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남궁원씨의 최근 충격적인 근황이 전해졌습니다.” 아내와 아들을 위해 밤무대 전전하다가 결국…

1960년대부터 1970년대를 풍미한 너무나 유명한 영화 배우 ‘남궁원’ 씨는 서구적인 마스크와 당시 보기드문 180cm의 큰 키로 ‘한국의 그레고리 팩’이라 불렸습니다. 항상 근사하고 멋진 모습으로만 기억되었습니다.

그의 진짜 인생은 영화 같지만은 않았습니다. 그가 밤무대에 오르고 온갖 파격 영화에 출연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또한 내년이면 우리나라 나이로 구순인데, 최근 20202년 그의 충격적인 근황이 알려져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습니다. 최근 근황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남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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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남궁원 씨는 1934년 경기도 양평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학창 시절에 한국전쟁으로 먹고 살기 어려워 미군 부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는데, 그때 영어를 공부하며 유학을 꿈꿨습니다. 원래 그의 꿈은 외교관이나 대학교수였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유학 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어머니가 자궁암 말기로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돈은 없고 어머니의 치료비를 마련해야 했던 그는 평소 영화배우를 권했던 친구의 아버지인 영화사 사장을 찾아가 큰돈을 받고 영화를 찍기로 약속합니다. 어머니를 위해 그 돈을 치료비로 아낌없이 다 썼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그렇게 운명적으로 영화배우로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영화배우 데뷔와 활약

데뷔 초에는 멋진 외모에 비해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성실한 성격답게 연기를 잘하는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노트에 기록하며 꾸준히 노력해서 1960년대 말에는 연기력에서도 인정받는 배우가 됩니다. 그러나 그는 대형 배우가 될 외모만큼 크게 성장하지는 못했습니다.

한국적인 남자의 외모로 현대극과 시대극을 오가며 영화계를 풍미했던 1927년생 배우 ‘신영균’ 씨와 젊어서는 반항적 청년, 나이 들어서는 고뇌하는 인테리역을 맡으며 주연을 도맡아 하던 1937년생 배우 ‘신성일’ 씨 사이에서 남궁원 씨는 두 사람만큼은 각광받지 못했습니다. 또한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협객영화, 건달영화가 유행하긴 했으나, 남궁원 씨 같은 귀족적인 외모의 배우에겐 어울리지 않는 영화였고, 양복에 잘 어울리는 서구적 외모와 큰 키를 가진 그는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에서는 더욱 자기 자리를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당시 ‘007 시리즈’를 흉내낸 스파이 영화가 잠깐 제작되기도 해서 그가 ‘제임스 본드’를 연상시키는 스파이 역할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충무로의 주류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신상욱 감독과 배우 최은희 씨는 그런 그를 보고 안타까워서 “너는 지금 나온 게 참 아깝다. 한 10~15년 뒤에만 나왔더어도…”라고 할 정도 입니다.

앞서가는 남궁원

그의 인생에서 그는 또 한 번 시대를 너무 앞서간 일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그는 1972년 명동에 ‘빅보이’라는 햄버거 가게가 개업하며 한국 최초의 햄버거 가게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햄버거는 미군 부대에서만 먹을 수 있는 낯선 서양 요리였습니다.

당시 한국인들에게 햄버거가 너무 낯설고 입맛에 맞지 않았던 까닭이 그는 2년도 안 되어 햄버거 사업을 폐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79년이 되서야 ‘롯데리아’가 생기면서 한국의 햄버거 시대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었습니다. 또 한 가지 앞서간 것이 있습니다. 바로 ‘조기유학 붐’을 이끌어낸 장본인입니다. 그러나 조기유학 역시도 그의 인생에 상처뿐인 영광만 안겨주었습니다.

결혼 생활

1967년 남궁원 씨는 해외 촬영을 빈번하게 다니면서 부인 양춘자 씨를 만납니다. 당시 그녀는 스튜어디스였습니다. 상당한 엘리트였고, 영어 실력도 대단했습니다.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노스웨스트 항공사 스튜어디스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해로하고 있는 아내는 어머니를 쏙 닮아 보자마자 운명을 느꼈다고 합니다.

사실 남궁원 씨는 신상옥 감독이 이끄는 신필름에 촉망받는 신인 미남배우로 결혼하기 전에는 영화배우 도금봉 씨 등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결혼에서는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자기의 못다 이룬 꿈을 자녀들이 이루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고, 아이들에게 돈이 아닌 무형의 재산 지식을 물려주고 싶었습니다. 1남2녀 의 세 자녀 모두 유학을 보냈고 엘리트로 성장하였습니다.

돈을 벌어야 해는 이유

남궁원 씨의 본명은 ‘홍경일’ 씨입니다. 아들은 그 유명한 홍정욱 씨입니다. 홍정욱 씨는 기업가이자 전 국회의원으로 대선주자로까지 꼽힌 인물입니다. 중학교 때 유학을 가서 하버드 대학교를 나와서 ‘7막 7장’의 주인공으로 조기유학 붐을 일으키기도 했었습니다. 이렇듯 결혼한 이후에는 한평생 스캔들 하나 없을 정도로 반듯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영화 배우는 많은 사람들의 규범이 돼야 한다는 평소의 소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당대의 여러 배우들과 달리, 밤무대 출입을 안 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자녀들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소신과 전혀 다른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아들 홍정욱 씨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후 학비를 벌기 위해 밤무대 출연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밤무대도 밤무대지만 온갖 파격 영화에도 출연했습니다.

또한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계에서 온 우뢰매 시리즈’나 ‘로봇 태권브이 90’에도 출연한 바 있습니다. 사실, 그는 자존심이 세기로 유명했는데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일했던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또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부인의 병원비 문제입니다. 아들의 미국 유학 뒷바라지를 하던 중 아내가 암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아내의 암 선고

“미국에서 고생을 많이 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2~3년 있으면서 미국에서 암에 걸려 서울로 돌아왔어요.” 아내는 아주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유방암 3기인 유방암 말기로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습니다. 더욱 하늘이 원통했던 것은 어머니가 암에 걸려 돌아가신 나이와 똑같은 46살에 아내도 이 지경이 된 것을 알게 되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하고 더욱 가슴을 졸였습니다.

그때 정말 기가 막힌 일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남궁원 씨가 광고 계약을 한 것이 있었는데, 아내와 함께 광고 촬영을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굉장히 인기를 많이 끌었던 광고였는데 하루 종일 힘든 광고 촬영을 하고 그다음날 수술하러 들어갔습니다. “놀랍게도 아내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어요. 그는 또다시 암으로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은 것처럼 아내를 잃을 수는 없었습니다.” ‘심청이 아버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그는 아내의 옆에 꼭 붙어 지극 정성으로 아내를 간호했습니다.

몸에 좋다는 것은 어떻게든지 구해 먹이면서 이렇게 학비며, 아내의 암 투병으로 돈이 많이 필요했던 그는 자신의 커리어에 어울리지 않는 일도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그때 아들 홍정욱 씨는 아버지가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홍정욱 씨는 지금도 그걸 안타까워한다고 합니다.

그 역시도 암에 걸리다

그런 속앓이가 힘들었던지 그 자신도 암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남궁원 씨는 과거 2002년 대장암 2기 판정을 받았는데 3기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때 가족 외에는 알리지 않았고 대장을 무려 30cm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원래는 수술 후 항암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부인의 설득으로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내도 암에 걸린 적이 있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 방사선 치료나 주사 같은 치료들을 일절 받지 않았다. 그래서 머리카락도 빠지지 않았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남궁원 씨는 이후 “친한 의사에게 물어봤는데 확률은 50대 50이라고 지금은 다행히 완치가 됐다.”라고 말했습니다.

날벼락 같은 일

그 후 2011년 드라마에 출연하기도 하고, 여든이 넘은 2015년에도 ‘ytn 뉴스’에 출연해 인터뷰를 통해 선·후배 배우들을 위해 노력하며 노년을 활기차게 보내는 근황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2019년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아들 홍정욱 씨의 딸이자, 그의 손녀가 합법적이지 않은 제품의 손을 대 난리가 났습니다.

당시 대선 주자에 거론되던 홍정욱 씨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남궁원 씨도 또한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특히, ‘손녀 바보’로 유명한 그였기에 더욱 충격이 컸을 것 같습니다. 남궁원 씨의 자녀들은 모두 조기유학으로 성공한 케이스지만, 요즘 해외 청소년들 사이에 이런 것들이 너무 많이 퍼져서 아직 판단력이 미숙한 청소년들이 조기 유학으로 이런 것들을 배워오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세상이 변해버린 것입니다.

2020년 홍정욱 씨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2019년 큰 딸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당시 중병을 앓고 있었던 아버지, 어머니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충격적인 근황

그러다가 최근 2022년 충격적인 근황이 알려졌습니다. 2015년 ‘ytn 초대석’에 나와 방송 인터뷰를 할 당시만 해도 꼿꼿한 슈트 차림에 여든이 넘었지만, 60대 정도 밖에 보여지지 않는 초절정 미노년 간지를 내뿜었습니다. 그런데 2022년 영화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남궁원 씨는 지난해 장기간 입원 치료를 해오다, 현재는 자택에서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라고 합니다.

한 관계자는 “투병 기간이 2년 정도 됐다. 지난해 고비를 넘기고 퇴원 후에는 통원 치료를 받고 있다.”라고 전했습니다. 지난해 중환 위기를 넘기고 치료에 차도를 보여서 퇴원을 했지만, 남궁원 씨는 현재 건강 상태도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관계자는 “의식도 뚜렷하고 말씀하시는 데도 무리가 없지만, 이동할 때 휠체어에 의지해야 할 만큼 거동이 불편한 상태.”라고 귀띔했습니다.

그렇게 건강하시던 분이 갑자기 휠체어를 타야 할 정도로 악화되시다니 정말 안타깝습니다. 홍정욱 씨 말대로 “고난을 딛고 다시 일어나는 모습을 보이면 아버지도 더욱 살 희망을 가지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요.”라고 했습니다. 부디 하루 빨리 쾌차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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