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채무 사별 후에 보인 충격적 이상 행동” 그가 재혼해야만 했던 상황을 확인해 보세요.

사별이란, 배우자나 애인이 세상을 떠나는 일로 최근 한 연구에 따르면 인간이 겪는 스트레스 중 가장 심각하다는 게 사별이라는 것이 많은 연구에서 밝혀진 바 있습니다. 그렇게 배우자의 사별은 삶의 다양한 측면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슬픔, 후회감, 죄책감, 정체성 혼란 등이 있고, 또한 심리적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활동 위축, 경제적 공격 같은 사회적 측면에도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고통도 삶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건강한 사별의 준비에 대해서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물론, 사별을 예상한다고 해서 사별의 슬픔이 줄어들지는 않겠지만 어떤 형태로든 사별을 준비한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높은 적응 수준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결국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삶이 있어야 한다라는 것인데, 사별의 비탄에 매몰되어 있지 않고 자신에게 의미와 보람을 주는 일을 찾아 그 일로 사람들을 만나고 활동했을 때, 비로소 사별이라는 고통의 늪에서 벗어나 남은 인생도 의미 있게 보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인공 임채무 역시도 37년간 함께한 아내와 사별하고, 한때 본인은 절대 재혼하지 않겠다라고 다짐했지만 지나가는 구름만 봐도 여보라고 외치며 진짜 3개월 만에 정신이 이상해져서 평생 돈을 벌 줄 알고 직원들에게 아파트를 26채나 줘버린 임채무,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임채무
👉“국민 첫사랑인 그녀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방송 활동을 못 하는 이유” 곽도원의 고백을 확인해 보세요.

뜻 밖의 배우 데뷔

1949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난 임채무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경찰공무원이다 보니 자신도 한때 아버지를 따라 형사를 꿈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은 반에 가수 故 차중락의 친동생이 임채무가 목소리가 좋으니 가수나 배우를 하라고 권유하자 이때부터 연예인의 꿈을 키우게 됩니다.

이후 배우든, 가수든 뭔가를 하고 싶다라는 생각에 까까머리 고등학생 임채무는 새벽마다 체육관에 나가 발성 연습을 했습니다. 하지만 연예인이 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당시만 하더라도 어떻게 해야 연예인이 될 수 있는지 알 턱이 없었던 그는 우선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대에 입대하게 됩니다. 이처럼 연예인의 꿈을 막연하게만 꾸다가 진짜로 배우의 길로 접어든 계기가 생기게 됩니다.

그건 바로 놀랍게도 군대였습니다. 당시 그는 군대에서 홍보용 연극 공연을 몇 번 하니까, 주변으로부터 얼굴도 예쁘장한데 배우 한번 해봐라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을 수 있었고 그러다 제대를 앞둔 시점에서 MBC에서 탤런트 모집 공고가 뜨자, 평소 임채무를 좋게 봐주시던 대대장님이 “채무야! 저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라며 그가 탤런트 시험을 볼 수 있게 외박을 보내주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 시험도 시험이지만, 외박이라는 외출의 기회가 거의 없던 그 시절, 밖에 못 나가서 안 다닌 군인이 시험을 핑계로 나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군복을 입은 채로 MBC 공채 배우 시험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당시 탤런트 시험이라고 하면 전국에 내놓으라 하는 끼쟁이들이 모두 모이다 보니, 설마 내가 되진 않겠어?라고 생각하며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4차까지 모두 통과하면서 1973년 MBC 공채 배우 6기가 되게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훗날 그의 고백에 따르면 “당시 군복을 입고 시험을 치른 사람은 자신뿐이라 합격하고 교육받을 때도 본인만 군복을 입고 교육받았으며 아무튼 이때의 합격은 천운 그 자체였고, 그래서 지금도 자신의 인생을 바꿔주신 대대장님이 너무 감사하다.”라고 했습니다.

아내와 만남 그리고 결혼

아무튼 이처럼 그는 덜컥 MBC의 공채 배우가 되었지만 생각과 달리 주목받지 못해서 이후 기나긴 무명의 서러움을 겪게 됩니다. 그래도 그런 와중 한 어린이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가장 소중한 인연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 어린이 프로에 출연했던 한 아역배우의 어머니가 임채무의 성실한 모습과 주변 아이들을 잘 챙기는 모습이 호감으로 다가와 자기 딸을 소개해주겠다라며 마포의 다방에서 소개팅을 해주게 됩니다.

그 사람은 바로 MBC 공채 7기 성우이자 훗날 그의 첫 번째 아내인 박인숙이었습니다. 이처럼 그가 한 아줌마의 소개로 첫 번째 아내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잠깐 이야기를 나눠보니 마음에 무척 들어서 결국 만난 지 15분 만에 결혼하자며 프러포즈까지 하게 됩니다. 당시 첫 번째 아내는 너무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훗날 첫 번째 아내의 고백에 따르면 “당시 그런 자리인 줄도 모르고 어머니가 나가보라고 해서 나갔는데 얘기 좀 해보더니 결혼하자고 하길래,그래서 속으로 이 사람 미친 사람이 아닌가? 싶었다. 그 뒤에도 계속 결혼하자고 졸랐고 심지어 소개해 준 우리 엄마도 당시 임채무를 좋게 보긴 했지만 결혼은 너무 이르다며 반대했다.

아버지 역시 연예인은 안정적이지 않아서 안 된다며 반대했었다. 그런데도 남편이 이후 끊임없이 집에 찾아와 결혼을 허락해 달라며 떼를 쓰자, 한 번은 아버지가 화를 내며 나가려고 하는데 그걸 또 붙잡고 3시간에 걸쳐 설득하더라 결국, 승낙을 받아 약 한 달 뒤에 결혼식을 하면서 그렇게 첫 만남 이후 불과 2개월 만에 결혼식까지 올리며 모든 게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임채무가 이때를 고백하길 “당시 장모님의 소개로 아내를 처음 만났는데 딱 보는 순간 저 여자일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심장이 두근거리더라…. 그래서 아내와 이야기를 나눈 지 15분 만에 결혼하자고 프러포즈했다.

그리고 만난 지 20분 만에 장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결혼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러자 장모님이 일단 가을이 되면 천천히 생각하자고 하셨는데, 하지만 내가 가을까지 못 기다린다라며 지금 당장 상견례 자리를 만들자라고 강요했다. 이후 어찌어찌해서 장인과 장모를 만났는데 연예인은 안 된다라며 반대하는 걸 3시간 동안 설득해서 결국 승낙을 받아냈고 그렇게 사실 만난 지 거의 한 달이 좀 넘었을 때 결혼까지 해버렸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속전속결로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긴 무명생활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후 무명 시절이 길어도 너무 길다 보니 아내를 볼 면목이 없어 눈물을 떨구며 나는 배우로서 자질이 없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해 결국 다 그만두고 한국을 떠나 이민을 하기 위해 영어도 배우며 이민 갈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배우를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이민을 하려고 준비하던 중 하루는 밖에서 술을 먹다가 화장실에 갔는데 어떤 사람이 연기 연습하는지, “알아요.”라고 하며 딱 한 마디의 대사를 다양하게 연구하는 걸 듣게 됩니다.

그때 문득 스치는 생각이 쟤도 저렇게 노력하는데 과연 나는 저렇게 노력했는가? 나는 노력도 하지 않고 그동안 원망만 했었구나!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해야겠다. 나도 할 수 있다.”라고 자기반성을 하며 다시 한번 배우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그렇게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기회가 올 거라며 매일같이 발성 연습을 하며 생계를 위해서는 야간 업소를 전전하던 중 배우로 데뷔한 지 11년 만에 마침내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사랑과 진실`의 주인공을 맡으면서, 이 드라마 단 한 편으로 긴 무명 생활을 청산하고 단숨에 톱스타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전성시대

이후 그는 80년대를 대표하는 배우가 되어 수많은 미녀 스타들과 함께 연기를 하며, 그야말로 임채무의 시대가 오게 되었고, 무명이 길어 이미 30대가 훌쩍 넘은 나이에 멜로를 하다 보니, 당시 신인 여배우들이 종종 당황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한 일화로, 배우 채시라와 그는 무려 19살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극 중에서 입을 맞추는 연기를 해야 하자, 당시 채시라가 분했는지 30분 동안이나 설움에 북받쳐 우는 게 꼭 숨넘어갈 것처럼 펑펑 울기도 했습니다.

이때를 그가 고백하길 “채시라 씨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술을 부딪쳤다며 분해하길래 굉장히 오랫동안 달래줘야 했다. 그런데 훗날 내가 김수미 선배와 뽀뽀하는 장면을 찍는데 당해보니 채시라의 심정을 알겠더라. 솔직히 된장 느낌이었다.”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이후 그가 80년대를 대표하는 초특급 스타로 우뚝 서자, 당시 서울 아파트 한 채가 200~300만 원 하던 시절에 한 달에 무려 1억 원을 벌었고 심지어 돈 쓸 시간도 없어서 순식간에 큰돈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훗날 그의 표현에 따르면 “당시 기절할 정도로 돈이 모였다.”라고 했습니다.

두리랜드의 탄생

여기서 잠깐 잠시 과거로 돌아와, 1973년 MBC 공채 배우에 막 합격한 그는 당시 작은 단역들만 전전하던 중 하루는 경기도 양주 장흥면에서 온종일 자신의 촬영 순서를 기다리다가 인근 계곡에서 다 큰 어른들이 고성방가하며 놀자, 혀를 차며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니! 이렇게 공기 좋은 곳에서 아이들도 있는데 어른들이 술이나 마시고 고성방가하다니…. 그래! 내가 나중에 성공하면 아이들이 온종일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어야겠다.”라고 다짐합니다.

이후 돈을 벌면서 땅을 조금씩 사들이다가, 1990년 5월 1일 마침내 지금의 두리랜드를 개장하게 됩니다. 그렇게 오픈한 두리랜드는 인기 배우 임채무가 운영하는 놀이공원이라는 사실만으로 당시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도 처음엔 너무 신이 나 밤마다 혼자 놀이기구를 타고 소주 한 병을 사 들고 바닥에 철퍼덕 앉아서는 “임채무! 너 대단하다.

내가 이렇게 대단한 걸 만들었구나.”라고 생각하며 혼자서 감격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한 사람당 2,000원을 받던 입장료를 0원으로 만들면서 더욱 화제가 되곤 했었습니다. 한 번은 어느 가족 4명이 돈 8천 원이 없어 입구에서 들어오지 못하는 걸 보고 가슴이 아팠던 그는 바로 간부를 불러서 저 매표소를 부셔라 말한 뒤 이후 입장료 수입도 없이 놀이공원을 운영하자, 천사의 놀이공원이라 소문이 나며 더욱 사람들이 몰려들게 됩니다.

아무튼 90년대 초반 그는 배우로서도 놀이공원 사장으로서도 모두 성공하다 보니 돈이 많아도 너무 많아 당시 직원들에게 3년만 근무하면 아파트를 사준다라는 약속까지 하며 실제로 26명의 직원에게 각자의 명의로 아파트 한 채씩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이때를 그가 고백하길 “당시 내가 18평짜리 아파트를 26명의 직원에게 각자의 명의로 아파트 한 채씩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이때를 그가 고백하길 “당시 내가 18평짜리 아파트를 26명의 두리랜드 직원들에게 각자의 명의로 한 채씩 선물했으며 지금도 그 아파트에 사는 직원이 있다. 그렇게 잘해주면 직원들도 더 열심히 하고, 나도 더욱 부자가 될 줄 알았다. 아무튼 당시에는 내가 평생 그렇게 돈을 벌 줄 알았다.

조용히 내조해준 아내

하지만 사업이라는 게 쉽지만은 않더라. 사업 초기부터 대출받아서 시작했을뿐더러 이후에는 IMF 외환위기와 심지어 자연재해인 태풍까지 오면서, 단 15분 만에 두리랜드가 잠기더니 20억이 그냥 날아갔다. 그때부터는 도저히 돈을 벌 수가 없더라. 그래서 당시 아침에 눈 뜨면 생각했던 게 오늘은 누굴 찾아가서 돈을 빌려달라고 할까? 안 빌려주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하며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오로지 돈만 빌리러 다녀야 했던 시간이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배우로서도 놀이공원 사장으로서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만 해도 그 힘든 일들을 둘, 모두 할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첫 번째 아내의 조용한 내조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아내는 아무리 힘들고,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남편이 바깥에서 열심히 일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내조했습니다.

하지만 그랬던 그녀도 한때는 임채무가 너무 버거워 결국 이혼까지 결심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남편 임채무는 다혈질인 데다가, 성격이 급해도 너무 급하다 보니 아내가 참고, 참다, 안 되겠다 싶어, 당시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아들 하나 정도는 건사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하고 결국 그와 헤어지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하지만 급해도 너무 급했는지 그러고 나서 곧바로 둘째가 태어나고 2명은 힘들뿐더러 아빠 없는 아이로 만들면 안 되겠다 싶어 그냥 살아야겠다라고 다짐하며 훗날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와 함께 살게 됩니다.

암 판정

그렇게 남편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무려 37년간 옆에서 조용히 내조하던 그의 첫 번째 아내였지만, 하늘도 무심한 게 하루는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췌장암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길어봐야 5년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야 말았습니다. 이때를 그가 고백하길 “암 중에서도 제일 더럽고 괘씸한 게 췌장암이다.

말기가 될 때까지 아무런 증상도 없이 우리 몸속에 잠복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게 췌장암인데, 안타깝게도 우리 아내가 그랬다. 심지어 아내의 경우 그 괘씸한 췌장암 중에서도 더욱 희귀한 경우로 암세포들이 수술도 못 하는 부위에 딱 달라붙어 있어서 당시 MRI 사진을 보는데 진짜 엉망 그 자체였다. 그렇게 그날부터 나는 말기 암 환자들의 생존 사례를 찾아 헤매며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해서 몸에 좋다는 건 다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이처럼 이때는 어떻게든 아내를 살리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암에 좋다는 치료제를 찾아야 했고 아픈 아내 역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라는 의지로, 당시 조미료나 설탕이 몸에 해롭다는 걸 알고 훗날 하늘로 가기까지 그 흔한 짬뽕 한 그릇 먹지 않았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부부가 합심해서 반드시 살아보자는 의지로 아내는 임채무가 구해오는 유기농 채소와 반찬만으로 식사하는 등 시한부 판정을 받았음에도 절망하고 포기하기보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고양이에게 쫓기던 쥐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고양이를 물듯 암세포도 독한 항암제로 쫓으려고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때부터는 암에 관한 생각 자체를 바꿔, 완치할 수 없다면 공존하자라는 생각으로 한 때는 항암 치료를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그런 노력 덕분인지, 처음에 짧으면 3개월이라고 했던 아내가 무려 4년간 그의 곁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일 아침까지도 건강한 생활을 꿈꾸던 첫 번째 아내는 야속하지만 결국 임채무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절대 재혼 안한다

이와 관련해 그가 고백하길 “아내가 치료를 시작하고 2개월 정도 지났을 때 하루는 주치의가 나를 부르더라. 그러면서 하는 말이 혹시 아내와 부부 생활이 좋았냐?라고 묻길래, 난 좋았다고 생각하는데 아내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의사가 아내의 걱정이 아닌 내 걱정하면서 한다는 말이 부부 관계가 좋았다면 재혼하라고 하고, 반대로 부부 사이가 나빴다면 재혼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왜 그렇게 얘기를 하냐?라고 하니까 자기가 수없이 많은 사별을 봤는데, 사이가 좋았던 부부일수록 남은 한 사람이 정신적 이상이 올 수 있다라고 하더라.

하지만 당시 나는 해병대 훈련을 받은 사람이다라며 의사의 의견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런데 신기하게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정확히 3개월 만에 진짜로 정신이 이상해지더라. 지나가는 구름만 봐도 내가 여보를 외치고 있더라. 그러다 다시 제정신이 돌아오면 나도 하늘로 갈까? 여기서 마음만 먹으면 1초 만에 하늘로 갈 수 있는데….라는 생각이 자꾸 들면서 심각한 우울증이 오고야 말았다. 그리고 하루는 급하게 외출하려는데 하얗게 된 뒷머리가 보이더라. 예전에는 아내가 늘 염색을 해줬지만 이제부터 혼자 해야겠다 싶어 해봤는데 등이 전부 염색약으로 물들고 말았다.

그 순간 혼자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렸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염색뿐만 아니라, 사실 연예인은 대본과 의상을 챙겨야 하며 하루 종일 택배 전화가 오고, 아무도 혼자 살 수가 없더라.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간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데 이러다가 내 삶도 망가지겠다. 싶어 얼른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렇게 내가 건강하고 행복해야 세상도 건강하다는걸 깨닫고, 원래 아내와 사별 후 절대 재혼하지 않겠다라고 다짐했지만 그 시기에 지인의 소개로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첫눈에 ‘함께하자’고 고백했다”고 열애 사실을 공개한 바 있습니다. 그 후로 “내 환경도 많이 좋아졌다.”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임채무 그가 고백하길 내가 항상 아침에 눈을 뜨며 생각하는 게 있다. “첫 번째, 내가 벌써 나이가 이렇게 됐나? 두 번째,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보다 수십 배 축복받고 살고 있구나. 사실 현재 내가 은행 빚만 120억 원이고 두리랜드에 들어간 돈이 지금까지 다 합하면 190억 원정도 들어갔다. 그런데 내가 저세상에 가는 날까지 아마 1억 9천만 원도 못 건질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보면 이 나이에 무슨 놀이공원을 운영하느냐? 이거 팔아서 건물이라도 사 놓지 왜 애들한테 시달리냐? 라고 말해 오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럴 땐 그렇게 생각하는 건,내 생활 스타일이고 이건 내 삶이다.”라고 말한다.

이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웃고 있고 눈을 마주치면 서로가 인사를 한다. 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게 단체로 온 아이들이 싸 온 김밥이다. 그럼 내가할아버지 하나 달라`라고 하며 맛을 본다. 물론 안 주는 애들도 있지만 그 웃음과 그 맛이 나에게 있어서는 최고다. 결국 남들이 나를 보고 ‘왜 그렇게 사니? 왜 사서 고생이냐? 사는 재미가 없을 것 같다’라고 하지만, 나는 이 자체가 즐겁고 행복하다. 아이들의 웃음이 마냥 좋은데 어쩌겠나?”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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