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우먼 이경애는 세 번째 결혼 후 하던 사업이 쫄딱 망해 결국…” 그녀의 안타까운 근황을 확인해 보세요.

1984년 데뷔와 동시에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끌며 센세이션한 인기를 얻었던 개그우먼 이경애는 20살의 나이로 방송에 데뷔해 그해 대상까지 받으며, 말 그대로 승승장구했었습니다. 그녀가 말만하면 유행어가 되었고, 그녀가 떴다 하면 대박이 터졌던 코너들로 평범했던 스무 살의 소녀가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때를 그녀가 고백하길 “내가 KBS 개그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받으면서 하루아침에 그냥 스타가 되었다. 다음 날 우리 집에서 방송국까지 버스를 타고 가려는데, 벌써 버스가 시끄러워서 못 할 정도로 난리가 났었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방송국 여기저기에서 나를 다 부르더라. 코너마다, 라디오마다, 이것저것 다 했는데, 그때는 수입이 정말 괜찮았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단순히 웃기는 것을 넘어, 삶을 녹여 내렸던 이경애의 개그는 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고 그녀 역시 연예인이 천직인 듯, 데뷔 후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그 이유는 누구보다 성공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그저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오늘은 이경애. 그녀의 가슴 아픈 인생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이경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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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경애는 훗날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를 호강시켜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부터 가난으로 인해 지독한 현실을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뱃사람이었던 아버지는 수입의 대부분을 술값으로 써버렸습니다.

그래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건 어머니였는데, 당시 어머니는 자신의 키보다 더 큰 행상을 머리에 이고 다니며 힘겹게 오남매를 키워주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그녀의 아버지가 집안에 생활비도 주지 않으면서 어머니가 장사를 하는 게 싫다며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어린 이경에는 “우리 아버지는 도대체 왜 저럴까? 그럼 우리 형제들은 굶어서 하늘로 가라는 말인가?”싶어 당시 아버지로 인해 많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행상을 해야 했고 또한 당시 계절마다 다른 장사를 하는데, 겨울이면 추우니까 고기가 잘 팔린다고 마장동까지 가서 고기를 떼다가, 그곳부터 걸어오면서 하루종일 고기를 팔았습니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면 봄에는 자두가 나오니까 자두를 따다 팔곤 했습니다.

연예인을 선택한 계기

그녀의 나이 고작 14살 때, 어린 소녀가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모진 시련들이 들여오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중학교 때 어머니가 정말 고생해서 한 푼, 한 푼 모아 몇 년에 걸쳐 힘겹게 모은 돈으로 당시 70만 원짜리 집을 겨우 장만했는데, 단 1년 만에 아버지가 노름을 하면서 한 방에 말아먹자 결국 이때 어머니의 인생에서 큰 절망이 왔으며 이후 모든 걸 다 버리고 정신마저 이상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어머니가 정신이 나간 뒤로는 미친 사람처럼 허구한 날 집을 나가버렸고 그럴 때마다 어린 이경애가 괜히 느낌이 이상해서 뒷산에 가보면,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는 해서는 안 될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린 이경애는 어머니를 붙잡고 “엄마 이러지 마! 내가 정말 성공해서 호강시켜줄 테니까. 제발 이러지 마!”라며 엄마 앞에서 울며 빌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너 때문에 내가 생을 마감하지도 못한다.”라며 울면서 비는 어린 딸을 마구 혼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녀가 두들겨 맞으면서도 엄마를 간신히 집으로 데려다 놓았지만, 다음날 자고 일어나면 엄마가 또 사라졌다고 합니다.

당시 어린 이경에는 매일 매일이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또 누군가가 저쪽 개천가에서 꽃을 꽂고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하면 그게 엄마이었기에, 또 가서 엄마를 붙들고 집으로 데려다 놓아야만 했습니다.

또 한 번은 당시 ‘쥐 잡는 날’이라고 해서 분홍색 쥐약을 줬는데, 이번에는 어머니가 그 쥐약 마저 드시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이경애가 너무 놀라 길에 있는 나무 트럭 아저씨를 붙잡고, “제발 우리 엄마 좀 병원에 데려달라.”라고 애원하자 다행히 아저씨가 병원에 데려다 주면서 위를 세척한 뒤 어머니가 겨우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일로 어머니의 간, 위, 심장이 다 나빠져 이후부터는 어머니가 아무것도 못한 채 그냥 병원에 가만히 누워만 있으면서 병은 갈수록 깊어졌습니다. 그러자 그때 이경애가 깨달은 게 ‘성공해야 되는구나! 돈이 없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구나! 내가 뭘 하든 성공해야 되는구나.’이였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공부는 안 되지만 그때 인생을 설계한 게, ‘그래. 연예인이 되자! 연예인은 나이도 공부도 상관없으니까. 이건 마음만 먹으면 될 수 있겠다.’싶어 그때부터 연예인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연예인을 선택했다기보다 당시로서는 연예인 밖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연예인의 꿈을 꿨으나 훗날 그녀가 20살의 나이로 개그 콘테스트에 나가, 대상을 타기 전까지는 정말 사춘기도 없이 혹독한 시간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특히 그녀가 중,고등학교 때는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로 돈을 벌어서 학비를 대고 집안의 가장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한 번은 그녀가 고등학교 때 여느 때처럼 돈 되는 아르바이트를 찾던 중 수세미 파는 아르바이트가 짭짤하다는 얘기를 듣고, 큰 가방에 수세미를 가득 넣어 당시 초등학생 동생의 손을 맞잡고 아파트에 들어서는 순간 경비 아저씨가 두 사람을 향해 “야! 이리 와.”하고 부르자 결국 경비실로 잡혀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때 수세미 하나를 1천 원에 팔면 300원이 남는 장사라, 이경애와 동생은 부품 꿈을 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경비 아저씨가 하는 말이 “너희 이런 데 잡상인 출입금지인 거 모르냐. 그리고 만약 잡상인이 오면 그 물건들 다 뺏는 거 알아? 몰라?”라며 수세미가 가득 든 가방을 뺏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이경애 머릿속에는 수세미 값이 떠올랐고 아픈 엄마 도와주려고 했던 일인데 ‘여기서 이걸 빼앗기면 장사고 뭐고 그야말로 큰일이다’라고 생각들어 동생하고 같이 경비 아저씨에게 “잘못했다.”라며 무릎을 꿇고 “정말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4시간을 빌렸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토요일 학교 마치고 오후 4시에 붙잡혀서 저녁 8시가 될 때까지 종일 울면서 비는데 그때 어린 이경애의 머릿속으로는 “세상에 정말 저렇게 지독해도, 지독해도 저렇게 지독한 어른도 있구나” 하고 처음 깨달았습니다. “자기 자식 같은 애들이 빌면 대충 혼내주다가 줄 법도 한데, 무려 4시간에 울면서 빌자 겨우 돌려받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얼마나 울었는지 동생과 이경애 눈이 퉁퉁 부었고, 결국 그걸 돌려받고 집으로 가려는데 그런데 그 순간 오기가 생겨 그녀가 동생에게 “우리 지금 4시간이나 손해 봤어. 여기서부터 집까지 걸어가면서 다 팔고 가자.”라며 초등학생인 동생과 남은 수세미를 팔면서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아픈 엄마를 대신해서 집안의 가장이 되어야 했던 그녀는 앞서 얘기한 대로 어떻게든 빨리 연예인이 되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정식 데뷔와 결혼

그러다 1984년 KBS 개그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받으며 마침내 정식 데뷔하게 됩니다. 당시 그녀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냐 하면, 1980년대 후반 최양락이 당시 단역 하던 팽현숙을 개그 프로그램 코너 주역으로 밀어주려고 할 때, 담당 PD가 평현숙의 연기력이 별로라는 이유로 미덥지 못한 반응을 보이자, 이때 최양락이 했던 말이 “김미화랑 이경애는 처음부터 연기를 잘하는 스타였냐? 현숙이도 밀어주면 잘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당시 김미화와 이경애가 최고의 개그우먼이었기에 최양락은 그렇게 말했던 것이었고 그만큼 이경애는 80년대 최고의 개그우먼이었습니다.

그러다 그녀의 나이 27살 때 같은 동네 한 살 오빠를 만나서 사랑에 빠져 1990년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성격 차이의 이유로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당시만 하더라도 여자 연예인에게 있어 이혼이란 흔치 않은 일이다 보니 대중들의 비난과 같은 동료들까지도 그녀의 이혼을 들고 손가락질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유일하게 그녀의 곁을 지켜준 동료가 바로 임하룡이었다고 했습니다.

재혼 그리고 외도

아무튼 그렇게 첫 번째 결혼이 허무하게 끝나고, 1997년 카페에서 우연히 두 번째 남편을 만나게 되는데 당시 두 사람은 각자 한 차례씩 이혼의 아픔을 겪은 상태로 서로를 더욱더 이해하고 아껴주며 두 사람은 2002년 결혼까지 골인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간이 급속도로 안 좋아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간경화까지 오게 되었고 간이식을 받게 됩니다. 그래도 이때 남편의 간이식을 그의 전 부인과 사이에서 낳은 큰 아들이 해주면서 남편은 다행히도 무사히 수술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남편이 살아나자, 당시 그녀는 너무 고마운 마음에 “내 옆에서 다른 여자를 사랑해도 이해할 정도로 그저 고맙고 다행스러웠습니다.

그런데 한때 그녀는 남편과 이혼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 그녀가 직접 고백하길 “남편이 수술로 살아난 뒤 다행이긴 했는데…. 그런데 이때부터 여자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한 번은 내가 여행을 가면서 신용카드를 다 놓고 갔는데 다녀와서 보니 카드가 없어져서 남편에게 물어봤다.

남편은 대접해야 해서 선배와 주점에 갔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거기서 선배가 술에 취해 선배와 둘이서 호텔에서 잤다고 했다. 하지만 알고보니 당시 그 주점에서 몇백만 원을 쓰고 또 호텔 vip 룸 두 개를 빌렸더라. 그래서 그때 내가 너무 화가 나서 ‘어떻게 아내의 카드를 이런 데서 쓰냐? 그리고 방이 두 개라는 건 여자가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냐?’라며 막 따지자 남편은 도저히 기억이 안 난다고 하더라. 이때 나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짐을 싸서 일본에 있는 언니네 집으로 가서 잠수를 탔다.

그랬더니 며칠 뒤 남편이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빌더라. 그런데 이때 남편이 내게 하는 말이 ‘당신은 아이가 없으면 언제든지 이런 식으로 떠날 것 같다.’며 갑자기 아이를 갖자고 했다. 그리고 아이만 낳으면 평생 충성하면서 살겠다고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꿈에 그리던 딸 희서

하지만 남편의 바람과는 달리 당시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임신불능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경애는 포기하지 않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 인공수정을 결심하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딸 희서를 얻게 됩니다.

심지어 이때 남편의 나이는 50대 중반으로 그렇게 귀한 딸을 늦게 얻은 만큼 앞으로 펼쳐질 두 사람의 인생길에는 그저 행복한 시간들로 가득 채워질 거라 생각했었습니다.

남편의 죽음

하지만 이런 행복도 잠시, 당시 이경애는 병원으로부터 청천병력 같은 암 선고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당시 맹장이 특이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나온 오진으로 ‘맹장염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다시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또 이번에는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웠다가 뒤에서 오던 차가 졸음운전으로 이경애를 받아버리는 참혹한 사고가 나고 말았습니다. 당시 이 사고는 그녀의 왼쪽 무릎 십자 인대가 파열되고 관절이 탈골되는 대형 사고이었으며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하게 심각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교통사고가 아니라 남편이었는데 당시 아내의 사고가 걱정되어 남편이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한 결과, 원래 좋지 않던 간이 다시 급속도로 나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때 그녀가 교통사고의 재활치료도 끝까지 못하고 남편의 병간호에 매달리게 되는데 그렇다 보니 당시 이경애의 몸 오른쪽이 마비까지 오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남편과 본인의 병원비를 위해 방송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2005년에는 동료 이경래의 부탁으로 행사를 갔다가 하필 감전까지 당하면서 이로인해 공중으로 튀어오르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본인의 몸도 성하지 않은데 오로지 남편의 건강과 병원비를 위해 일을 해야 했고, 이런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딸 희서가 유치원을 졸업할 무렵, 남편은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페트병 쓰레기를 모으는 이유

그렇게 남편과 사별한 뒤 딸 희서와 살아가던 중 방송일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그녀는 떡볶이 가게를 차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결국 망해버리자 당시 그녀는 복잡한 마음과 우울한 마음에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가게가 망한 후 우울증인지 모르겠는데 비상식량이 있어야 한다는 두려움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전쟁나면 비상식량을 숨겨 놓으려고 버려진 페트병 100개를 목표로 모으고 있다. 그리고 내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면 정말 이제는 쌀도 없어서 어떻하나. 나는 괜찮은데 우리 딸 먹을 게 없어지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까지 오더라. 그래서 무슨 일이 있으면 슈퍼나 이런 데 가서 쌀을 사다가 모으기 시작한 거다. 특히 작년에는 전염병까지 돌아서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페트병은 안 버렸으면 좋겠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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