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개그맨 한무 대장암 투병 결국…” 안타까운 근황과 재산 수준

과거 월간지에서 우리나라 희극인 가운데 코미디언을 웃기는 코미디언 1위로 한무가 선정되었습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자신이 원래 순발력이 있는 데다가 동료들의 몸동작 등을 워낙 흉내를 잘 내서 무대 뒤에서 가끔 그것을 흉내를 내면 동료들이 포복절도했다. 물론 그중에는 방송으로는 할 수 없는 소재들도 많지만 어쨌든 웃기는 사람을 웃길 때의 그 느낌은 그리 나쁘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코미디언을 웃게 하는 유일한 코미디언 한무는 반세기가 넘도록 많은 사랑을 받으며 늘 웃음만이 가득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예상 못한 갑자기 찾아온 시련으로 인해 한무의 삶은 그야말로 송두리째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한때 부모를 잃고 각설이 생활을 하다가 마흔 살이 되어서야 TV에 나올 수 있었고 이후 동료들로부터 소금마귀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설상가상 대장암까지 걸려 대소변도 가리기 힘들어 삶의 벼랑 끝까지 가야 했던 코미디언 한무의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가슴 아픈 인생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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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헤어짐

1940년 이북 평양에서 태어난 한무는 6·25전쟁 때 가족들이 낮에는 풀숲에 숨어있다가 밤에만 넘어오면서 결국 월남에 성공했습니다. 이후 부모님을 따라 부산까지 피난을 가다가 아차 하는 순간 길을 잃어 전쟁고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부모님과 헤어져 혼자가 된 한무는 당장 추위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우연히 만난 거지 왕초를 따라 각설이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한무와 같은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어린 친구들이 어른들의 구걸에 이용당하며 행여라도 각설이 타령을 잘못하면 왕초로부터 엄청나게 혼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끼가 남달랐던 한무는 덩실덩실 흥을 돋우며 타령을 잘하자, 유독 혼자 혼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부모를 잃고 무려 1년을 넘게 각설이 생활을 하던 중, 어느 날 길에서 썩은 사과를 먹고 있는데 어떤 할머니가 그에게 다가오더니 “너는 거짓 팔자가 아닌데 왜 그러고 있느냐? 할머니를 따라가자.”라고 했고 그래서 무작정 할머니를 따라갔더니 이후 정말 고맙게도 어린 한무를 재워주고 먹여주게 됩니다.

기적같은 가족상봉

한편 그 할머니는 교회 권사님이었는데 하루는 할머니를 따라 교회에 갔더니 말도 안 되게 놀랍게도 한무의 어머니도 그 교회를 다니고 있어 모자가 극적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때 믿기 힘든 우연은 훗날 한무 본인 스스로도 실감조차 나지 않았던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다시 부모의 곁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그 시절 누구 하나 제대로 먹지 못하다 보니 이후부터는 지독했던 가난과 참기 힘든 배고픔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심지어 매일같이 반복되는 아버지의 술 투정으로 인해 어머니는 절망하시고 형제들은 이대로 우리가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의 늪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훗날 그가 이때를 고백하기에 “당시 끝이 보이지 않는 가난과 불안감으로 아무리 악을 써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허무함 밖에 없다 보니 오히려 비죽비죽 웃음만 새어 나오더라. 결국 이때부터 남을 웃기기 시작했다.”라고 했습니다.

유랑극단

이처럼 다른 사람을 웃기는 게 좋다 보니 자연스레 유랑단에 쇼 구경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객석에만 있지 않고 무대 뒤에 돌아가서 출연팀들과 어울리게 됩니다. 그들에게도 우스갯소리를 거침없이 하자 이게 받아들여져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유랑극단으로 입단하게 됩니다.

당시 한무가 유랑극단을 따라다니며 추위와 배고픔에 떠는 고생은 그래도 견딜 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생을 넘어 고통 그 자체였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대사를 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유랑극단 첫 데뷔 무대 때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소개할 가수 이름을 수십 차례 외운 뒤에 무대에 올랐습니다.

무대에 오르는 순간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고, 당시 가수 이름이 쓰메리였는데 쓰메끼리이라고 소개를 해버렸고 결국 이때 관객들이 야유를 퍼부으며 환불하라고 소리를 치는 바람에 난리가 났었다고 했습니다. 이후에도 대사 외우는 게 너무 힘들어 유랑단 생활을 포기할까? 고민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하는 법, 대사를 못 외우면 끝난다는 벼랑 끝에 선 각오로 대본을 붙들고 밤을 새워가며 노력한 결과, 이후 NG 없이 쇼를 마쳤을 때는 믿기지 않을 만큼 눈물을 펑펑 쏟아내곤 했습니다.

군입대와 결혼

그런 가운데 군에 입대할 나이가 된 한무는 당시 해군에서 처음으로 지금의 연예병사와 같은 연예대를 뽑는다고 하자, MC로 지원하였고 합격합니다. 이후 온갖 위문 공연하러 다니며 장병들의 웃음을 책임지게 됩니다. 그렇게 여느 때처럼 위문 공연하러 다니던 중 어느 날, 공연에 늦게 도착해 서둘러 허둥대며 들어서는 찰나에 어떤 한 여자와 부딪혀 정강이를 걷어차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때 이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쓰러지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 한무가 “아이고 미안합니다. 그런데 제가 시간이 없어서 금방 올라갔다가 올 테니 여기서 잠깐 기다리세요. 병원이라도 같이 가야 할 테니….”라고 했습니다. 무대에 올라가 MC를 보던 한무는 거기서 자신과 부딪힌 여자가 정강이에 멍이 든 채 기타를 치고 있었고 이후 공연이 끝나고 다시 정중히 사과한 뒤, 두 사람은 끈끈한 끈으로 연결된 듯 자주 만나면서 결국 1972년 교회를 찾아가 십자가 앞에서 부부 됨을 맹세하게 됩니다.

코미디언 데뷔

그렇게 결혼 뒤에도 시골 동네를 다니며 배고픈 삼류 유랑극단을 떠돌던 그는 무려 40살이 되어서야 코미디언 장고웅의 소개를 받아 마침내 MBC 청춘만세라는 프로그램으로 방송계에 진출하게 됩니다.

이처럼 난생처음으로 그가 TV에 나오자, 당시 그의 아들은 TV에 아빠가 나온다며 얼마나 기뻐하던지 지금도 그 모습이 생생히 기억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40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데뷔하다 보니 코미디에서 맡은 역할 대부분이 파렴치한 역이나 멍청한 역만 맡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 이런 파렴치한이나 멍청한 역할은 누구도 맡기 싫어했지만, 그런데도 드라마나 코미디에서는 빠질 수가 없는 역할이어서 40대의 늦깎이 신입생 한무가 이런 역할들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초석을 다지며 천천히 자신만의 경력을 쌓아가게 됩니다.

소금마귀 한무

한편 어린 시절의 가난과 굶주림 때문인지 한무의 자린고비 정신은 연예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굉장히 유명했습니다. 어느 날, 연예인 모임에서 어쩔 수 없이 술값을 낼 차례가 오자, 짠돌이 한무가 살 차례라고 난리가 나면서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때 그는 순순히 술값을 내기가 싫어 후배인 김학래에게 “카드 계산되냐?”라고 물은 뒤 신용카드 대신 엉뚱한 마일리지 카드를 쥐여 보냈고 그래서 결국 당시 사람들이 “그러면 그렇지 한무가 설마 쓰겠냐?”라고 실망하며 당시 가장 잘나가던 엄용수가 대신 술값을 계산했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후로 한무는 소금마귀라는 별명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이런 한무도 짠돌이로는 이길 수 없는 연예계에 진정한 짠돌이가 있었는데 바로 트로트 가수 설운도였습니다. 훗날 한무의 고백에 따르면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지독한 짠돌이는 설운도이다. 그는 전화비를 아끼려고 동료들에게 배터리가 떨어졌다며 휴대전화도 빌려 쓰더라.

그래서 하루는 내가 설운도에게 배터리가 떨어져서 전화 한 통만 하자고 했더니 설운도가 배터리를 건네 주웠다.”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한무의 짠돌이 에피소드를 하나 더 소개하면 코미디언 후배 이용식에게 부부 싸움을 시킨 일이 있습니다. 평소 매번 술을 잘 사던 이용식이 어느 날부터 술을 사지 않게 됩니다.

마침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터라, 이용식 집에 찾아간 아내에게 “이용식이 무대 출연료를 빼돌리는 것 같다.”라고 거짓 제보를 하게 됩니다. 결국 그날 밤 이용식 부부는 엄청나게 다투게 되었고 이후 이용식으로부터 전화가 왔지만 “나는 절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라고 발뺌합니다. 그리고 다음 날 평생 지각 한 번 안 하던 이용식이 지각하더니 양쪽 목에는 부부 싸움의 흔적으로 손톱자국이 깊게 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의 재산

그렇다면 한무는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쓰는지 알아보니, 엄용수의 고백에 따르면 “한무 선배가 직계 형제들의 집을 모두 마련해 주었다. 그래서 반경 50m 내에 가족들이 모두 함께 모여 살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즉, 한무는 자기 가족에게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으로 그의 고백에 따르면 “자식들에게 다른 것은 다 물려줘도 가난만큼은 물려주고 싶지 않다. 사실 지금까지도 자식들이 나의 명의로 된 카드를 사용하고 있으며 거기에다가 매달 나가는 통신비, 기름값까지 모두 내가 내주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대장암 판정

그런 한무가 70대 초반이던 지난 2018년, 평소 아픈 데도 전혀 없다가 대변을 보면 살짝 혈이 섞여서 나오길래, 혹시나 해서 병원에 가봤더니 꿈에도 예상 못한 대장암 2기 판정받게 됩니다. 이후 그의 암 투병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특히 그의 아내가 무려 6개월간이나 한무의 대소변을 다 받아내며 온갖 고생을 다 하자, 그때 한무가 너무 미안하고 고마워서 다짐한 게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아내에게만큼은 정말 잘해야겠다.”라는 다짐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아내의 정성스러운 병간호 덕분인지 1년간의 투병 끝에 완치에 가까운 판정을 받게 되어 현재는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은 코미디언으로서 오랜 시간 대중을 웃겼다면 이제는 아내의 영원한 코미디언이 되어 평생 아내를 웃게 해줄 거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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