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아역스타 사기 사건 오명 “최근 충격적인 장소에서 발견” 그녀의 안타까운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최고의 연기파 아역 배우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유리. 그러나 그녀는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인생의 바닥까지 떨어졌던 비운의 스타였습니다.

배우
👉3대 트로이카 여배우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기로 결국, 한국을 떠난…” 그녀의 안타까운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빛나는 아역 스타

최유리는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다섯 살이던 1968년 mbc 어린이 합창단 1기생으로 뽑힌 최유리는 사실 일곱 살부터라는 나이 제한이 있었지만, 나이를 속인 어머니 덕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합창단으로 얼굴을 알리게 된 최유리는 고작 다섯 살이던 어린 나이에 영화에 출연하며 본격적인 아역 배우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이름이 처음 알려진 것은 일곱살 때 출연한 mbc 드라마 학부인이었는데요. 죽어가는 어린 소녀 역할을 믿을 수 없게 소화한 일곱 살 소녀는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여러 작품에 출연하던 최유리는 1971년 영화 두 달에 8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놀라운 연기력을 보여주었는데요. 천재 아역 배우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정도로 최유리는 어린 소녀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배우들 사이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인상적인 눈물 연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대한민국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1972년 화제의 드라마 여로에서도 최유리는 인상 깊은 모습을 남겼고, 이 작품으로 그녀는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또 텔레비전 광고에서도 최유리의 활약은 돋보였는데요. 해태제과의 장기 모델로 활동하며 수많은 광고에 출연한 그녀는 그야말로 반짝반짝 빛나는 아역 스타였습니다.

호돌이와 토순이 MC

카메라만 돌면 바로 흘리는 눈물과 남다른 기억력으로 한 번 읽기만 하면 대본을 암기해 연기를 해내는 그녀는 당시 연출가들 사이에서 신동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1974년, 유경수 여사의 장례식 때, 고작 10살이라는 나이에 조사를 읽기도 했는데요.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생들에게는 너무나 그리운 그 시절, 어린이 드라마에서 최유리는 가장 돋보이는 주인공이었습니다.

최유리는 특히 어린이 종합 프로그램 tbc 호돌이와 토순이의 mc였던 걸로 유명한데요. 1976년부터 1980년까지 4년여의 기간 동안 방영된 호두리와 토순이는, 그 당시 대한민국 어린이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아역 최유리의 인기에 힘입어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메인 mc였던 최유리의 안정적인 진행과 보조 mc였던 윤유선의 활약으로 호돌이와 토순이는 70년대 최고의 인기 어린이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커다란 눈망울에 환하게 웃는 얼굴이 예뻤던 최유리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70년대 최고의 아역 스타였습니다.

미국으로 유학

다섯 살 때부터 시작된 방송 생활은 어린 소녀 최유리에게 엄청난 부와 인기를 주었지만, 사실 화려한 성공 뒤에는 어두운 이면이 있었습니다. 최유리는 인기가 있었던 만큼 겹치기 출연을 하며 밤낮없이 일해야 했고,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힘들어진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던 소녀 가장이었는데요. 그녀는 소녀 가장이라는 무게와 여러 활동에 지쳤는지, 세화여고 2학년 때 돌연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인터뷰에서 최유리는 방학, 크리스마스, 어린이날도 없는 힘겨운 방송 생활에 짜증만 가득했던 소녀였는데, 미국에서 모든 것을 잊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을 때, 진정한 행복을 느꼈다는데요. 한국에서 최고의 스타였던 과거와는 다르게, 유타주의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호텔 청소부와 극장, 팝콘 장사 등을 하기도 했고, 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자동차 모델을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혼자 힘으로 벌어 쓰는 고학생의 삶을 살았다고도 합니다.

그럼에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평범한 생활에 빠져들어, 연예인은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적도 있다는데요. 그러나 이때 한국의 부모님이 사기를 당해 모든 재산을 날리고 반지하방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1986년, 최유리는 귀국을 하고, 또 다시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의 무게를 짊어지게 되었는데요.

제2의 전성기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최유리는 5년의 공백기가 무성할 만큼 활발하게 방송 활동을 했습니다. 연극과 뮤지컬에 도전하기도 하고, 라디오 디제이도 했으며, 무엇보다 mc로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는데요.

임성훈과 공동 mc를 하며 수동적인 보조 역할이 전부였던 기존의 여성 mc와는 다른, 능수능란한 진행과 탁월한 말솜씨로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미국 유학으로 얻은 유창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리포터로 변신하기도 했고, 한국 대표단으로 여러 해외 영화제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아역 출신의 배우들이 성인 연기자로의 변신에 실패했던 것처럼, 최유리 역시 연기 부문에서는 주춤했습니다. 사람들이 기억하던 과거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가 더 이상 아니었던 그녀는 심지어 애로물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유학원 사기 사건

비록 아역 시절만큼의 인기는 아니었지만 복귀 후 열심히 활동한 최유리는 모은 돈으로 부모님께 전셋집도 마련해 드리고, 이후에는 부모님의 미국 이주를 돕기도 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도움을 위해 찾은 유학원에서 모델일과 학생 상담의 제의를 받게 된 최유리는 훗날 그녀에게 닥칠 사건은 상상도 못한 채 명목상의 이사장 제의에 수락하고 말았습니다. 압구정동에 코리아 아카데미 이사장이 된 최유리는 자신의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중고생들의 미국 유학을 돕는다며 유학원의 홍보 활동에 매진했습니다. 그러나 1991년, 이 유학원은 해외 유학 자격이 없는 중고생들을 미국에 불법 유학시키고, 100억 원을 챙긴 혐의로 문제가 되어, 당시 수많은 사회 뉴스를 장식했습니다.

“배우 최유리 씨가 경영하는 유학 알선 업체 코리아 아카데미입니다. 이 학원에서는 해외 유학 자격이 없는 중고생 250여 명을 관광 비자를 통해 미국 등지에 불법 유학시켜주고, 수십억 원 가량을 챙겨온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아역 탤런트로 데뷔한 최 씨는 자신이 직접 외국 유학을 다녀온 사실을 신문 광고까지 내며 유학생들을 모집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경찰은 최 씨의 학원을 통해 유학을 간 학생들 대부분은 미국에서 열악한 기숙사에 수용돼 말사육 등 목장일 사역까지 하는 등, 미국 내에서조차 인권 유린 시위를 일으켜 이 학원에 대해 수사를 펴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한때 전 국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최고의 아역 스타 최유리가 유학원 사기 사건의 주범이라는 뉴스에 많은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최유리는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는데요. 그녀는 출연 계약이 취소되고, 계약금 배상을 위해 살던 집까지 팔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최유리는 이사장이라는 직함을 받기는 했지만, 홍보를 위한 모델이었을 뿐, 사기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다는 게 밝혀져, 1992년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언론의 성급한 오보로 최유리는 모든 것을 잃고 말았지만, 그녀의 무죄 판결 뉴스는 크게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최유리는 실패한 아역 스타이며, 유명세를 이용한 유학원 사기 사건의 주인공으로 남게 된 것인데요.

최근 근황

모든 것을 잃고 더럽혀진 명예의 연예인으로서 더 이상 회생할 수 없었던 최유리는 일본으로 이민을 떠났고, 그렇게 대중에게서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잊혀졌던 최유리는 지난 2018년, 본인의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 “나 지금 여기에”를 출간했습니다.

솔직 담백하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자서전에 최유리를 기억하던 팬들은 한동안 사라졌던 친구를 다시 만난 것처럼 기뻐했는데요. 최유리는 2020년 시집 “어제는 가고 내일은 아직”을 출간해 본격적인 작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25년을 함께한 남편 캔벨 씨와 행복한 일상을 보내며 상처 많았던 지난 날과는 다른 밝은 모습의 그녀에게 진심으로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관련 영상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You may also like...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You cannot copy content of this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