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선수 경기 중 쓰러져 결국 “영원히 못 돌아온 2루 주자” 그의 안타까운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야구팬들이라면 절대 잊을 수없는 선수 임수혁. 경기장에서 쓰러져 뇌사 판정받고 9년 넘게 투병해 온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임수혁 선수가 끝내 숨졌습니다. 이 사고 이후 야구장에 구급차가 생기고 야구선수 지정병원도 생겼습니다. 임수혁 선수의 사고와 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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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의 루키’ 축구선수 암 투병 중에 결국 “병마와 끝까지 싸웠으나 안타깝게…” 그의 안타까운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야구선수 데뷔

야구선수 임수혁은 1969년 6월 17일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서울방배초등학교, 강남중학교, 서울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여 1992년 LG트윈스의 지명을 받았으나 입단을 거절하고 상무에서 군 복무를 한 후, 1994년 롯데 자이언츠의 2차 1순위 지명을 다시 받아 프로 데뷔하였습니다.

야구선수 심재원, 한문연, 김선일, 강성우, 임수혁, 최기문, 강민호로 이어지는 롯데 자이언츠 포수 계보의 한 축이며, 경기장 내 의료진 배치 의무화, 경기장 내 앰뷸런스 배치 의무화 등 여러 프로 스포츠 연맹의 의료 시스템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 인물입니다.

공격형 포수

공격형 포수였던 그는 당시 롯데 주전 포수였던 강성우에 비해 수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입단 첫해인 1994년에는 지명타자와 대타로 주로 활용되었습니다. 그러나 1995년부터는 롯데의 고질적인 거포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주전 포수로 나서게 되고, 15홈런을 기록하며 1995년 입단한 마해영과 33개의 홈런을 합작하여 1982년 김용철, 김용희의 용용포에 이은 마림포라는 별칭을 얻게 됩니다. 김선일, 강성우라는 수비력은 정상급이지만 타격에선 아쉬웠던 포수진과 박정태, 김응국, 김민호로 대표되던 단타 라인업의 롯데 타선에서 그의 부드러운 장거리포는 무척이나 반가운 옵션이었습니다.

1995년 홈런 1위 기록은 OB 베어스의 김상호가 기록한 25개인 것과 프로야구 원년부터 1995년까지 30홈런 이상을 친 홈런왕이 단 3회만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임수혁이 어느 정도의 거포였는지 알 수 부분입니다. 40홈런 이상 뻥뻥 날리는 홈런왕 경쟁이 벌어지는 지금이라면 홈런왕까지는 아니어도 30홈런 이상은 날리는 거포인 셈입니다. 1996년에도 113경기에 출장하며 11홈런을 기록하여 롯데의 안방마님 자리를 굳히는 듯했으나, 무릎 부상을 안고 출전해 온 탓에 1997년부터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부상의 여파로 1997년에는 49경기에 출전한 것이 전부였고, 1996년 이후 단 한 번도 타율 2할 6푼 이상을 기록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롯데의 주전 포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클러치 히팅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큰 경기에 강하고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는 선수였으며, 1995년 OB 베어스와의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10회 초 희생플라이로 결승타점을 기록한 것이나,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9회 대타로 나와 동점 투런 홈런을 때려내는 등 중요한 경기에서의 결정적인 활약으로 인해, 그는 롯데 팬이 열광하는 선수가 되었습니다.

경기 중 심장마비

1999년 플레이오프의 감동이 이어진 2000년 4월 18일, 롯데는 잠실에서 LG트윈스와의 경기를 가지게 됩니다. 2회 초 타석에 들어선 임수혁은 유격수 류지현의 실책으로 1루에 안착했고, 이어진 테드 우드의 우전 안타로 2루에 진루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타자였던 조성환이 타석에 들어선 그때, 갑자기 2루에 있던 임수혁이 쓰러졌습니다. 의식을 잃은 채 다리를 떨며 쓰러진 그의 모습을 본 구단 트레이너가 달려 나왔으나, 대처법을 몰랐던 트레이너와 선수들은 어쩔 줄 몰라하며 들것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들것을 통해 덕아웃으로 옮겨진 후 대기하고 있던 구급차에 실려 수십 분 후 강남시립병원으로 옮겨졌고, 간신히 맥박과 호흡을 살려내는 데 성공했으나, 그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식물인간 판정받고 말았습니다.

미흡한 응급처치

원인은 그가 프로 입단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지병인 부정맥이었습니다. 2루에 진루한 후, 그의 심장이 갑자기 느리게 뛰면서 뇌로 올라가야 할 혈액이 부족해져서 쓰러졌던 것입니다. 심폐소생술이 급박하게 필요한 상황에서 간호사를 비롯한 선수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숨을 쉴 수 있게 유니폼 단추를 풀고 물을 가져다 몸을 적시는 것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요즘은 다 아는 상식이지만, 심정지 환자는 쓰러진 직후는 물론, 이후에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후송 중에도 흉부 압박을 지속적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임수혁은 쓰러진 직후 유니폼 윗단추랑 허리띠만 풀어주는 조치만 취했고 들것에 옮겨지는 중에도 산소마스크만 씌워진 채로 실려 나갔습니다.

애초에 심장이고 폐고 기능이 멈춘 사람한테는 산소마스크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만약 그 당시에 주변에서 심폐소생술을 바로 해줬더라면 살 수도 있었습니다.

​구단과 팬들의 성금으로..

KBO는 임수혁이 심장 부정맥으로 쓰러진 뒤, 약 2달 만인 2000년 6월 2일에 임수혁 돕기 행사를 열어 잠실에 방문하는 팬 1인당 500원을 적립하여 임수혁의 치료비로 전달하였습니다. 이날 벌어진 두산 베어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에서, 삼성 라이온즈는 같이 뛰자 임수혁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성금과 임수혁의 쾌유를 비는 팬들의 메시지를 임수혁의 가족에게 전달했습니다.

2000년 한국프로야구 올스타전에는 여러 선수들이 임수혁의 쾌유를 바라면서 올스타전 1차전을 시작하기 전, 모임을 하고 승리 팀 감독에게 전해지는 상금과 감독 홈런레이스 입상자 상금을 임수혁의 치료비로 보태기로 했습니다. 이에, 선수들도 성금 모금에 동참하여 선수들이 승리 팀 수당 1,000만 원씩을 임수혁의 치료비로 보태기로 했으며, 임수혁 치료비 성금이 2,550만 원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프로야구선수협의회의 ‘임수혁 돕기 자선 경매’는 박찬호, 거스 히딩크 등 다수의 유명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수차례에 걸쳐 진행되어 화제를 모은 바 있습니다.

축구선수 김병지도 2000년 8월 16일 임수혁에게, MVP 및 캐넌슈터왕으로 얻은 상금 중 300만 원을 임수혁의 치료비에 보탰습니다. 현대 유니콘스 선수단도 임수혁을 위해 성금 1,000만 원을 전달했습니다. 특히 현대 유니콘스의 경우 1회성 성금 전달로 그치지 않고, 이후에도 매월 선수단이 자체적으로 모으는 상조회비에서 일정 금액을 떼어 치료비에 보태도록 롯데 자이언츠 상조회 쪽으로 송금해 주는 일을 끊임없이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현대가 해체되었으나, 현대 선수단을 승계하여 창단한 히어로즈가 이를 이어받아 매년 모금 행사, 가족 시구 등 임수혁을 기억하는 행사를 벌여왔고 이 행사는 임수혁의 사망 이후인 2011년까지 매년 지속되었습니다.

돌아오지 못한 2루 주자

언젠가 임수혁이 2루에서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길 바라던 팬들의 바람도 소용없이, 결국 병세가 나빠져서 안타깝게도 그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2루 주자가 되었습니다. 이때가 향년 40세. 장례는 유족들의 뜻을 따라서 가족장으로 치렀으며, 롯데 자이언츠 동료 선수들이 직접 관을 운구하였습니다.

화장 후 하남시의 가족납골당에 안치하였습니다. 임수혁을 지칭할 땐 돌아오지 못한 2루 주자로도 표현되고 하는데, 모티브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인 듯. 김은식 작가가 이 제목으로 임수혁을 추모하는 칼럼을 쓴 바가 있습니다. 임수혁의 등번호 20번은 이후 몇몇 선수들을 거치다 2016년 최영환을 마지막으로 아무도 쓰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상 비공식적인 영구결번인 셈입니다. 이후 진승현이 고교 시절 등번호이자 아버지의 등번호이기도 한 20번을 달려고 했으나, 구단 측에서 달지 못하는 번호라고 말해 사실상 준영구결번으로 구단 측에서 관리하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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