2년간 앨범준비를 하면서 박주연, 윤상, 하광훈 등 유명 작사 작곡가들과 노력한 끝에 1990년 5월에 가요계에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앨범 준비 당시 얼마나 철저했는지 노래에서 숨 쉬는 부분, 발성법 순서까지도 완벽히 기억할 정도로 라이브 무대에서도 안정적인 기량을 발휘하게 되었고, 데뷔 3개월 만에 순식간에 불어난 인기로 한 앨범 곡인 사랑일 뿐야와 입영열차 안에서로 신인으로는 유례없는 가요톱10에서 골든컵을 한 앨범에서 2번이나 차지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후 후속곡인 입영열차 안에서로 활동하던 1990년 7월에 입대 영장을 받고 방위병으로 입대하면서 데뷔 활동한 지 겨우 3개월 만에 가수 활동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입영열차 안에서라는 노래를 띄우기 위해 기획사에서 강제로 입영시켰다고 하며, 본인의 말에 따르면 “영장을 받으면 그냥 입소해야 하는 줄 알았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군대 입영 후에도 가요톱10에서 골든컵인 5주 연속 1위를 기록하면서 어머니 등 그의 가족들이 대리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1992년 2월 1일에 전역 후 활동을 재개했으나, 얼마 안 가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여 가요계의 판도가 뒤집히면서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후 1994년 최남욱 등 음악 하던 동료들과 밴드 Shake를 결성했으나, 기대에 못 미치게 됩니다.

녹음실 폭발 사고로..

1996년에 개인 재산과 대출금을 쏟아 부어 성내동에 녹음실을 만들게 됩니다. 만든 녹음실이 정신병자였던 이웃 이발사의 방화로 화재가 발생해 전소되었습니다. 건물이 화재보험에 들어 있지 않아 보상을 전혀 받지 못하게 되면서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집이 압류당하는 등 생계가 곤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김민우가 말하길 “작곡도 하고 콘서트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전 재산과 대출금으로 녹음실을 마련했다.”라며 “그런데 어느 날 녹음실 앞에 동네 분들이 모여있더라. 가스가 폭발해서 못 들어간다고 하더라. 당시 3억 원의 피해를 봤다.”라고 털어놨습니다. 그는 “제가 갚을 수 없는 돈이었다. 매일 밤 수많은 네온사인을 누비고 다니면서 어렵게 생활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1997년에 발표했던 4집을 마지막으로 앨범을 내지 못했고, IMF 외환위기가 도래하여 카페 등에서 노래하는 밤무대도 뚝 끊기게 됩니다. 이 시기에는 돈 한 푼이 아쉬웠던 때로 친구 결혼식에서 축가를 불러주기 위해 강동구인 집에서 결혼식장이 있는 강남까지 버스비도 없어 걸어가기도 했고, 자신의 신세가 너무 절망적인 나머지 극단적인 시도까지도 생각했다고 합니다.

수입차 딜러

그는 2004년 동네 후배의 소개로 서울지역 공식 딜러인 로열오토모빌의 김 대표를 만나 자동차 영업 분야에 눈을 뜨게 되면서,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입차 세일즈맨으로 변신하여 세간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상술된 사고로 재산을 크게 잃고 수년간 고생했던 경험이 그를 다른 세계로 뛰어들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1년간 연수생으로서 무급으로 혹독한 자동차 세일즈 교육을 거치며 연예인의 색깔을 지워나가고 수입차 세일즈맨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으며, 그가 정식 입사한 후 얼마 안 되어 멘토였던 김 대표가 갑작스레 중국으로 이직하면서 스스로 로열 오토모빌에 계속 몸담아야 할 명분이 없어지게 되는 바람에, 2005년 말 한성자동차에 스카우트되어 수입차 세일즈맨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합니다.

가수로 활동하던 시절에 쌓은 연예계 인맥이 영업 실적에 도움이 많이 되었을 것이라 짐작하기 쉽지만, 실제 김민우는 인기 연예인으로서 방송 활동한 기간이 불과 3개월 정도로 초단기였기에 연예계 인맥이 그렇게 많지도 않고 신입 시절 갑작스러운 이직으로 초반 고객 형성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김민우가 말하길 “자신을 거쳐 간 고객들의 80% 이상은 그를 추억의 가수로서 기억하는 일반인들이라고 한다. 사실 벤츠와 같은 최고급 브랜드 수입차의 고객들은 그야말로 상류층이 대부분이고 자신들의 경제 사정을 공개하는 것을 상당히 꺼리기에, 단순히 연예인이라는 명성만 보기보다는 계약을 성사하기 까지 그야말로 몇 번의 망설임과 까다로운 비교 끝에 딜러를 선택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2006년 매달 평균 9~10대의 벤츠를 판매하는 사내에서 전무후무한 영업실적 기록을 세우면서 2007년에 빚도 모두 갚게 되었습니다. 이후 신용등급도 상위 수준으로 회복되고 통장 잔액도 넉넉해지는 등 경제적 상황이 많이 회복되면서 평범하면서도 안정적인 삶을 지내게 됩니다.

일주일만에 세상을 떠난 아내

가수 김민우 씨는 2009년 6살 연하의 신부 한혜남 씨와 결혼했지만, 2017년 너무 안타깝게도 부인상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가수 김민우 씨의 아내 사망 원인은 희귀난치성 질환의 일종인 혈구탐식성 림프조직구증으로 부인께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민우 씨 아내는 갑작스럽게 병이 발병했고 그 후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김민우는 “아내가 처음에 목이 아프다고 해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목에는 이상이 없다는 거다. 그래서 아내가 링거를 맞고 입원한 지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김민우는 “그 병이 바로 발견되는 병이 아니다. 피로도 나오지 않고, 척수에서 수액을 빼서 봐야지 나오는 병이다.”라며 “검사를 했는데 의사들이 뇌까지 전이가 됐다고 했다. 자기가 자기를 공격하는 이것들이 다 장기를 망쳐놓고 이미 뇌까지 전이돼서 아마 몇 가지 물어보면 기억 못할 거다라고 해서 충격이었다. 아내가 내 생일을 기억 못하더라.”라고 털어놨습니다.

이어 “나는 딸을 속이지 않았다. 나는 민정이에게 다 말했고, 장례 치를 때 마지막 모습도 보게 했다.”라며 눈물을 흘려 안타까움을 안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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