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 전문 배우 김성원 당뇨병은 이겼지만, 방광암 투병 후 결국…” 그의 안타까운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파리의 연인’, ‘웃어라 동해야’, ‘완전한 사랑’, ‘귀엽거나 미치거나’ 등에서 높으신 분 역할을 주로 맡았던 배우가 있습니다. 바로 김성원입니다. 김성원은 인자한 인상과 좋은 목소리로 배우이자, 성우 활동을 하며 방송계에서 맹활약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던 그가 2010년대 중반부터 보이지 않더니 지난 8월 8일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졌었습니다.

오랫동안 동반자처럼 함께 해 온 당뇨에, 최근 다른 병까지 걸리며 건강이 악화하였다고 합니다. 오늘은 세상을 떠난 故 김성원을 애도하며 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김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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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과거

올해 8월 8일, 성우이자 배우 김성원이 별세했습니다. 김성원은 40년 넘게 지병인 당뇨를 앓아오다, 올해 초 방광암 말기 판정받고 투병하던 중, 향년 86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고인은 1937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지금의 중앙대 연극영화과인 서라벌예대를 다니던 중 1957년 CBS 성우 2기로 데뷔했습니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방송 일을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해군사관학교나 해양대학교 진학을 희망하며 마도로스의 꿈을 꾸었습니다. 하지만 시험에서 낙방하고 고향인 원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오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성우와 배우 데뷔

재수 학원에 등록해 공부하고 있는데, 어느 날 고등학교 때 친구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작품으로 무대에 올렸던 연극 사육신이 경연대회에 출전 작으로 꼽혔다면서, 그때 맡았던 세조 역을 다시 맡아달라고 하였습니다. 친구의 부탁으로 연극에 오른 그는 뛰어난 연기력으로 호평받았고 그 작품을 계기로 서라벌 예술대학교 연극영화과에 특채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재학 중이던 1956년에 CBS 성우로 데뷔했습니다. 80년에는 언론 통폐합으로 자연스럽게 KBS 성우가 되었습니다. 성우가 된 그는 라디오, 드라마 등에 출연했고 TBC 외화 도망자의 리차드 킴블, 석양의 무법자의 투코 역으로 목소리를 알렸습니다. 목소리만큼 멋진 외모와 헌칠한 키를 가졌던 그는 TBC 개국 당시 배우로 스카우트됐습니다.

이후 TBC 사극 드라마 여보 정선달에서 주인공 정선 역을 맡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후 완전한 사랑, 파리의 연인, 귀엽거나 미치거나, 브라보 마이 라이프, 웃어라 동해야 등에서 회장님 또는 사장님 역을 주로 맡아 열연했습니다. 또한 김성원은 뮤지컬 1세대 배우로, 한국 최초 창작 뮤지컬인 살짜기 옵서예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남다른 재테크

그렇게 종횡무진 활약했던 김성원은 활동에 비해 돈을 축적하지는 못했습니다. 버는 돈의 60% 이상은 꼭 선·후배, 동료를 뒷바라지하는 데 썼기 때문입니다. 번 돈을 모을 기회도 많았지만, 손해 보는 경우도 다반사였습니다. 또 사람들을 워낙 잘 믿어서 돈을 빌려주거나 투자하고, 떼이기 일쑤였습니다.

그는 가난했던 시절 초췌한 말로로 늙어가는 연예계 선배들을 보면서 동료와 약속한 게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선대들과는 다르게 살아서 후배들에게 떳떳한 선대가 되자.”라는 다짐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경제관은 뚜렷하게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일단, 노후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해 둬야겠다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돈이 모이면 부동산에도 조금 투자했고, 자신과 부인 명의로 연금보험에도 가입했습니다.

특히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투자했던 제주도 부동산 투자가, 어려울 때마다 효자 노릇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몇 배씩 이익을 남기는 대박은 아니었지만,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주식 투자로는 큰 손해를 보았습니다. 고향이 이북이라 동아 은행 설립 당시 주주로 참여했지만,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큰 손해를 봤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는 주식 투자를 일절 끊었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

또한 그는 연기자로서 외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이유로 든든한 아내가 항상 곁에 있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한 동네에서 나고 자라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함께 다닌 두 사람은 철모르는 중학생 시절부터 연애했을 만큼 조숙했다고 합니다. 당시 아내는 원주 시내에서 꽤 알아주는 미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점찍었다고 해요. 연애편지를 주고받으며 연애를 시작한 건 중학교 때부터 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들한테 좋아한다는 소문을 내면서 사전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아내는 “남편은 고교 시절에 꽤 멋쟁이였어요. 선생님의 눈을 피해 영화도 많이 보러 다녔는데, 남자 주인공 흉내도 무척 잘 냈죠. 공부도 안 하는 사람이 만년필은 꼭 3개를 가슴에 꽂고 다녔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키워온 사랑에도 한 차례 위기가 있었습니다. 아내가 대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부모님께서 소위 잘나간다는 한 남자와 아내의 혼인을 추진했던 것입니다. 사랑 없는 결혼은 결코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아내는 고민 끝에 구체적인 혼담이 오가기 직전 김성원의 품으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1961년 드디어 결혼했고 아내와 사이에 2남 1녀를 두게 됩니다.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

행복하게 살던 두 사람 앞의 시련이 닥쳤습니다. 김성원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었습니다. 김성원은 절친한 후배 탤런트 김세윤의 종합건강검진 소식을 듣고 호기심에서 검진받았습니다. 아무런 이상 증세 없이 찾았던 병원인데 그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담당 의사가 나 대신 아내를 불러 검진 결과를 알려줬습니다.

“당뇨에다 심장, 혈압, 기관지 등 온전한 데가 별로 없었어요. 약도 엄청나게 받아왔더라고요. 그때 내 나이가 30대 중반이었으니 정신적 쇼크가 엄청났지요.” 30대의 젊은 나이에 아무 증상이 없던 그는 당뇨 진단을 받고 크게 충격받았습니다. 연예인 축구, 야구, 볼링팀 단장을 맡을 만큼 건강한 체질이었지만, 바쁜 촬영 스케줄 때문에 제때 식사를 못 하고 폭음과 폭식을 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김성원은 하루에 7끼나 식사했습니다.

한 끼의 양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볶음밥과 울면, 물만두 1인분은 기본이고, 앉은 자리에서 삼겹살 10인분을 먹어 치울 정도였습니다. 또 맥주 1,000cc를 한 번에 마셔버릴 정도의 대주가였습니다. 당시 김성원은 키 175cm의 몸무게 89kg, 허리둘레도 38인치나 됐습니다. 결국, 불규칙적이고 좋지 못했던 그의 식습관이 결국 30대의 젊은 나이에 그를 당뇨로 몰고 간 것이었습니다.

방광암 투병 결국…

의사는 죽을 때까지 평생 갖고 가는 병이니 관리만 잘하면 된다고 그를 다독였습니다. 평생 가져가야 하는 병이라는 데 절망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당뇨와의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좋아하던 술과 담배를 한순간에 끊고, 식단 관리를 철저히 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옆에서 당뇨에 좋다는 음식이란 음식은 다 찾아와서 만들어줬습니다. 그리고 식이요법과 걷기 위주의 운동을 꾸준히 한 결과. 정상 수치를 오랫동안 유지했습니다. 김성원은 당뇨병을 50년간이나 관리해오며 건강 전도사 역할을 했습니다.

당뇨병 관련 봉사활동을 꾸준히 했고 세계 당뇨협회로부터 공로상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담을 담아 당뇨와 친구 하라라는 책을 펴기도 했습니다. 자신처럼 당뇨인들이 건강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건강을 전도하고 자신의 건강 관리에도 신경을 썼던 그였지만 안타깝게도 투병 중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뇨 관리는 50년간 성공적으로 해왔지만 다른 병은 막지 못했습니다. 그는 올해 초 방광암 말기 판정받고 투병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전 따뜻한 배우였기에 그의 비보는 많은 이들을 슬프게 했습니다. 50년간 꾸준한 건강 관리로 정정한 모습을 보였던 그가 결국 병을 이기지 못하고 별세했다는 소식에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고통 없이 그가 편안한 영면에 들기를 바라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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