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와 함께 엄앵란의 집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충격적인 이유” 어떤 이유인지 확인해 보세요.

가정을 두고 외도를 저지르는 것은 정신적으로 배우자에게 큰 고통을 심어주는 해서는 안 될 짓입니다. 간통죄가 폐지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다시금 부활해야 한다는 여론이 큰 만큼 여전히 외도는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자신과 결혼하기 전 이미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어 큰 충격을 받았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가수 현미 씨입니다. 이후 남편의 또 다른 의도에 결국 이별을 고했다가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현미 씨는 다음 생애에도 남편과 만날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현미 씨에게는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요? 오늘은 그 자세한 이야기에 대해 전달해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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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의 만남 그리고 잦은 외도

현미의 남편은 테너 색소폰 연주자이자, 유명 작곡가 이봉조 씨였습니다. 미 8군 무대에서 활동할 때, 남편을 처음 만난 현미는 “이봉조를 처음 만났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찌릿했어요. 옷차림과 몸가짐을 조신하게 하라는 등 생각이 봉건적이라서 야속했지만, 내 넘치는 끼를 남편이 억눌러줘서, 지금의 여자다운 아름다움과 건강을 지닐 수 있었어요.”라고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이봉조는 정훈희의 꽃밭에서, 안개 등 수많은 히트곡을 작곡했습니다. 현미와 이봉조는 밤안개, 애인, 내 마음 그를 찾아 등 히트곡을 합작해내며 최고의 음악적 파트너로 생을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고백하실 “남편 이봉조는 바람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어요. 웬만한 바람은 눈감아줬어요. 가정을 지켜야 하니까요. 오늘이 중요하지, 어제가 중요한 것은 아니에요.”라고 입을 열었습니다.

현미는 “참 매력이 있어요. 작곡하고 연주하고 잘생겼어요. 그렇게 잘난 사람이었어요. 또 여자가 좋다는데 안 넘어갈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지금까지도 방송국 다니면서 이봉조와 바람피운 여자들을 알고 있어요. 지금도 모른 척하죠.”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현미는 “이봉조가 정훈희를 항상 바람막이로 이용했어요. 그래서 오해를 정말 많이 받았어요. 훈희가 고생을 많이 했죠.”라고 밝혔습니다. 이에 정훈희는 “나는 언니가 전화 왔을 때, 선생님을 어떻게 배신하냐? 언니가 알아봐라.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왜 선생님하고 사냐?이혼하라.라고도 말했어요.”라고 털어놨습니다. 또 정훈희는 “지금 생각해 보니까 못 할 말 했다 싶어요. 살아보니까 이혼이 쉽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외도를 고자질하는 것은 부부 사이를 헤치는 속셈이죠.”라고 덧붙였습니다.

유부남이었던 남편

현미는 이봉조의 프러포즈를 받고 첫 아이를 임신했습니다. 그런데 임신 8개월째 한 여자가 그녀를 찾아왔습니다. 자신이 이봉조 아내라는 여자의 말에 따르면 이봉조는 이미 결혼 4년 차, 두 아이의 아빠였습니다. 현미는 “이봉조가 일단 아이를 낳고 본인이 해결하겠다라고 하더라고요. 단칸방을 얻어 나와 살림을 차리기 시작했어요. 거짓 이혼서류를 만들어 왔어요. 남자 하나로 인해 여자 둘 다 희생했던 거죠.”라고 당시 심경을 전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서로의 존재를 알고도 세 사람의 두 집 살림은 계속되다가 1974년 현미와 이봉조는 별거를 하게 됩니다. 그 원인 또한 황당했는데 바로 이봉주가 또 다른 인물과 외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이봉조는 가수 김추자와 함께 일본 여행을 떠났다가 현미로부터 결별 선언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때 언론에 발표된 것으로 두 사람은 완전한 이혼이 아니라 별거로 공식 발표를 합니다.

현미는 당시를 떠올리며 "남편에게 헤어지자고 했더니그럴 바엔 여기서 세상을 뜨자`라며 날붙이를 가지고 들어왔어요. 이러는데 어떻게 집문서를 가지고 나오겠어요. 어떡하면 도망갈 수 있을지만 고민했을 정도로 무서운 위협을 당했어요. 아파트 정문에서 숨어 있기도 했어요.”라고 전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언론에서는 이봉조의 본부인을 현미 씨로 알고 있었습니다. 본처가 전혀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시기, 적극적으로 도와준 엄앵란

이 당시 현미를 도와주었던 사람이 바로 엄앵란이었습니다. 엄앵란의 남편 신성일이 회고하길 “60년대 이봉조가 유부남인지 모르고 사랑에 빠진 현미는 이봉조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둘이나 낳고 키웠어요. 하지만 어느 날 이봉조의 본처가 늦둥이를 낳았다는 소식이 날아들었고, 현미는 그 길로 짐을 싸서 초등학교 6학년, 4학년인 두 아이와 함께 아내 엄앵란의 집으로 찾아왔어요.

남자에게 버림받고 빈털터리가 된 현미를 안쓰럽게 여긴 아내가 은행에서 자신의 신용으로 대출받아, 현미에게 같은 단지 내 아파트를 마련해줬어요.”라고 증언했습니다. 신성일은 이어 “나는 평소 이봉조가 진주 출신의 사나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현미와 자식들을 못 본 채 하는 그의 처신은 사나이답지 못했어요. 자기 말대로 본처와 헤어지든가 아니면 현미와 아이들이 먹고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했어요.

아무리 형이라고 불렀지만 두고만 볼 수 없었어요. 어느 모임에서 이봉조와 마주쳤어요. 나는 눈을 부릅뜨고 이봉조를 노려봤어요. 형 왜 그렇게 책임을 못 져? 동생한테 맞아봐야 정신 차리겠어? 그가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어요. 이봉조는 그 사건 후 나만 보면 피해 다녔어요. 그리고 얼마 후인 87년 8월 세상을 뜨고 말았죠. 나 역시 현미에게 애처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젊은 시절부터 남자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까…. 지금도 가방 하나와 두 아이를 데리고 온 그녀의 모습이 잊히지 않아요.”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영원한 사랑

이봉조와 현미는 다시 재결합을 약속했지만, 심장마비로 이봉조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봉조가 별세한 이후에 본처 n씨가 전격적으로 언론과 인터뷰를 했고 현미와 두 집 살림이었다는 사실 드러나게 됩니다. 현미는 “시간이 지나 자신을 속였던 남편을 원망하지만 그래도 후회해요.

살면서 ‘이봉조 아내’라는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어요. 이제 와서 나는 영원히 운명적인 부부였다고 실감하고 있어요.”라고 밝혔습니다. 다음 생애에도 이봉조를 만나겠냐?라는 질문에 현미는 망설임 없이 “만나야죠.”라고 답해 이봉조에 대한 여전한 사랑을 과시했습니다. 그랬던 현미는 띠동갑 연하 연인과 무려 8년째 만남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사랑 때문에 아픔을 겪었던 그녀가 남자친구와 함께 계속해서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길 바라며 건강한 모습으로 오래오래 활동 이어 나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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