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원숙이 하나뿐인 손녀와 20년간 연락이 끊긴 가슴 아픈 이야기” 어떤 이야기인지 확인해 보세요.

웬만한 남자보다 의리가 있고 웬만한 여자보다 정이 많으며, 눈물이 많은 사람으로 보고 있으면 그냥 기분 좋아지는 배우가 있습니다. 바로 탤런트 박원숙 씨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과거 세상을 향해 한 권의 책을 냈었습니다. ‘열흘 운 여자가 보름을 못 울어’라는 책으로 이미 열흘이나 울어버린 여자가 보름을 못 울겠냐는 책 제목이 말해주듯 그녀는 울 일이 참 많은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 해준 남자 그리고 두 번의 결혼, 두 번의 이혼하게 되며 아픔도 많았습니다.

첫번쩨 결혼 실패 이후 두 번째 남자와 또 결혼했지만, 평생을 후회할 만큼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을 너무나도 허무하게 잃었고 하나뿐인 손녀와도 20년 동안 연락이 끊겨서 울다 지쳐 실신하기를 반복해야 했던 박원숙입니다. 오늘은 그녀의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인생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박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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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그리고 임신

1949년 만화가 박광현의 딸로 태어난 박원숙은 어린 시절부터 끼가 다분해 연기자를 하고 싶다는 막연한 욕구가 있었고 그래서 대학도 중앙대 연극영화과로 진학하게 됩니다. 그렇게 연극영화과에 입학 후 연극에 푹 빠져 있던 그녀가 대학교 2학년 때 첫 번째 남편을 만나게 됩니다. 그 당시 두 사람은 연극이라는 매개체로 가까워졌고 특히 연극소품을 구하기 위해 남대문, 동대문, 세흥상가 등을 돌아다니다가 자연스레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다 하루는 두 사람이 연극소품을 사고 차를 마시며 시간가는 줄 모르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만 통행 금지 시간이 오고 말았고 그렇게 두 사람은 경찰서에서 철창 신세를 지지 않기 위해 여관으로 향해야만 했습니다.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첫 번째 남편이 절대로 잠을 자지 않고 밤새 이야기만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이 깨지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한 번으로 임신까지 해버린 그녀는 양쪽 집안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후에야, 두 어린 학생 부부는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첫 번째 남편이 결혼을 하자마자 군대에 입대하면서 그녀는 자연스레 독수공방 신세가 되고 말았고 그럼에도 삶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연기자의 꿈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연예계 데뷔 그리고 이혼

당시 시댁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임신 8개월의 몸으로 mbc 1기 공채 탤런트 시험에 응시하게 됩니다. 그렇게 임산부의 몸으로 탤런트 시험을 응시했으나 심사위원으로부터 집에 가서 애나 낳으라는 소리를 들으며 보기 좋게 미역국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다음 해에 또다시 시험에 도전해 마침내 mbc 2기 탤런트로 데뷔하게 됩니다.

한편 당시 mbc 2기 탤런트들 중에서 아이까지 낳은 유부녀는 박원숙 그녀 뿐이었고, 그래서 그랬는지 몰라도 동기들은 다들 주인공 역을 잘만하는데 그녀는 이상하게도 작은 단역들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그녀는 한혜숙, 김자옥 같은 동기들에 비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하물며 이때 남편은 제대로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일도 하지 않으며, 오로지 한 방을 위한 사업을 하겠다고 경험도 없는 사업을 벌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사업이 어디 쉬운 일인가요. 이후 남편이 손대는 사업마다 줄줄이 망하면서 박원숙 그녀가 버는 돈을 족족 탕진했고 또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도박과 여자 문제까지 터지면서 결국 그녀는 32살이 되던 해 첫 번째 남편과 이혼하게 됩니다.

재결합 그리고 이혼

그런데 전 남편이 한창 속 썩일 때도 험난한 그녀의 인생을 반짝이게 만든 보석같은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하나뿐인 그녀의 아들입니다. 훗날 그녀의 고백에 따르면 “며느리가 듣고 있으면 질투할지도 모르겠지만 일생동안 진정으로 사랑한 남자는 오직 아들 하나뿐이었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이후 그녀는 혼자가 되었고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이혼녀를 쉽게 보는 경향이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이혼을 하자마자 주위의 따가운 시선은 물론이고 당시 동료 탤런트들 마저도 그녀가 이혼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해서는 안 될 일방적인 사랑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이유들과 더불어 당시 하나뿐인 아들이 아빠없이 자라는 게 자꾸 눈에 밟혀 결국 그녀는 고심 끝에 첫 번째 남편과 이혼한 지 3년 만에 재결합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남편의 여자 문제가 끊이지 않자 결국 재혼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또다시 이혼하는 흔치 않은 전과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재혼 그리고 이혼

그렇게 또다시 이혼녀가 되어버린 그녀는 이후에는 아들만 바라보며 오로지 방송에만 매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5년 뒤 혼자 살아가던 그녀에게 절대로 만나서는 안 될 최악의 남자가 다가오게 됩니다. 바로 두 번째 남편이었습니다. 당시 이 남자는 해외교포 사업가로 그녀는 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5년간의 독신 생활을 청산하고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름만 거창할 뿐, 그야말로 달랑 빤스 하나 걸친 게 전부였습니다.

심지어 두 번째 남편은 돈만 없는 게 아니라, 첫 번째 남편과 어쩜 그렇게도 똑같은지 그칠 줄 모르는 바람기와 대책 없는 사업으로 그녀의 모든 출연료는 두 번째 남편의 사업 빚으로 모두 압류 당하게 되었습니다. 오죽하면 당시 방송사 경리들이 그녀처럼 출연료 압류가 많이 들어오는 탤런트는 난생 처음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두 번째 남편과도 이혼을 하게 된 그녀는 당시 위자료는 커녕 남편이 남긴 빚더미만 잔뜩 안아야 했습니다.

결국 남편의 빚을 갚느라 겨울에는 보일러를 틀 돈도 없어서 추위에 덜덜 떨면서 “자신이 전생에 무슨 죄를 졌길래. 남편 복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냐.”라며 신세를 한탄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두 번째 남편의 빚이 아무리 갚아도, 갚아도 끝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1988년도에 재혼해서 남은 빚은 2003년까지 갚아야 했고, 심지어 최근 2018년까지도 과거 남편이 그녀의 명의로 일을 벌렸다가 변제받지 못했다고 하며, 어느 60대 여성이 박원숙을 상대로 검찰에 고소하기도 했습니다.

아들의 결혼

2003년이 되어서야 남편의 모든 빚을 갚은 그녀는 이후 더욱 활발하게 활동하며 제2의 인생을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훗날 며느리가 될 여자친구까지 소개를 하며 그녀에게도 마침내 따스한 봄날이 다가온 듯 했습니다.

당시 며느리와 첫 대면에서 그녀는 “역시 내 아들이다.” 싶은 게 함께 식사하며서 얘기를 나눠보니 평생 내 아들을 보필해 줄 현명한 여자라는 느낌이 들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 아들이 결혼을 해 예쁜 손녀까지 낳자. 그녀의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한 시간들이 펼쳐지게 됩니다.

아들의 죽음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지 그녀의 실낯같은 행복을 하늘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아니 세상을 다준다해도 바꿀 수 없는 그녀의 아들이 어느 날 너무나도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2003년 11월 드라마 촬영 중이던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아들이 다니던 회사 사장한테서 온 전화로 현재 아들이 차 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사장이 “그녀에게 차에 잠깐 부딪혀서 아주 조금 다쳤다.

그래도 올 수 있으면 오라.”라며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아들의 사고가 큰 사고는 아닐 것이라고 판단해 “나는 촬영이 있으니까 나중에 가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면 촬영을 완전히 다 끝내고 저녁에나 병원에 가보자는 마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심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촬영을 중단하고 아들이 있는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도착해보니 앞서 통화한 사장의 말과 달리 아들의 상황은 너무나도 절망적이었습니다.

당시 그녀의 아들은 직장 동료들과 점심을 먹기 위해 길에 서 있다가 언덕길에 생수통을 가득 실은 트럭이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우지 못한 운전사 때문에 생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트럭이 미끄러지면서 한 사람의 생명까지 빼앗아 가버린 너무나도 황당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녀의 아들은 그날 아침 “엄마 다녀올게…” 이 한마디 툭 던지고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이후 아들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그녀는 울다 지쳐 실신하기를 수차례를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다섯 살짜리 어린 손녀는 아빠의 이러한 소식도 모르고 장례식장을 뛰어다니며 반가운 사람들 곁에서 예쁜 짓 하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20년간 손녀와 연락두절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이후 며느리가 재혼을 하면서 세상에 하나뿐인 손녀와도 연이 끊기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혹시라도 손녀가 연락을 할지도 몰라서 전화번호도 바꾸지 않고, 여전히 손녀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 있다며 방송을 통해 가슴 아픈 사연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아들을 잃은 뒤 손녀와도 20년 가까이 연락이 끊기게 되었습니다.

손녀와의 재회

하지만 2021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녀가 고백하기를 대학졸업 내정자인 손녀와 현재는 왕래를 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의 직업이 배우인 줄 모르던 손녀가 할머니와 함께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인사해서 의아해 한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고백에 따르면 “과거에는 자기 잘난 맛에 살아서 내 인생만 생각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살아 숨쉬는 모든 순간들이 기적이고 그저 감사할 뿐이다. 건강한 몸으로 일할 수 있으니 감사하고 나를 찾아주는 사람이 있으니 감사하다. 그리고 내가 워낙에 힘든 삶을 살아오다 보니 나와 같은 삶에서 아픔을 겪는 사람들을 보면, 못 본 채 지나칠 수가 없더라.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위로를 해주고 힘들 때 생각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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