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방송인 안타까운 비보 “심장마비로 쓰러져 치료받던 중 숨져” 그의 안타까운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대한민국의 팝송 DJ 겸 방송인 김광한을 아시나요? 팝송을 독학하여 1980년대 당시 대한민국에 드문 팝 전문가였습니다. ‘전설의 DJ’ 방송인 김광한이 심장마비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으며 과거 가운데 그의 직업 경력이 다시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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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데뷔

방송인 김광한은 1946년 11월 9일, 서울에서 5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하며 신문 배달을 하며 고학했다고 합니다. 혼자서 미 8군에서 나오는 팝 관련 잡지를 읽으며 팝을 독학했다고 합니다.

1966년 서울 FM에서 DJ로 데뷔한 그는 1년 2개월 남짓 활동한 후, 월남전에 정훈병으로 참전했습니다. 제대한 후에는 바로 방송에 복귀하지 않고 음악감상실의 DJ를 하다가, 1978년 MBC FM의 박원웅과 함께를 통해 방송계에 복귀했습니다. 1980년 TBC에 입사하여 탑튠쇼를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팝송 전문가 1세대

1980년대가 그의 전성기이었습니다. 이때 마이클 잭슨, 마돈나 등의 활약으로 팝송 팬들이 대한민국에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도 팝 전문가로서 활약하게 되었으며, KBS 2FM의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 그리고 TV에서 팝송 관련 진행자를 맡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종환이나 김기덕과 달리 라디오에만 머무르지 않고, 유머 1번지나, 쇼 비디오 자키 등의 개그 프로그램에 나와서 팝을 해설해 주기도 했습니다. 팝송 전문가였을 뿐만 아니라, 일반 프로그램 진행 능력도 있었기 때문에, 팝송 관련 프로에만 머무르지 않고 1990년대 초반에는 가요 프로그램인 가요톱10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본인도 진행을 맡으며 “저는 가요에 전문가가 아닙니다만, 이 기회에 가요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그는 여러가지 활약을 했지만 1992년부터 대한민국에서 모든 것을 바꿔 버린 서태지가 완전히 가요 판을 새로 짜고, 댄스음악이 주류가 되면서 대한민국에서 팝송의 위세는 줄어들고, 이렇게 되자 활약이 뜸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슬롯이 거의 없어진 팝송 전문 프로그램이 아닌, 일반 프로그램의 DJ로 방송을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1990년대 후반에는 서울교통방송의 밤과 음악사이를 진행하기도 했고, 2000년대 초에는 KBS 2FM으로 돌아와, 아침 11시에 방송했던 골든팝스의 진행을 맡았습니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는 경인방송 라디오에서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을 진행하도록 했고, 2009년부터 2011년까지는 TBN 인천교통방송 낭만이 있는 곳에를 진행하기도 했고, 2013년부터 2014년에는 CBS 표준FM에서 `김광한의 라디오 스타’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DJ를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어

김광한은 과거 방영된 MBC ‘놀러와-전설의 라디오 스타편’에 출연한 적이 있었습니다. MC 유재석의 “어떻게 라디오 DJ가 될 수 있었나?”라는 질문에 “데뷔 전 직업만 16개였다.”라고 털어놨습니다. 당시 김광한은 “정식으로 DJ가 되기 전 16가지의 직업을 가졌다.”라며 “화장품 장사, 병아리 장사, 하숙집 지배인, 아크릴 간판업, 건축현장 노무, 점성술사….” 등 자신이 거쳐온 직업군을 나열해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이어 “이 모든 직업은 DJ가 되기 위해서 가졌다. 이런 자유직업들은 언제든지 DJ가 되면 그만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라며 DJ에 열정을 드러냈습니다.

그의 아내

지난 2011년 방송된 KBS 여유만만에 아내와 함께 출연해 김광한의 집이 공개하였습니다. 당시 방송에서 김광한은 자신의 아내에 대해 “우리 집에 오면 꽃향기가 안 난다. 아내 향기가 너무 좋아서 그렇다. 그래서 꽃님이라고 별명을 지어줬다.”라며 애정을 드러냈습니다. 특히 두 사람은 결혼 30여 년 차에도 불구하고 방송 내내 손을 꼭 잡고 다녀, 주위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갑작스러운 심장마비

그러던 어느 날, 김광한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병원으로 후송된 뒤 중환자실에서 투병하다가 만 68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평소 심장질환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술한 월남전 참전 경력으로, 국립이천호국원에 안장되었고. 2015년 5월에 방송한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 출연한 게 대중들에게 마지막으로 보인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후 방송인 김광한의 아내가 남편을 떠나보내며 나눈 마지막 말을 공개해 많은 이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고인의 아내는 “내가당신의 인생은 성공했어요`란 말을 하자 알아들었는지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라며 눈물을 쏟았습니다. 이어 “여보 진심으로 사랑해요”란 말을 덧붙였습니다.

팝 전문가 1세대로서, 1980년대 젊은 세대에서 팝송 붐을 일으키는데 활약했습니다. 한때 그의 해설을 들으며 팝송에 입덕하던 팬들이 인터넷 시대에 접어들고, 해외 유학으로 해외 팝 정보를 두루 접하면서, 팝송 전문가 1세대로서 대한민국에 팝 문화를 정착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애도 물결 이어져…

별세한 DJ 김광한에 대한 애도 물결이 이어졌습니다. 작곡가 윤일상은 자신의 트위터에 “학창시절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을 들으며 행복했던 시간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적었습니다. 가수 장호일 역시 트위터에 “김광한 선생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애도의 글을 남겼습니다.

격투기 해설위원 김남훈은 자신의 트위터에 “몇 해 전 CBS 대기실에서 인사 드렸더니 다큐에서 저를 봤다며 이런저런 말씀 해주셨는데 참 안타깝고 더 뵙고 싶었는데 아쉽네요”라며 “선생님 덕분에 어린 시절이 매우 행복했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고인의 발자취를 떠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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