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세 한명숙 생활고에 시달려 결국…” 최초 한류 스타였던 그녀의 안타까운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전쟁이 끝나고 재건의 시대였던 60년대에 빠른 박자의 밝은 멜로디로 희망을 바라는 시대상이 반영된 노래,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흐름을 바꾼 노래, 노란 샤쓰의 사나이라는 노래를 알고 계시었나요? 이 노래를 부르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 주인공 가수 한명숙 씨를 기억하시는지요?

한명숙 씨는 너나없이 궁핍했던 시절 아름다운 노래로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60년대를 풍미했던 한명숙 씨가 어떻게 이렇게 비참한 신세가 되었는지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한명숙 씨에 좀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기를 바라며 그녀의 한 많은 인생과 충격적인 최근 근황을 전해드립니다.

한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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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과 가수 데뷔

한명숙 씨는 일제강점기인 1935년 12월 1일 태어나, 현재 우리나라 나이로 88세이십니다.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출생한 이북 출신이며, 유년 시절 한명숙 씨는 부친에 대한 뚜렷한 기억이 없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때 부친은 중국에 오가며 사업을 하다 광복 후 홀로 월남 부산에 거주했습니다.

무남독녀 한명숙 씨가 모친과 단둘이 부친을 찾아 피난민 대열에 합류한 때가 한국전쟁 당시 진남포 제2 여고에 재학 중이던 16살 때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진 부친과 상봉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었습니다. 그렇게 한명숙 씨는 한국전쟁 당시 월남에서 인천에 정착했습니다. 한명숙 씨는 이렇게 과거를 회상했습니다.


“예전에 어머니가 이따금 들려준 얘기 중 하나가 제게 젖을 물리면서 읽은 소설 방랑의 가인에 대한 얘기였어요.부모와 헤어진 주인공이 부모를 만나기 위해 택한 방법이 유명 가수가 되어 자신을 알아보고 찾아올 수 있게 하겠다는 것에서 갖은 역경을 이겨낸 뒤 결국 유명 가수가 되어 부모와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참 많이 우셨다더군요.”

그런데 한명숙 씨의 인생에 이 소설과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공교롭게도 16살의 피난 소녀 한명숙 씨는 인천에 정착한 뒤 악극단 가수로 활동을 시작합니다.

노란 샤쓰의 사나이 탄생

악극단 가수 활동 중 군 예대에도 참여하여 군번 없는 용사로 참전했습니다. 휴전 이후 실력을 점차 인정받으면서 미8군 쇼 단체인 럭키 쇼단에 뽑힌 이후 세븐스타쇼, 에이원쇼 등으로 활동을 넓혀갔습니다. 특히 안정된 허스키 보이스는 외국 팝을 부르기에 적당한 음색으로 미군들의 반응 역시 좋았습니다.

이 인기와 유명세를 몰아 패티 페이지가 내한했을 때 함께 무대에 오르는 행운도 차지했습니다. 이렇게 1953년 주한 미8군 무대에서 가수로 데뷔해서 활동했고 8년 후 작곡가 손석우 씨를 만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노래를 하게 됩니다. 손석우 씨는 이미 우리나라 드라마 주제가 1호로 자리매김하는 청실홍실를 비롯해 나 하나의 사랑 , 이별의 종착역 등을 작곡했던 실력파 그는 당시 케이비에스 악단 지휘자였는데 늘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했습니다.


한명숙 씨를 처음 본 순간의 회고입니다. “당시 지인 한 분이 노래를 썩 잘 부르는 가수가 있다라고 해서 함께 공연장에 갔지. 대구의 한 극장에서였어요. 이전까지 가수의 음색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느낌을 주더군요. 순간 ‘이 목소리에 맞는 노래를 만들어야겠다’하는 욕심이 생기더군요.”

그렇게 1961년 ‘노란 샤쓰의 사나이’는 탄생했습니다. 단순하면서도 친근하게 느껴지는 리듬의 이 곡은 처음 발표되었을 당시에는 일부 가요 관계자들로부터 그저 단순히 ‘동요에 털이 좀 난 것 뿐’이라는 악평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파격으로 말미암아 60년대 이후 우리나라 가요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을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한명숙 씨의 노란 샤스의 사나이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샹송 가수 이베뜨 지로 그리고 일본의 하마무라 미치코를 비롯해 자국의 가수들 목소리에 제각각 실려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를 강타합니다. 이른바 한류의 원조인 셈입니다.

즉 대한민국 국외에서도 히트한 최초의 가요입니다. 당시, 이 노래가 얼마나 유행했던지 한 외국인이 길 가다가 노란 샤스의 사나이가 나오자 갑자기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던 일화도 나왔습니다. 그 외국인은 이 노래가 얼마나 자주 나왔던지 대한민국의 애국가인 줄 알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한 인기

한명숙 씨 또한 몇 가지 일화를 털어놓았습니다. “대만에 공연 갔을 때인데 대만 사람들이 노란 샤스의 사나이가 자기네 노래라고 우기는 거예요. 워낙 대만에서도 널리 불렸으니 당연히 그렇게 여겼겠죠.” 노란 샤스의 사나이의 붐은 영화 제작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1962년 3월 엄심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는 당시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어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을 만큼 만원사례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소설 방랑의 가인의 주인공처럼 한명숙 씨가 실제로 부친을 만난 것입니다. 노란 샤스의 사나이로 스타덤에 올랐던 62년 부산 3.1극장 공연 때 한명숙 무대 인사차 내부라는 포스터 문구를 보고 놀랍게도 부친이 직접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염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명숙 씨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가족을 남겨두고 혼자 떠난 부친에 대한 앙금이 풀리지 않은 탓도 있었겠지만, 부친은 이미 새 가정을 꾸리고 있었습니다. 노란 샤스의 사나이 이후 우리 마을, 눈이 내리는데, 사랑의 송가, 그리운 얼굴 등 히트곡을 잇달아 냈으며 총 300여 곡을 발표했습니다. 라디오를 켜면 하루에도 몇 번씩 한명숙 씨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을 비롯해 홍콩, 싱가포르,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등 해외 공연 또한 많았습니다. 그렇게 바쁜 전성기 시절에도 최전방 위문공연은 물론, 파월 장병을 위한 위문공연에도 누구보다 앞장서 왔습니다. 동료들과 유대관계 또한 돈독해서 오히려 너무 흠이 없어 매력이 없다고 치부될 정도로 연예계에서 드물게 갖춘 사람으로 통했습니다.

남편과의 사별

현모양처인 한명숙 씨는 단 한 번도 스캔들이 없었던 가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시련이 많았습니다. 한국전쟁 중 군 예대 시절에 만난 군악대 소속 트럼펫 연주자인 이인성 씨와 1956년 1월에 결혼합니다. 그러니까 결혼하고 나서 61년 노란 샤스의 사나이를 발표하며 떴으니까 유부녀 가수로 성공한 보기 드문 사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1970년 그녀의 나이 36살 결혼한 지 15년 만에 남편이 41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부군 이인성 씨는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상사 출신이자, 한국전쟁에 참전한 국가유공자였으며 그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습니다. 한명숙 씨는 자녀를 혼자 키워야 했고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를 동시에 모시고 살아야 했습니다.

이렇듯 가족에 대한 헌신적인 뒷바라지로 78년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충격으로 성대가 결절이 생겨 3년간 노래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가수로서 치명적인 성대 수술을 2차례나 감당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건강악화

그러나 시련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2007년 한 기사에 의해 한명숙 씨의 충격적인 형편이 알려졌습니다. 당시 73세 살이었던 한명숙 씨가 경기도 수원에 20만 원 사글세 단칸방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진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남편과 사별한 이후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 장남 이일권 씨는 이명훈 씨가 부른 내 사랑 영아 작곡가인데 공황장애를 앓게 되어 투병으로 모든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또한 한명숙 씨는 1960년대 최고의 스타에서 50여 년이 지난 후 상상하기도 힘든 곳에서 공연하고 있었습니다. 노인잔치나 시장 공연 심지어는 찜질방 등에서도 공연하며 생활을 연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한명숙 씨를 돕고 싶다라는 문의 전화가 밀려들었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그녀는 대부분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형편은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2012년 SBS 좋은 아침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녀는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로 살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월세 4만 원을 내는 임대 아파트에서 손자와 함께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돈벌이가 없자, 결국 기초생활 수급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통장 잔액 286원이라고 하며 더 이상 수입이 들어올 곳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한명숙 씨는 미국에 있는 딸에 대해 “딸에게 힘든 얘기 하면 운다. 한 번은 딸에게 고려장 생각나니….라고 물었다. 왜냐면 내가 꼭 고려장이라는 기분이 든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라며 속내를 털어놨습니다.


그러다 2018년 한 방송에서는 가수 현미 씨가 한명숙 씨와 만나는 모습으로 전파를 탔습니다. 그런데 한명숙 씨가 허리가 아파 병상에 누워만 있는 충격적인 모습이었어요. 현미 씨는 더욱 노쇠해진 친구의 모습에 너무나 가슴이 아파 제작진의 촬영을 거부했고 카메라를 끄고 오디오로만 진행하도록 요청했습니다.

2021년 그나마 건강이 나아져 지금은 거의 휠체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손자와 함께 10평 남짓한 임대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한명숙 씨는 허리 통증으로 외부 출입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밝혔습니다. 최근엔 방문 노인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끝내 큰아들이 사망했다라는 충격적인 고백을 하며 한명숙 씨는 헤어 나올 수 없는 큰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목소리가 갑자기 안 나왔다. 옆에서 얘기를 안 해주면 못 알아들었다. 정신적으로 그렇게 마음이 아주 아픈 적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사진이라며 영정 사진이 될 것 같다.”라며 사진을 찍는 모습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불행에도 굴하지 않고 치열하게 세상을 살고 계신 한명숙 씨에게 하루하루는 모두 역사고 훈장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명숙 씨에게 따뜻한 응원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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