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노래자랑 MC 김신영 사람들의 선입견으로 인해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칩거 생활했던 상황” 어떤 상황인지 확인해 보세요.

여러분은 혹시 선입견을 가지고 계신가요? 한 배우가 청룡영화 시상식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살다보면 가장 어렵고 무서운 게 ‘편견’ 그리고 ‘선입견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편견을 먼저 깨주시고 선입견의 방패처럼 제 앞에 서주신 박찬욱 감독님을 대신해서 소감을 전하겠습니다.”라고 하며 세계적인 거장 박찬욱 감독의 시상을 대리로 수상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냐면 다름 아닌 코미디언 ‘김신영’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녀는 최근 한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까지 받으며 ‘연기 천재’라는 소리까지 듣자, 이와 관련해 박찬욱 감독이 말하길 “확신을 갖고 캐스팅 했는데 정말 타고났더라. 평생 연기해온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무슨 말을 해도 잘 알아듣고 뉘앙스를 아주 잘 살리며 그녀가 나오는 연기를 볼 때마다 흐뭇하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김신영을 보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선입견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기회를 놓치고 혹은 놓친 줄도 모르며 살아왔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녀도 과거 사람들의 선입견으로 인해 모든 프로그램이 그녀를 다시는 부르지 않고, 친한 동료들조차 비난을 하며 조롱 아닌 조롱을 하자, 결국 집 밖을 나오지 못해 5년간 칩거생활을 해야만 했던 김신영, 그녀의 가슴 아픈 인생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김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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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가난한 어린 시절

1983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신영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실패로 집안이 가난해도 너무 가난해, 당시 이사만 60번을 가고 초등학교 2학년 1학기에만 8번 전학을 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이와 관련해 여러 에피소드가 있는데, 한 번은 판자촌에 살던 시절에 잠을 자는데 꿈에서 누군가가 계속 물을 뿌리길래 “누구야?”하고 벌떡 일어나 봤더니 당시 지붕이 석면 슬레이트였는데 비바람이 불다 보니 지붕이 날아가 그대로 비를 맞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판잣집은 벽이 너무 허술하고 얇다보니 당시 옆집에서 기침만 해도 다 들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옆집에서 부부싸움을 하다가 그날은 심하게 다퉜는지 벽을 뚫고 김신영의 집까지 넘어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집마저도 월세 낼 돈이 없어서 계속 밀리다 보니, 당시 가족들이 짐도 다 못 챙긴 채 결국 야반도주까지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훗날 그녀의 고백에 따르면 “본인이 성공한 뒤에 그때 못 냈던 월세를 직접 찾아가서 전부 갚아드렸다.”라고 했습니다.

이후 그녀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어린 김신영은 한 번은 목포에 사는 외할머니와 살다가, 또 한 번은 경북 청도에 사는 친할머니와도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이때 두 할머니로부터 훗날 그녀의 개인기가 되는 할머니 말투와 사투리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고마운 동네 분들

한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녀가 꿋꿋하게 자랄 수 있었던 건 부족하더라도 할머니의 사랑과 특히 이웃들의 사랑을 참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어린 김신영이 힘들게 지낸다는 걸 동네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고 종종 그녀에게 “밥 먹었니? 이것 좀 먹어봐라.”라며 빵이며 찌개며 여러 음식들을 가져다 주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때 꼬치집 이모가 가만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신영아 가만히 있어봐. 가만히 있어봐. 너 자존심 상해하면 안 된다. 자! 닭꼬치야 어서 먹어.”라고 하며 꼬치를 주었고, 또 가연동 슈퍼 이모는 “신영아! 이리 와봐. 너 우유 먹고 키 좀 커라.”라며 새 우유를 돈도 받지 않고 주고, 과자도 주고 심지어 쌀까지 주면서 “야! 너 나중에 다 갚아야 돼.”라고 장난식으로 말하며 어린 김신영이 부담 갖지 않게 편하게 도와주곤 했습니다.

참고로 가연동 슈퍼 이모는 훗날 그녀가 개그맨이 되고 나서 찾아갔더니 보자마자 펑펑 우시면서 “내가 너 상 받는 거 봤다. tv에 나올 때마다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라며 그녀를 반겼습니다. 그리고 이때 김신영이 슈퍼에 있는 물건들을 박스채로 구입해 스태프들에게 나눠주면서 “갚은 거 아니에요. 아직 덜 갚았어요. 오래 사셔야 제가 다 갚을 수 있어요.”라고 하며 이후에도 몇 번이나 더 갔었다고 했습니다.

육성회비

당시 그녀의 집안 형편은 도통 나아지지 않고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이 계속되자, 학창시절에는 관심도 없던 유도부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집에서 자는 것보다 운동부 숙소에서 잠을 자는 게 훨씬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참 성장기에 감수성이 예민할 때, 가장 참기 힘들었던 건 친구들 앞에서 가난으로 인한 부끄러움이었습니다. 당시 학교에서 교내 방송으로 “김신영 교무실로 와.”하면 그럼 친구들이 “야! 신영이 또 육성회비 못 냈나 봐.”라고 하며 친구들도 다 할 정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더욱 비참한 건 당시 육성회비를 못 낸 아이들이 여러 명 불려오는데 그때 전부 자기 동생들로, 그렇게 육성회비 때문에 온 집안 식구들이 다 교무실로 불려 망신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김신영이 속으로 “학교를 다녀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며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사람을 웃기는 행복

그러나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어린 김신영이 유일하게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친구들을 웃길 때이었습니다. 당시 그녀가 개그하면 친구들이 “와 신영이 너무 웃겨.”하면서 자신에게 모이는 게 너무 행복하고 유일한 행복이었습니다. 이 무렵부터는 친구들을 웃기는 게 마냥 좋았고, 다른 반 친구들에게까지 소문이 나면서 더욱 뿌듯해서 ‘내일은 뭘 또 해볼까? 선생님 흉내를 내볼까?’라고 생각하며 사실상 학창시절에는 오로지 웃길 궁리만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고 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앞으로 본인이 가야 하는 길이 ‘코미디언이’라는 확신이 생겨, 학창 시절 내내 오락부장을 독차지했습니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학교축제에 참석한 코미디언 ‘박경림’을 보기 위해 무대까지 뛰쳐나가자, 당시 박경림으로부터 “너는 나중에 꼭 코미디언이 되겠다.”라는 말까지 듣게 됩니다.

이처럼 그녀는 다른 아이들의 장래희망으로 ‘선생님’, ‘간호사’, ‘대통령’을 이야기할 때, 당당히 ‘개그맨’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한 번이라도 그녀의 개그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 꿈을 부정하지 못했지만 딱 두 사람이 반대를 했는데 그건 바로 ‘부모님’이었습니다.

부모님의 반대

당시 그녀의 부모님은 “가뜩이나 집안도 어려운데 너라도 안정된 직업을 가져야 한다.”라며 코미디언의 길을 완강히 반대하고, 당시 반강제로 간호학원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단하루 만에 뛰쳐나오자, 이후 모든 걸 포기하고 “너 하고 싶은 거 하려면 네가 벌어서 알아서 해.”라며 허락 아닌 허락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하루는 집에서 tv를 보다가 개그맨 조세호가 개그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받는 걸 보는데 밑에 자막으로 코미디 연기학과 모집이라고 뜨는 걸 보고 세상에 코미디 학과도 있구나 그렇다면 나는 반드시 저기에 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부모님은 어떠한 지원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대학 진학과 존경하는 선배님

그래도 이때 마침 2002년 월드컵이 열리면서 그녀가 길거리로 나가 생수와 야광봉을 팔았고 나중에는 공사장에서 벽돌까지 날아가며 스스로 힘겹게 800만 원을 모아 마침내 한국대학교에 최초로 생긴 예원대학교 코미디 연기학과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이때 학과의 교수가 코미디언 ‘이영자’였으며 당시 이영자는 자신과 비슷한 체형에 비만인 학생들을 불러 식사를 자주 사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훗날 이영자가 예능에 함께 출연한 김신영에게 “이거 해봐라, 저거 해봐라”며 그녀를 챙겨주는 모습들을 방송에서 자주 포착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김신영이 가장 존경하는 선배로 제일 먼저 언급되는 인물은 바로 ‘정선희’로, 그 이유로는 한때 김신영이 난독증 때문에 라디오에서 시청자들의 사연을 제대로 읽지 못하자, 당시 정선희가 난독증으로 고생하던 그녀에게 따뜻한 응원과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 그녀가 고백하길 “하루는 정선희 선배님 라디오에 나갔다가 사연을 읽어보라고 하기에, ‘사실은 내가 사연을 잘 못 읽는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나를 혼내지 않고 오히려 50만 원을 주시면서 “신영아, 한 달만 시간을 가져보자.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해 주셨다고 합니다.

결국 이때 선배가 주신 돈으로 위인전을 사서 읽었는데 희한하게도 이후부터는 사연을 한 번도 안 틀리고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선배님의 신뢰와 격려 덕분에 난독증을 고치고 정식 라디오 dj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선희 선배는 내 인생에 선생님과 마찬가지다.”라고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개그맨 되다

아무튼 다시 돌아와 예원예대 코미디 학과에 다니던 그녀는 자신의 오랜 꿈을 펼치기 위해 대학교 1학년 때, kbs 개그 콘테스트에 나가면서 마침내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나 했으나, 안타깝게도 3초 만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친구와 함께 sbs에 다시 한 번 도전했다가 또 몇 십 초 만에 탈락하려는 위기가 오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때 심사위원이 “혹시 마지막으로 개인기 같은 거 있냐?”라고 묻자, ‘위기에 처하면 초능력도 생긴다’는 게 맞는 말인지, 훗날 그녀가 여러 방송국에서 선보였던 ‘눈물연기 4가지 버전’을 보여주었는데 그 개인기가 빵터지면서 합격하게 됩니다.

그렇게 21살의 나이로 sbs 7기 공채개그맨이 된 그녀는 ‘행님아’라는 코너를 통해 많은 사랑을 받게 됩니다.

슬럼프

하지만 이와 다르게 예능 버라이어티에서는 적응을 잘 못하게 되자, 한때 심각한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때를 그녀가 고백하길 “내가 당시 ‘행님아’로 뜨고 수많은 예능에 불러 나갔는데….

그런데 모든 프로그램들이 두 번 다시 나를 부르지 않더라. 왜냐하면 짜여진 코미디와 달리 일반 예능은 자꾸 들이대라고 하는데도 어느 타이밍에 들어가야 할지 모르겠고, 또 처음 보는 사람인데, ‘혹시나 내가 이런 말을 받아쳤다가 상대가 기분나빠하면 어떡하지?’와 같은 소심증이 도져서 진짜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 그리고 이때 감독님들도 ‘신영아! 여기서 웃겨야지. 뭐 하니? 네 캐릭터가 아깝다.’라고 하자, 더욱 기가 꺾여서 공황 상태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정선희 선배의 프로그램에 나갔다가 선배가 워낙에 잘 받아주고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해주셔서 그때부터 조금씩 긴장이 풀리면서 자신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이후 본인의 뚱보 캐릭터를 앞세워 예능에서도 완벽히 적응하며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습니다.

건강악화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건강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는 걸 느끼고 병원을 찾아가 검진을 받았습니다. ‘초고도 비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충격적인 진단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의사가 그녀에게 “신영씨는 10년 뒤에 뭐하고 있을 것 같아요?”라고 물어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하고 싶은 걸 얘기했더니 그런데 의사가 그걸 다 듣고 하는 말이 “지금 몸 상태면 10년 뒤에 신영 씨는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어요.”라고 하자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뚱보 캐릭터를 과감히 버리고 다이어트를 결심하게 됩니다.

이처럼 의사의 충격적인 진단으로 인해 어떻게 보면 자신이 지금까지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도 뚱보 캐릭터 때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수년간 체계적인 다이어트를 통해 결국 30kg 이상의 감량을 성공했습니다.

다이어트 성공, 그리고 악플

하지만 그 과정 중 그녀를 향한 곱지 않은 시선과 여러 가지 문제들로 또 다른 마음 고생을 심하게 겪게 됩니다. 그렇게 뚱보 캐릭터로 한참 잘 나가다가 갑자기 살을 뺀다고 하자, 당시 응원의 목소리보다 ‘김신영은 새 개그 짤 생각은 안 하고, 지 외모 예뻐지는데만 신경 쓴다’, ‘살은 아무나 빼나, 김신영은 절대 살 못 뺀다.’라며 악플들이 심하게 쏟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훗날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살을 빼겠다고 선언하자, 이때 일부 연예인 동료들도 ‘신영아 너 재미없어지고 싶어? 너 캐릭터 어쩌려고? 네가 살 빼면 사람들이 퍽이나 좋아하겠다.’라며 조롱 아닌 조롱을 했고 심지어 당시에 소속사 회사조차 그녀의 다이어트를 반대했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본인도 ‘아! 내가 이렇게 날씬해지면 이제 안 웃겨져서 인기가 떨어질 수도 있는데 어쩌지 내가 날씬해져도 과연 사람들을 웃길 수 있을까?’라고 생각을 하며 코미디언으로서 본인의 미래를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20억 제안

아무튼 이처럼 다이어트가 순조롭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그녀가 보란 듯이 다이어트를 크게 성공하자, 사람들이 달라진 그녀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람과 동시에 한때 다이어트 광고 회사로부터 광고 제의도 엄청 받기도 했습니다.

금액을 다 합치면 무려 20억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그녀가 고백하길 “내가 살을 빼고 10년 동안 유지를 했고, 그 10년 동안 참 많은 유혹들이 있었다. 이런 얘기를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비포&에프터를 확실히 보여주는 업체들과 다른 광고 업체들의 광고료까지 다 합치면 20억 정도 제의가 들어왔는데 모두 다 거절했다.

왜냐하면 업체들이 마치 자신들과 함께 뺀 것처럼 광고를 하자는데, 나는 그렇게 안 뺐고 그걸 안 먹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5년간의 칩거생활

이처럼 그녀는 건강하고 싶어서 살을 뺐고 그런데 갑자기 달라진 모습에 생각지도 못한 조롱과 악플이 쏟아져 결국 극심한 공황장애를 겪게 됩니다. 이후 방송활동을 완전히 접고 무려 5년간이나 집에서 칩거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때를 그녀가 고백하길 “내가 공황장애가 매우 심해서 5년 정도 칩거생활을 한 적이 있다.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어두워지더라. 그리고 이때는 길을 가다가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면 내가 너무 아파서 거절했었는데 그러면 면전에다가 ‘요즘 tv에도 잘 안 나오더니 그럴 만한 이유가 다 있네’라고 하며 나를 욕하더라. 그렇게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나는 계속해서 어두워지기만 하다가 하루는 문득 생각이 든 게 ‘이렇게 살다간 큰일 나겠다. 한 번 있는 인생인데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나?’싶은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단 무조건 유쾌하게 지내보자는 생각으로 당시 내 주변 사람들에게 오랜만에 먼저 전화도 걸어보고 그리고 전화할 때도 괜히 민망하니까 ‘퀴즈 쇼입니다.’라고 하며 장난을 쳤다. 그러다 보니까 신기하게도 진짜 사람이 유쾌해지더라. 그래서 이후부터는 일부러라도 밝았던 시절처럼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특히 이때 우리 매니저와 장난을 많이 쳤는데 매니저가 누구보다 나의 상태를 잘 알고 내가 치는 장난을 너무 잘 받아줬다.

그러다 보니 나도 서서히 밝아지면서 방송도 하나, 둘 씩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없이 깊은 우울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실 유쾌한 장난이야말로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김신영, 그녀가 고백하길 “나는 7살 때부터 꿈이 코미디언이었다. 그래서 이게 내 길인 것 같다. 쭉 갔는데 하다 보니까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약 내가 직장인이었다면 회사를 옮기거나 이직을 하거나 그랬을 텐데…. 하지만 나는 방송 일을 하다 보니 이직도 할 수 없더라.

그러다가 ‘셀럽파이브’라는 그룹을 하면서 그제서야 ‘내가 음악을 좋아하고, 내가 작사를 하고, 이런 것도 할 줄 아는구나! 나는 이런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이거를 내가 늦게 파악했다. 사실 내가 마냥 밝은 사람이 아니다. 낯도 많이 가리고 성격도 내성적이고, 그리고 사람들의 기대치에 못 미칠 때는 나도 많이 힘들다. 그럼에도 이런 상황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준 나를 위해 박수 치고 싶다.

요즘에 속된 말로 ‘존버’가 있다. 존중하며 버티자. 존중하며 버티는 게 답이다.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우리들의 인생도 잘 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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