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희 잘 사는 줄 알았더니… 집 경매에 넘어가고 이민도 못 가는 상황” 최신 근황을 확인해 보세요.

엄청난 미인이나 엄청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을 보면 참 부럽습니다. 하늘이 내린 타고난 미모나 재능이 오히려 그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게 됩니다. 뛰어난 미모의 배우 정윤희도 그런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직도 그녀를 궁금해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배우 정윤희에 대해 추억하는 시간을 가져보고 지금까지 알려진 그녀의 근황에 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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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표 미녀 배우

정윤희는 1970년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미녀 배우입니다. 장미희, 유지인과 더불어 19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정윤희는 트로이카 중 가장 아름다운 외모로 평가받았고 당시 많은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서로 누가 더 예쁜지 입씨름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단군 이래 최고의 미녀라는 말을 종종 들었고, 해외에도 유명해서 그녀가 일본에 갔을 때는 일본 영화인 한 사람은 “일본 인류 여배우 100명을 합쳐도 정윤희의 매력엔 못 당한다.”라고 하였고, 홍콩스타 성룡은 1980년대 초 정윤희를 짝사랑해 한국을 수시로 방문했으며, 정윤희의 아시아 최고의 미녀라는 수식어가 과장이 아니라고 합니다.

정윤희 외모의 특징은 순수하면서도 관능미가 넘치는 얼굴이라는 것과 성형이나 시술이 전혀 없었던 시대라 자연 그대로의 미인이 갖는 천연의 아름다움은 요즘 미인들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배우로 전향

정윤희는 1954년생으로 경상남도 충무시에서 태어났는데 유년기에는 부산으로 이사를 하여서 그곳에서 초중고 시절을 보냈습니다. 혜화여고 시절부터 정윤희는 외모로 이름을 날렸다고 합니다. 정윤희의 어릴 때 꿈은 피아니스트였는데 그래서 친구와 함께 같은 대학에 응시했습니다. 친구는 S대학 음대에 붙었지만 정윤희는 떨어졌습니다.

그 친구에게 경쟁심을 가진 정윤희는 그 친구의 1년 후배가 되기 싫어 미술로 진로를 바꾸었습니다. 재수 시절 명동에서 미술학원에 다녔는데 명동 일대에서 정윤희는 부산 미니스커트로 불리며 여기서도 외모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즉, 서울도 접수해버린 것입니다. 정윤희는 당시 생활비가 부족해졌고 서울에 올라와서 보니 자기의 외모가 전국구임을 알게 되어 배우로 장래 희망을 바꿉니다.

그래서 그녀가 첫 번째로 오디션에 응시한 영화가 1974년 최고 흥행 영화로 유명한 별들의 고향입니다. 그러나 얼굴은 예쁜데 연기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여주인공 심사에서 탈락하게 됩니다.

전국구 인기 스타

그러다가 이경태 감독의 눈에 들어 1975년 영화 욕망으로 데뷔하였으나 흥행에 실패했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영화로 김지미, 윤정희가 거쳐 간 청춘극장의 주연으로 발탁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청춘극장도 실패하였으나, 이전에 유명 여배우였던 김지미, 윤정희의 배역을 맡았다는 점으로 인해 그녀의 지명도가 상승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해태제과와의 광고 모델 자리를 차지하며 그녀의 얼굴이 더욱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77년 장미희와 함께 주연을 맡은 드라마 청실홍실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정윤희는 전국구 인기 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시청률이 무려 70%이었으며 이 드라마에서 전원주가 정윤희의 엄마 역할을 맡았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워낙 순수해서 드라마에 나오는 배역들에 몰입해서 진짜로 착각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전원주에게 사람들은 “아니, 딸이 엄마를 하나도 안 닮았는데 어떻게 그런 예쁜 딸을 낳았어요?”라고 물어봤다고 합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정윤희의 세련된 외모가 주목받으면서 그 해 가장 예쁜 연예인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또한 이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같은 해에 가수로 데뷔하기도 합니다. 1집 앨범인 목마른 소녀가 순식간에 3만 장이 판매되었습니다. 이후 1978년 호스티스 소재 영화인 꽃순이를 아시나요에 출연 그리고 나는 77번 아가씨의 주연을 맡아 흥행 성공을 끌어냈습니다. 하지만 이 무렵까지만 해도 연기력이 부족하다고 종종 까였으며 그 때문에말뚝이라는 굴욕스러운 별명이 붙기도 했습니다.

당시 정윤희는 외모로 주목받았지만, 연기력으로 주목받던장미희`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졌다고 합니다. 1979년에는 1년 만에 6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그중 무려 4편의 영화를 성공시키는 저력을 보여줬습니다. 이후 1980년대에 들어와 드라마에서도 계속 활동하게 됩니다. 노출 빈도가 있는 호스티스 소재 영화들부터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멜로물을 오가며, 계속해서 인기스타로 승승장구합니다.

연기 인생의 전환점

그리고 드디어 정진우 감독을 만나 연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정진우 감독의 새 시리즈를 통해 대중들에게 연기력으로 재각인되었습니다. 정윤희를 대표하는 영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에서 대종상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하면서 연기력 면에서도 인정받게 됩니다.

이후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로 또다시 성공 연이어 대종상 여우주연상과 백상 예술대상 최우수 여자연기상 수상하게 됩니다.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이 영화는 두 남녀 주연배우가 그 당시 유례가 없던 수중촬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몸이 가라앉지 않으니 발목에 무거운 납추를 달고 촬영을 진행하였고 두 사람이 물속에서 큰일을 당할 뻔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정윤희는 그냥 얼굴만 예쁜 배우가 아니라, 몸을 사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연기를 해서 그 결실로 대종상을 받기도 한 것입니다.

끊임없는 루머

그러나 그녀는 10여 년의 활동 중에 끊임없이 루머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워낙 순수해서 극중 인물과 현실 인물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짙었기 때문에 그런 루머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 웃어 넘길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는 워낙 순수한 시대인지라 정윤희에게 더 치명적이었고 가슴에 큰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연예계로 돌아오지 않는 요인이 된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남자와 동거하고 있다는 동거설.
유명 제과 사장과 동거하다 광고에 뽑혔다는 것이라는 소문이며 당시 해태제과 광고를 거의 다 도맡아 해서 이런 소문이 난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아이가 있다는 애 엄마설.
이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한 기자는 정윤희랑 친한 여배우에게 “혹시 정윤희와 같이 목욕탕에 간 적이 없느냐?”라고 물어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배우는 “실제로 봤는데 정윤희 몸매는 너무 깨끗하면서도 아름답기까지 하다.”라며 도저히 아이를 낳은 여자에게 볼 수 없는 몸매라고 오히려 그런 소문에 대해 자신이 더 펄펄 뛰며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세 번째, 술집 여자라는 호스티스설.
고등학교를 마치지 않고 술집을 전전하다 연예계로 데뷔했다는 소문으로, 혜화여고를 나왔다는 건, 너무나 많은 증인이 있어서 말도 안 되었고 심지어는 술집에서 정윤희랑 술을 같이 먹었다는 사람까지 등장했지만, 정윤희가 술집 여자 역을 많이 맡았기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입니다.

네 번째, 미남 배우와 염문설.
60년대 트로이카의 상대 남자배우는 신성일이었다면, 70년대 트로이카의 상대 남자배우는 이영하였습니다. 영화 벌레먹은 장미 등 여러 영화를 이영하와 찍었습니다. 나이트클럽까지 연장된 한 회식 자리에서 두 사람이 춤을 춘 것을 두고 둘의 열애설이 확장되었습니다. 당시 한 기사에 두 사람은 나이트클럽에서 밤새 춤을 추고 뜨거운 사이로 발전했다라는 기사가 시선을 끌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윤희가 실제로 춤을 좋아하고 잘 췄고, 더구나 이영하도 보통 춤꾼이 아니어서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이 서로 잘 통했을 것 같다고는 하는데, 나중에 이영하에게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니 이영하 폭탄발언을 합니다. “트로이카 중 나의 이상형은 정윤희다. 청순하고 해맑은 이미지가 딱 내 스타일이라 좋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갔다.”

신성일에게 손찌검 당한 사건

그러나 이런 것들은 루머에 불과했지만 실제로 이런 치욕도 겪었습니다. 신성일이 정윤희에게 따귀를 날린 적이 있었습니다. 신성일 회고록에 수록된 이야기입니다. 어느 영화에서 신성일과 연기할 때 한 장면을 촬영하고 다른 장소로 이동하려던 참에 시간이 지체되자, 정윤희는 다른 일정으로 시간이 늦었으니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 장면을 못 찍으면 영화사가 곤란한 상황이라 현장 분위기가 험악해졌습니다. 제작부장이 정윤희에게 손찌검을 하려 하자, 신성일이 이를 무마하려고 본인이 나서서 따귀를 때린 것입니다. 이 당시 여배우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간통 그리고 결혼

당대 최고의 스타로 살아가던 1984년 8월 정윤희는 간통 혐의로 고소당해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고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습니다. 중앙건설 조규영 회장을 지인의 소개로 만났는데 그 당시 그는 유부남이었습니다. 부인이 조규영을 간통죄로 고소해서 두 사람이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조규형이 아내에게 억대의 돈을 주고 합의를 해서 두 사람은 풀려났고, 정윤희는 풀려난 직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연기 생활 10년 만에 공인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무조건 죄송하다. 깊이 사죄한다.” 그리고 조규영은 아내와 이혼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그해 1984년 12월 24일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혼하자마자 바로 결혼식을 올린 거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사건이 터졌을 때 당분간 쉬고 싶다고 하더니 결혼 후 영원히 은퇴를 해버렸습니다. 조규영에 대해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그를 좋아한다. 그 사람의 무엇이 나를 끌어 잡아당긴다. 모든 것에 대해 나를 리드한다.” 전처와의 사이에서 난 자녀 1남 1녀가 있으며 정윤희가 맡게 되었고 당시 자녀들의 나이가 1~2살 정도였기 때문에 사실상 거의 처음부터 정윤희가 다 키운 셈입니다. 그리고 시어머니까지 극진하게 모셨으며 결혼과 동시에 연예계를 완전히 떠난 채 방송 출연을 한사코 거절해 왔습니다.

1993년 남편 회사 중앙산업의 가구 브랜드 TV 광고 모델로 활동한 적이 있으며 여전히 미모를 자랑합니다. 정윤희는 결혼 5년 후 친아들을 낳았고, 2011년 친아들이 유학 도중 약 중독으로 인한 심정지 사망으로 화제가 되어 뉴스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최근 정윤희 근황

그리고 드디어 2013년, 나이 60살 되어 정윤희의 근황이 포착되었습니다. 이 당시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에 거주했는데, 일반인과 별반 다르지 않은 수수한 옷차림과 화장도 잘 하지 않은 굉장히 소박한 모습에 놀랄 정도였습니다. 왕년 스타답지 않게 주변 상인들하고도 잘 어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 초창기에는 경제 관념이 없어서 막 쓰기만 했다가, 시댁 식구들한테 혼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골프를 좋아해서 그런지 피부가 더 까무잡잡하다고 거의 집에만 있으며 골프 칠 때만 외출하는 편이라고 합니다. 친아들이 사망한 후 결혼한 딸이 엄마를 위로하고자 집에 자주 방문하고 모녀가 쇼핑도 많이 했다고 하니 생모는 아니지만 친하게 잘 지내는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배우 정윤희 씨가 엄마로서 열심히 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14년 또 한 차례 불행이 닥쳤습니다.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져 법정관리에 들어갔다고 하고, 20년 이상 거주했던 서울의 26억 상당의 집이 경매에 넘어갔습니다. 이후 미국 이민을 준비했지만, 상황이 여의찮아 현재는 경기도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뮤즈 배우 정윤희 씨가 예전에 상처를 잊고 마음의 평화와 행복이 늘 함께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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