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문희 남편 19일 새벽 지병으로 결국 “나에게 잘 보이려 시까지 외워왔던 남편인데…” 그녀의 안타까운 비보를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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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상 기러기 아빠 20년도 모자라 결국…” 안타까운 그의 근황에 대해 확인해 보세요.

남편 대장암으로 결국…

나문희의 남편이 지난 19일 세상을 떠난 가운데 빈소에는 그녀를 위로하는 연예계 동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나문희의 남편 고 유윤식 씨는 오랜 시간 대장암으로 투병했지만, 끝내 영원히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나문희는 상주로서 세 딸 그리고 손주들과 빈소를 지키고 있는 가운데 빈소는 은평 성모 장례식장에 마련 등 삼일장으로 조문을 치른 뒤에는 일산에 있는 장지로 이동해 수목장으로 장례를 진행한다고 합니다. 고인이 된 남편은 나문희와 젊은 시절 중매로 만나 3개월 만에 결혼했는데요.

결혼 전 덕수궁에 함께 갔다가 나문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래를 불렀었고 이후에 등산을 함께 가며 그때부터 나문희에게 남편이 남자로 보이며 남편에게 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편 유윤식 씨가 대장암을 앓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7년의 일로, 당시 나문희가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 출연해 코믹한 캐릭터로 연기 변신을 시도하며 큰 사랑을 받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시청률 고공 행진하며 인기리에 방영되던 거침없이 하이킥의 촬영 일정이 최고조였던 그해 겨울, 게다가 거침없이 하이킥 외에도 영화 권순분 여사 납치 사건에도 동시에 출연하던 나문희는 당시 “너무 바빠 스케줄도 정신이 없었는데 남편이 암에 걸려 너무나 괴로웠고, 또한 두 작품 모두가 코믹 캐릭터였기 때문에 가슴에 울분을 삼키며 즐겁게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괴로웠다고 털어놨습니다.

게다가 수개월이 지나도 남편의 대장암이 차도가 없고 항암치료가 진척이 없어서 그녀는 촬영하느라 간병하느라 자신도 너무 바쁘고 몸이 고단했는데 남편까지 그렇게 되니 정말 어떻게 내게 이런 시련이 올 수 있는지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라고 털어놨습니다.

어린 시절

더구나 나문희는 작년에 어머니를 하늘로 보내드렸는데 같은 병원 장례식장에서 올해는 남편마저 보내고 이제는 오직 그녀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나문희는 인생에서 너무나 가슴 아픈 일들을 많이 겪으며 살아왔는데 그녀는 부모님이 일본 강점기에, 일제의 억압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1941년에 중국에서 나문희를 낳았고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와서 정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문희에겐 출생지가 중국인 것 때문에 화교설이 돌았지만, 실제로는 화교는 아니었고 5살까지 중국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던 해에 대한민국 수원시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였던 나혜석이 고모할머니였고, 수원에서 나 부잣집이라고 하면, 모든 이가 알 정도로 부잣집 딸이었던 양갓집 규수였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사람들은 아들들만 학교에 보내고 딸들은 거의 학교에 보내지 않아서 여자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았지만, 나문희는 당시 여자로선 드물게 고등학교까지 나왔을 정도로 교육 면에서도 아쉽지 않은 정도로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했습니다.

성우와 배우 데뷔

하지만 신은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말이 있듯이 행복했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성인이 된 후 그녀의 삶은 많은 고난과 슬픔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녀는 탤런트로 활동하기 전, 사실 원래 다른 직업이 있었습니다. 바로 라디오 성우로 먼저 활동을 했던 것입니다. 1961년에 MBC 라디오 공채 성우 일기로 데뷔한 그녀는 데뷔 당시만 해도 지금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본래는 살짝 중저음의 기품 있는 목소리여서 성우 시절, 외화 더빙을 주로 했고 당시 섹시스타인 마릴린 멀로의 전담 성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방송사에서 TV 채널들이 개국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탤런트가 많이 필요해졌던 방송사들은 공채 탤런트를 뽑기도 했지만, 그래도 숫자가 부족해서 영화나 연극배우 또는 성우들을 드라마의 탤런트로 등장시켰고 그러면서 나문희도 탤런트로 전향하게 되었습니다.

배우 생활

그녀는 성우 출신 배우답게 정확한 발음과 좋은 발성으로 드라마 연기에서 호평을 받았지만, 다양한 드라마에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연 배우로 캐스팅되거나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당시 나문희는 키가 165cm로 당시로서는 상당한 장신이었는데, 심지어 동료 남자 배우들보다도 더 큰 체격을 가졌다는 이유로 그녀는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역을 맡으며 조연 단역을 전전했던 것이었습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먹는 데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에 키도 잘 크고 성장 발육이 좋았지만, 그것이 나중에 배우 생활하는 데는 걸림돌로 작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동년배 배우였던 김혜자나 정혜선 김용림 등 동료 여배우들이 주요 배역을 맡아 70~80년대엔 그녀들이 연기 대상을 받기까지 하며 승승장구했지만, 나문희는 주로 어머니 역할을 많이 맡으며 주연으로는 활약하지 못하고 조연과 단역을 전전해서 80년대까지 30년간의 연기생활 중 받았던 상이라곤 1983년 MBC 연기 대상 우수상 1개에 불과했을 정도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주연 여배우들에 비해 외모나 연기력에서 전혀 밀리지 않았을 정도로 젊었을 때의 얼굴을 보면 상당히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랜 무명생활 끝에 그녀가 본격적인 인기배우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은 무려 50세가 훌쩍 넘은 나이에 일이었습니다. 바로 1995년 문영남 작가의 바람은 불어도라는 드라마에서 이북 사투리를 쓰는 80대 할머니 역으로 출연해 큰 인기를 얻게 된 것입니다. 당시 그녀는 조연이었음에도 KBS 연기대상을 수상하였고 이것은 조연이 연기대상을 수상한 최초의 사례로까지 남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드라마로 1996년 제32회 백상예술대상 인기상과 역시 1996년 제23회 한국방송 대상 여자 탤런트상까지 휩쓸며 전성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시련의 연속

나문희는 영화 아이캔스피크에서 일제시대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니를 연기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진정성이 묻어나는 깊은 내면 연기로 관객을 무려 328만 명이나 동원하며 영화배우로까지 히트하게 되었지만, 영화가 개봉된 지 불과 1년여 만에 그만 그녀가 연기했던 김복동 할머니가 향년 93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게 됩니다.

당시 김복동 할머니의 별세는 사회 각계각층에 많은 관심을 모으면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문 대통령까지 빈소에 조문을 왔을 정도였습니다. 나문희 역시 본인이 연기했던 할머니의 별세를 가슴 아프게 여기고 할머니와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빈소를 찾아와서 조문하며 애도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나문희는 “뉴스로 소식을 듣고 찾아오게 되었는데 가슴이 아파서 왔고 고생을 많이 하셨으니까, 이제는 날개 달고 편한 곳 좋은 곳으로 가시기를 바란다”라며 심심한 애도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더구나 작년에는 나문희에게 또 가슴 아픈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평생 그녀를 지켜준 어머니의 별세였습니다. 나문희는 과거한 예능 프로에 출연해 어머니 그리고 딸과 함께 3대가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었습니다. 당시 나문희는 “이제 엄마는 99살이라고 말해 모두를 놀라게 했었는데 어머니를 그만 하늘로 보내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워낙 예쁜 걸 좋아하셔서 언제나 예쁘게 하고 다니셨다”라는 그녀의 어머니를 이제는 떠나보냈는데 게다가 어머니를 여윈지, 1년 만에 남편마저 떠나보내게 되었는데, 젊은 시절부터 단역을 전전하며 고생했고, 50세가 한참 넘어서야 겨우 명배우로 인정받아 인생의 행복을 누리나 했지만, 바쁜 스케줄로 정신없었던 당시 남편까지 암에 걸리며 마음을 졸여야 했고 본인이 연기했던 실제 인물의 죽음에 이어 자신을 낳은 친정어머니까지 하늘로 떠나보내야 했던 80여 년 기구하고 안타까운 인생사를 살아온 그녀의 인생. 이렇게 힘겨운 인생길을 걸어온 남문희 배우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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