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년 33세 천재가수 폐결핵으로 결국 “추모공연 전액 지원한 충격 정체” 그의 안타까운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3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 음악가 김정호 씨에 대해 아시는지요? 세월의 흐르면서 그가 점점 잊히고 있지만, 그의 노래는 수많은 가수가 리메이크하면서 더욱 아름답게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가요 중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꼽으라면 당연히 그의 노래를 꼽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가요계의 레전드 윤복희 씨는 김정호 씨의 하얀 나비 라이브 영상에 직접 이렇게 댓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1976년 대한극장에서 공연인데 처음으로는 라이브라고 했어요. 참 순순한 청년이고 수줍음이 많은 애였어요. 이렇게 노래를 잘하는 가수를 왜 그냥 두었는지 이해가 안 돼요. 우리나라에서 가수를 뽑으라면 전 김정호예요.”라고 했습니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의 돌이킬 수 없는 선택과 부인의 안타까운 고백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수
👉90년대 하이틴 가수 폭발 사고로 결국 “일주일 만에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 그의 안타까운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어린시절

김정호씨는 1952년 봄에 광주광역시에서 3남 3녀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광주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 종로구로 이사갔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여수 경찰서장을 지내다가 나중에 출판사를 경영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 쪽이 굉장히 특이한데, 어머니는 담양에서 활동한 판소리 명창 박숙자 씨입니다.

김정호 씨의 음악적인 재능은 모계에서 물려받은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외가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국악 집안이었습니다. 외할아버지 박동실 씨는 일제강점기에 서편제 판소리 명창이었는데, 최초의 창작 판소리인 ‘열사가’를 만든 사람으로도 아주 유명합니다. 그가 만든 유관순 열사가 등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외할아버지는 민족혼을 고취하고자 노력한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핏줄이 축복이자, 저주라는 것을 얼마 가지 않아 깨닫게 됩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어려운 악극단 인생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아 어린 김정호가 6살 되던 해, 국악의 관심을 보이자 집 안에 있던 모든 국악기를 내다 버리고 심지어는 가야금 줄을 끊어버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이렇게 죽기 살기로 국악을 반대하자, 타고난 음악적인 재능은 기타 쪽으로 옮겨갔습니다.

친구 개그맨 고영수가 밝히길….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개그맨이자 방송인 고영수 씨에 의하면 김정호 씨가 대동중학교 때 기타를 치고 있었는데 “어디서 났냐고 물어보니까, 주었다든가 했대요. 기타 줄 대신 철삿줄을 매어 기타를 쳤는데 그래서 기타 소리가 아니라, 철삿줄 소리가 났다고….”라고 전했습니다.

김정호 씨는 종로 낙원동 악기상과 주변을 배회했고 잠자리조차 없어 거리에 내놓은 이삿짐 속 캐비닛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했다고 합니다.

가수 데뷔와 활동

그러다 기지촌 미군클럽에서 기타리스트로 잠깐 활동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만난 이상일 씨가 우이동으로 그를 데려가 음악하는 몇몇 젊은이들을 소개해줍니다. 이때 어니언스 임창재 씨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이 영원한 우정을 맺게 된 계기는 어니언스로 데뷔하는 임창재 씨를 위해 김정호 씨가 직접 작사, 작곡한 곡들을 주게 됩니다.

그 유명한 사랑의 진실, 작은 새였습니다. 스타덤에 오른 것은 1973년 솔로로 데뷔하면서 이름 모를 소녀가 히트하면서부터입니다. 그리고 임창제의 추천으로 당시 TBC의 패티김 스페셜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하게 되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때 게스트로 함께 나온 신인가수가 바로 조용필이었다고 합니다.

소문만 무성

이후에 인기 정상의 가수로 잘 나가던 김정호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은 1975년에 일어난 “대마초 파동”이었습니다. 친구인 ‘어니언스’의 임창제뿐만 아니라, 김정호도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었고 출연정지 처분을 받으면서 사실상 음악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대마초 파동에 연루된 다른 가수들은 1979년에 해금 조치를 받은 이후로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지만, 해금 조치를 받은 김정호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온갖 소문이 무성했다고 합니다. 사실은 이 당시에 김정호는 파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방위병으로 소집을 받았지만, 지방 공연을 하는 친구를 따라가는 바람에 입영 날짜에 입영을 못 해서 탈영병으로 영창에 있다가, 겨우 나와서 군 복무를 마쳤지만 제대하던 때에 호되게 앓은 감기 이후로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결국 폐결핵을 진단받고 해금 조치 이후에도 활동을 재개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폐결핵이었지만….

1980년에 오랜만에 앨범 인생을 냈지만, 폐결핵 증세가 악화하여 인천의 요양원에 입원했습니다. 의사는 충분한 요양을 취하면서 적어도 1년 이상은 치료해야 한다고 했지만, 김정호는 결국 4개월 만에 요양원을 뛰쳐나와 음악에 몰두했습니다. 1983년, 김정호는 새 앨범 을 내놓았습니다. 김정호의 유작이 되어버린 이 앨범은 김정호의 건강 때문에 진척 속도가 매우 더뎠다고 합니다.

숨이 차서 한 소절을 녹음하고 휴식한 뒤에 다시 녹음하는 식으로 진행된 탓에 무려 5개월이나 걸려서 겨우 한 곡의 녹음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김정호는 유난히 꽹과리를 붙들고 새 앨범을 만드는데 심취했습니다. 이런 한 서린 감성이 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습니다.

결국 건강 악화로..

결국 악화한 건강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다가, 1985년 11월 29일에 “내 죽거든 앞이 보이는 넓적한 곳에 묻어달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33살의 나이에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났습니다.

18년만에 열린 추모 공연

이름 모를 소녀는 김정호 씨의 데뷔곡이자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노래의 실제 주인공은 바로 김정호 씨의 부인 이영희 씨였습니다. 그녀는 김정호 씨의 교통초등학교 친구의 사촌 여동생이었는데 김정호 씨는 그녀를 중학생 때부터 좋아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그의 첫사랑이었죠. 김정호 씨는 바보처럼 순수했다고 주변 지인들이 얘기하는데요. 아내 또한 너무나 지고지순했습니다.

1975년 김정호 씨가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어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를 외면하지 않고 그의 곁에 함께 있어주고 해금이 되기 전인 1977년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늘 그가 하자는 대로 했다고 해요. 부인은 그가 건강이 나빠져 공기 좋은 곳으로 가서 살자고 하면 그렇게 하고 또 친구 곁으로 가자고 하면 또 그렇게 했고 경제적으로 정 버틸 수 없어 어머니 곁으로 가야겠다고 말하면 역시 또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음악 없이는 살 수 없는 그가 병원을 뛰쳐나와도 그를 만류하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김정호 씨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도저히 꺾을 수가 없었겠죠. 김정호 씨의 음악의 뮤즈는 늘 부인 이영희 씨였는데요.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도 음악도 이렇게 탄생한 것 같습니다. 언론에 노출을 꺼려왔던 부인이 50세 되던 해이자 김정호 씨의 사후 18년 만인 2003년 처음으로 인터뷰에 응한 적이 있는데요. 그때 김정호 씨의 추모 공연이 열릴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김정호 추모공연은 놀랍게도 공연기획사가 아닙니다. 팬들의 모금으로 마련된 것이서 더욱 화제가 되었습니다. 부인 이씨는 “언젠가는 추모공연을 열어야지 하는 것이 살아오면서 늘 마음의 짐이었는데 남편을 잊지 않은 팬들이 직접 나서 이렇게 공연을 마련하니 너무 감사합니다.” 하고 전했습니다.

관련 영상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You may also like...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You cannot copy content of this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