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없이 살았습니다.” 시한부 인생 박칼린 투석 치료 포기 후 결국…

우리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뮤지컬인이라 불리는 박칼린은 최근 방송활동은 많이 없는 편이지만 꾸준히 공연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녀는 예능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에서 합창단을 맡게 된 이후부터 최고의 화제의 인물 중 하나였으며 방송 이후 수많은 타 방송 광고에 출연하면서 승승장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박칼린은 자신이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고 밝혀 엄청난 화제가 되었습니다.

금쪽 상담소에 출연해 고민이 없다라며 밝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탄탄대로의 길만 걸어왔을 것 같은 박칼린의 삶을 들여다보겠습니다.

박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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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칼린의 인기

1967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박칼린은 1989년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하여 입상하면서 자신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사운드 오브 뮤직, 렌트, 시카고, 미녀와 야수, 아이다, 한여름 밤의 꿈 등의 음악감독을 맡게 됩니다.

특히 한여름 밤의 꿈은 연출 및 음악감독을 동시에 맡았던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2010년 예능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에 출전하여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게 됩니다. 그 이전까지 음악감독 박칼린이 관련 분야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했다면 이후부터는 전국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박칼린의 부모님

박칼린의 집안은 원래 부유했습니다. 가난했던 시대, 박칼린 아버지는 미국 유학을 다녀올 정도였습니다. “전쟁 직후 부모님은 유복한 환경에서 사셨지만, 저희한테 따로 재산이 온 건 없어요.” “어머니는 리투아니아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오셨는데 처음에 아버지를 놀리기 위해 한국의 전통 민요 아리랑을 불렀죠. 그것이 두 분의 사랑이 시작이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백인 여자가 아리랑을 불렀다고 박칼린 아버지 박근실이 여기에 감동했을까요? 리투아니아는 사실 우리나라와 굉장히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수없이 많이 침략당한 역사가 있기에 우리의 한과 비슷한 정서가 있습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전쟁을 직접 경험했기에 동질성이 강하지 않았을까 예측됩니다. 아무튼 두 사람 사이에서는 박칼린을 비롯하여 3명의 딸이 태어납니다. 그런데 박칼린 아버지가 집안으로부터 결혼 허락받는 방식은 독특했다고 합니다.

당시 결혼 허락도 받지 않고 무작정 결혼하고 아이부터 낳고 본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부모님으로부터 결혼 허락도 받지 않고 결혼부터 해서 우리 세 자매를 낳으셨습니다. 나중에 한국에 귀국할 때도 아버지는 일이 있어서 미국에 남아 3개월 뒤에 들어오셨고 어머니와 세 자매만 먼저 한국으로 귀국했습니다. “어머니랑 우리 자매들과 함께 먼저 시댁 집안 어른들께 인사를 드렸는데 이를 본 할머니는 두 달을 들어놓고 말았어요.” 당시 박칼린 어머니가 얼마나 막막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박칼린 어머니의 성격 역시 만만치가 않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전쟁과 고난과 이민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을 테니, 한국의 고된 시집살이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던 것입니다.

어린시절

이후 박칼린은 부산 사투리를 배우며 보통의 한국 어린이처럼 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혼혈인 박칼린은 외모가 백인이었기에 곧이어 정체성에 혼란을 겪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8살 무렵 놀이터에서 모래놀이를 하던 와중 한 중학생이 다가와 “너희 나라로 가버려.”라고 했고 이에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박칼린의 우는 모습을 발견한 아버지는 “칼린! 여기도 내 나라고, 미국도 내 나라야. 그리고 모든 나라가 너의 나라란다.”라고 하시고는 따라 울기 시작했습니다.

겨우 8살 때 이런 말을 들은 박칼린이나 어린 딸 앞에서 대성통곡을 한 박칼린 아버지나 큰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겠습니다. 또한 박칼린 부모님은 어린 박칼린에게 오히려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려고 노력합니다.

박칼린은 이러한 경험을 제외하고는 무척 좋은 환경에서 성장합니다. 부유한 아버지와 재능 많은 어머니가 그녀를 한껏 북돋아 주었습니다. 박칼린은 8살 때부터 화교 학교에 다니면서 중국어를 배우기도 합니다.

10살 이전에 언어를 배우면 배우는 속도가 월등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녀의 어머니가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박칼린은 11살 때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가 언니의 권유로 첼로를 배우게 됩니다.

첼로는 박칼린이 음악에 눈을 뜨는 기회를 제공했고 한국에 사는 동안 영어를 잊었던 그녀가 다시금 미국에 정착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연히 첼로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서서히 실력이 쌓이자, 학교 오케스트라에 발탁되었고 연주에 참여하는 날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연극배우 활동

어느 날 연극부와 합동 공연하면서 그녀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옵니다. 연극반 담임이었던 선생님이 조용히 앉아 첼로를 연주하는 그녀를 눈여겨봤고 연극에 투입한 것이었습니다. 매사의 진심인 박칼린은 연극반 활동을 하며 고교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기도 하는 등 어릴 때부터 본인의 재능을 뽐냅니다.

이후 대학은 다시 미국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한국으로 넘어와 서울대학교 국악과를 졸업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연극배우가 되는데 당시 상황은 본인이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대통령상을 받았던 어릴 적의 추억이 그녀를 연극판으로 이끌었다고 추측할 뿐입니다.

뮤지컬 음악 감독

연극배우로 활동을 이어가던 그녀가 어떻게 뮤지컬 음악 감독으로 큰 성공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당시 한국 뮤지컬계는 막 시작하는 단계였고 젊은 나이에 실력만 있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분야였기 때문입니다. 연극에 음악을 접하는 것은 뮤지컬처럼 큰 역할이 아니었고, 또한 우리나라의 가난한 연극판에 경우에 전문적인 음악인을 쓸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연극배우 중에 미국 대학과 서울대 석사 출신의 음악 학도라는 타이틀은 자연스럽게 박칼린에게 감독의 자리를 맡길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맡은 연극 음악 감독 역할을 훌륭히 해낸 그녀의 역할은 점점 더 커졌습니다. 결국 박칼린은 20대 초반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또한 시대적인 흐름을 잘 타고 나면서 크게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박칼린 때문에 좀 독특한 현상이 생겼습니다. 바로 초창기 유명한 뮤지컬 감독들은 전부 여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여권이 강한 해외에서도 한국의 상황은 굉장히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박칼린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1990년대 뮤지컬계에서 명성과 실력을 쌓은 그녀는 2010년 예능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에 출연하여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당시 대중들은 박칼린의 뮤지컬 지휘 실력보다는 오히려 그녀의 독특한 지도력에 더 열광했습니다.

시한부 인생과 투석을 포기한 이유

그러던 어느 날 피로 때문에 병원을 찾은 그녀는 양쪽 신장이 모두 손상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선 신장 이식을 권고받았지만, 평생 투석해야 한다는 말에 치료를 포기했습니다.

양쪽 신장에 다 문제가 있어서 4~5년 정도밖에 살 수 없다.라는 말을 듣게 되지만, 그녀는 굉장히 덤덤하게 받아들입니다. “만약 5분 뒤에 생을 마감한다 해도 후회가 없어요. 진짜 저는 후회 없이 살았어요. 남들이 나만큼만 행복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전쟁도 없을 것 같아요.

제가 가진 에너지를 다 뿌리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 가도 여한이 없어요.” 지금 당장 끝나도 여한이 없는 삶이라 확실히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박칼린답습니다.

지난 2010년대 당시 고백하길, 불과 4~5년으로 시한부의 삶을 의미했는데, 현재까지 건강하게 사는 이유는 박칼린 특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현재 삶에 최선을 다하는 에너지 넘치는 삶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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