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세 배우 박준금 뒤늦은 고백” 안타까운 근황과 그녀의 현재 재산 수준을 확인해 보세요.

60대에도 20대 부럽지 않은 패션 센스를 선보이는 배우 박준금은 동안으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이에 대해 박준금은 “댓글을 보니까 왜 안 늙어요?라는 질문이 많더라고요. 저도 나이를 당연히 먹어요. 그런데 젊게 사려고 하니까 조금 더 늙어 보이는 것 같아요. 좋은 관리법이 많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건강에 되게 예민해져요. 건강을 좀 더 신경 쓰는 날들이 이어져요. 그중 가장 중요한 게 비타민이에요. 확실히 비타민을 먹어야 안 피곤해요. 브라질너트도 먹어요. 노화 방지가 된다고 하더라고요.”라고 전했습니다.

이러한 박준금은 부잣집 사모님 연기 전문인입니다. 실제로도 부잣집에서 자란 일명 금수저였습니다. 그 시절 쟁쟁한 연기자들 사이에서 무명시절 한번 없이 단번에 주인공 자리를 차지한 그녀는 부잣집 딸이라는 이유로 주인공으로 발탁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동료 연기자들의 미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철저한 노력 하였고 인기 또한 자연스레 따라왔습니다. 오늘은 배우 박준금의 인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박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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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과 그녀의 재산

아버지는 고향인 강원도에서 철강회사를 운영하여 유년 시절부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한때 철강회사 회장 딸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그녀가 포스코 전 회장의 딸이 아니냐?는 루머가 돌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그녀의 아버지는 철강과 군납 사업으로 돈을 벌었고 이후 춘천에서 유명한 헬스 사우나 회사의 사주가 됩니다.

아버지가 피트니스 센터를 운영한 덕분에 그녀는 어릴 적부터 헬스를 비롯해 볼링, 수영 등 다양한 운동을 배웠고 지금은 처분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피트니스 센터를 물려받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아버지는 박준금을 포함하여 세 딸에게 똑같이 유산을 물려줍니다.

박준금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춘천의 상가 건물을 포함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서울 성수동에 있는 고급 아파트와 대부도의 땅까지 상당한 규모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부도의 임야는 1980년대부터 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던 곳으로 공시지가가 2배 이상 올랐으며 실거래가도 상승 중이라고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연기자 데뷔

박준금은 춘천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경희대학교 예술대학 무용학과에 진학해 재학 중이던 당시 제5공화국 정부가 기획했던 대규모 문화축제인 국풍81에 참가했다가 KBS의 한 PD에 눈에 띄며 본격적인 배우로서의 행보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게 주말 드라마 순애로 데뷔하게 됩니다.

당시 원래 ‘수애’의 주연이었던 원미경이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리면서, 그 자리를 대신할 인물로 당시 연기 경험이 전무했던 박준금이 선정되어 나머지 회차를 소화해내며 주목받게 됩니다. 무명 없이 하루아침에 드라마 주인공으로 발탁된 그녀는 어제까지 학교에 다니다가, 갑자기 배우가 됐기에 선배들에게도 미운털이 박혀서 힘들게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대사 연습도 열심히 했지만, 욕먹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하루는 대기실에서 오빠라고 한 번 했다가 건방지게 신인이 오빠라고 하냐?라며 정말 호되게 혼나기도 했습니다. 화장실에서 만난 한 여배우는 남의 눈에서 눈물 나게 하면 내 눈에서도 피눈물 난다.”라고까지 말해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대본의 눈물 자국이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혹독한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술자리에서 감독의 따귀를 때려…

선배들에게 크게 혼나며 연기를 배웠던 반면 박준금은 후배들을 잘 챙기는 털털하고 살가운 성격의 소유자로 유명합니다. 또한 신인 때부터 감독이 자신에게 반말하면 “왜 반말하냐?”고 따지기도 하는 등 당찬 성격이었습니다.

한 번은 술자리에서 술을 따르라는 감독의 따귀를 때려 6개월간 출연 정지를 당한 적도 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습니다. 이후 봄봄, 전설의 고향과 같은 작품에서 얼굴을 알린 후 1987년 KBS 드라마 사모곡에서 인기를 얻던 중 1994년 결혼과 함께 연기 생활을 접게 됩니다.

결혼과 불임

그녀는 활동을 잠정 은퇴했던 것에 대해 “운 좋게 연기를 시작했지만 크게 열정이 있던 것도 아니고 살림하며 예쁘게 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연기를 그만뒀어요. 최근 몇 년 사이 미시 연예인들이 주목을 받고 있지만, 제가 결혼할 당시만 해도 결혼과 동시에 은퇴하는 경우가 많았어요.”라고 이유를 밝혔습니다.

그렇게 방송계를 떠나서 있는 동안 살림에만 충실했고 7살 연상의 남편은 부모처럼 자상하게 챙겼습니다. 하지만 행복한 결혼생활 중 예상치 못한 시련이 닥쳤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남편과 함께 산부인과를 찾아 온갖 검사를 해봤지만, 부부 모두 특별한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초조해진 그는 30대 중반에 이르러서 시험관 아기 시술을 시도하게 됩니다.


처음 시험관 아기 시술에 실패하고 병원을 나서는데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그녀는 큰 고비 없이 인생을 살아왔지만 불임은 인생에서 큰 벽이었고 당시에 흘린 눈물을 모으면 한강을 이룰 정도로 많이 울었을 거라고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좌절하지 않고 정말 열심히 했고 언젠가는 될 거라고 그녀는 굳게 믿었습니다.

난자 채취를 위해 병원에 갈 때 그녀는 가족에게조차도 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루는 난자 채취를 마치고 나오는데 동생이 병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아플까 걱정이 돼서 왔다라며 우는데 그걸 보면서 그녀는 몸보다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그런 과정을 반복하기를 12번, 제발이라는 희망에 갖기조차도 버거웠던 그녀는 아이와의 인연을 접었습니다. 박준금은 “예쁜 딸 하나만 내려주시면 정말 잘 키우겠다고 생각했는데 안 됐어요.

입양할까도 생각했지만 내가 과연 아이를 키울 자격이 있나, 혹시나 아이를 외롭게 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의 엄두가 나지 않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입양을 하시는 분들은 정말 용기 있고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전해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그녀의 이혼

박준금 부부는 각자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또 다른 행복을 찾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마음을 비우니 또 다른 세계가 열리더라고요.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 겸손해지더라고요.

그리고 다른 누구의 힘을 빌리지 않고 나 자신의 노력으로 잘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됐고 그게 바로 연기라는 걸 깨달았어요.”라고 연기에 다시 복귀하게 된 계기를 밝혔습니다. 아이 때문은 아니지만, 결국 2005년 남편과 법적으로 헤어지게 됩니다.

이혼 사유는 외로움과 남편과의 성격 차이, 남편 사업 때문에 잦은 의견 충돌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전했습니다. 이혼 후 인터뷰에서는 “차라리 아이를 갖지 않은 게 더 다행이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혼 후 외로움에 대한 속내 또한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후 박준금은 주인공의 엄마 역할을 잘 소화해내며 자신의 입지를 탄탄히 다졌고 러브콜을 받는 중년 배우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청춘을 보내고 있는 듯한 박준금의 앞으로의 활동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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