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울림 김창완 안타까운 소식 사지 절단의 고통을 느끼는 충격적인 이유” 어떤 이유인지 지금 확인해 보세요.

산울림은 맏형 김창완 씨를 비롯한 둘째 김창훈 씨 그리고 막내 김창익 씨 이렇게 삼형제로 이루어진 가족 밴드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비틀즈만큼 인기를 끌었고 신중현 씨만큼이나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개혁을 끌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이 전설의 그룹 산울림은 김창완 씨의 해체 선언으로 그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과연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김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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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지 않은 어린 시절

김창완 씨는 미 8군 군속 설계사였던 강원도 화천 출신의 아버지와 경기도 개성이 고향인 어머니 사이에서 1954년 출생했습니다. 동생들은 모두 두 살 터울로 김창훈 씨는 56년 김창익 씨는 58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너무나 엄하고 무서웠고 부모의 금실은 좋지 않았어요.

훗날 김창완 씨는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인데 제가 어렸을 적 우리 부모는 금실이 썩 좋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퇴근하실 무렵이면 집안 가득 무거운 침묵이 함께 들려오곤 했지요. 그 무서운 아버지의 이미지로부터 달아나려는 마음이 어린 시절에 저에게 혼자 침묵하고 공상하는 버릇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나만의 공간으로 상상 속으로 도망치곤 했던 겁니다. 이런 버릇은 당연히 커서도 영향을 미쳤지요. 위기 상황이 되면 숨어드는 습관이 고스란히 나타났어요. ” 이렇게 어린 시절은 어두웠지만 김창완 씨는 거의 천재에 가까웠습니다. 동네에서 같이 뛰어놀던 친구들이 두 살 위였는데 이 친구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무작정 따라가서 함께 수업을 듣다가 김창완 씨는 그대로 입학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김창완 씨는 여섯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그대로 대학까지 갔는데 서울대까지 갈 정도로 머리가 좋았던 것이죠. 너무나 심하게 머리 좋은 친구는 곧잘 엉뚱한 면이 있는데 김창완 씨가 중학교 2학년 때 하굣길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몹쓸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할아버지 왜 사세요.”, “아주머니 왜 사세요.”, “누나 왜 사세요.” 고등학생 때 창덕궁에 사생대회를 갔는데 빈둥빈둥 놀다가 그림 제출할 시간이 되자 도시락에 남은 밥풀을 도화지에 문질러 놓고 그 위에 낙엽을 확 뿌려서 발로 밟아 제출했습니다. 제목은 가을이었는데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김창완 씨는 이렇듯 평범하지 않은 소질과 정신 세계를 가진 아이였어요.

음악을 시작한 계기

원래 김창완 씨는 고등학교 때 막연히 음대나 미대를 가고 싶었는데 당시 그런 대학을 가려면 실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재수를 하려고 했는데 결국 담임이 넣은 서울대 농대를 다니게 됩니다. 집안 형편 때문에 사립대를 다니기 어렵다고 생각했고 서울대에 붙어서 그냥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대학생이 되어 드디어 음악을 적극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삼형제는 모두 학업 성적이 좋았습니다. 김창완 씨는 서울대 농대 잠사학과를 다녔고 둘째 김창훈 씨는 서울대 식품공학과 그리고 막내 김창익 씨는 고려대 공대 기계공학과입니다. 삼형제가 음악으로 뭉친 것은 1970년대 초반 그러니까 김창완 씨가 대학생이 되면서부터입니다.

김창완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뜬금없이 기타를 샀어요. 저걸 한 번 사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궁금했죠. 그걸 연습해서 뭘 해보겠다고 생각을 할 만큼 나를 사랑하거나 기대하지 않았어요. 돌이켜보면 그때 굉장히 한심한 시절이었죠.”



1970년대 초반 김창완 씨는 기타를 고물상에서 중고로 500원을 주고 사 옵니다. 그리고 기타 교본을 보고 연습을 하다가 한 달 만에 작곡을 흉내내 봅니다. 그리고 산울림 데뷔할 때까지 100곡 정도를 씁니다.

나중 거의 1년마다 산울림의 정규 앨범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무렵 워낙 많은 곡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에요. 김창완 씨는 음악을 창작하면서부터 극도의 좌절감과 무력감에서 조금씩 탈출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삼형제 밴드 결성

그런 맏형의 영향으로 둘째도 기타를 잡게 되었고 막내는 드럼을 하게 되어 삼형제는 취미로 밴드를 하게 된 거죠. 그러나 이들이 연주하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동네에 원성을 사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계란판을 방 벽에 붙여 방음을 했습니다. 이 당시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의 항의에 사정사정하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취미로 아마추어 밴드를 하다가 1975년 김창완 씨는 대학을 졸업하죠. 이후 1977년 MBC 대학가요제가 처음으로 개최되었는데 삼형제가 무이(평소와 다름없음)라는 밴드로 대학 가요제에 참가합니다. 당시 둘째 김창훈 씨는 샌드페블즈 6기 멤버로 있었는데 샌드페블즈 6기에게 바톤 터치하고 무이로 들어오면서 자작곡 “나 어떡해”를 샌드페블즈에게 주었습니다.

대학가요제의 예선에서 무이는 “문 좀 열어줘”로 1위 샌드페블즈는 “나 어떡해”로 2위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김창완 씨가 1975년 졸업생이라 재학생만 참가할 수 있는 교정이 걸려서 무이는 결국 탈락하고 제1회 MBC 대학가요제의 대상은 샌드페블즈가 탔습니다.

산울림 음악 탄생

이후에 “나 어떡해”가 둘째가 쓴 곡임을 알고 음반을 만들자는 제의가 들어왔는데 삼형제는 그때까지 직업으로 음악을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제 사회 생활을 할 나이가 되었기에 지금까지 해왔던 음악을 마지막으로 기념하는 의미에서 음반 제안에 응했고 이렇게 해서 산울림 1집이 나왔습니다.

산울림은 대중의 반응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단지 음반을 내고 싶었다지만 1977년 12월에 발표한 앨범은 초대형 대박을 치게 됩니다. 이때 레코드 판이 40만 장 팔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기준에서는 상당한 대박이었다고 합니다. 요즘 기준으로는 500만 장에 해당하는 셈이라고 해요. 이렇게 경천동지할 만한 산울림 음악이 탄생하게 됩니다.

산울림의 성공 비결

산울림은 음악을 배워본 적도 없었지만, 또한 흉내 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산울림만의 독창적인 음악이 나왔어요. 실제로 삼형제는 데뷔 전 대학 그룹 사운드가 흔히 하던 카피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산울림만의 독창적인 사운드와 멜로디가 나왔고 거기에 더한 타격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산문체, 구어체의 가사입니다.

지금은 이런 가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당시에는 큰 충격이었어요. 노래 가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정한 운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파격적인 가사였지만 거기에 담긴 서정성은 너무나 영롱하게 빛났습니다.


당시 젊은 세대들은 열광하며 산울림에 빠져들었습니다. 산울림 1기는 1집부터 3집까지로 록의 폭발적인 사운드의 노래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매력적이면서도 독창적인 음악의 완성은 그 당시 심의의 심각한 간섭에 의해서 나왔다고 합니다.

당시는 악보 검열 가사 검열이 횡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사유는 “퇴폐” 내지는 “가사가 너무 슬프다.” 등등 김창완 씨 본인의 말로는 개작 전 가사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굉장히 비관적이고 우울한 가사였다고 합니다.

산울림 2기

산울림 2기는 4집부터 6집으로 두 아우가 군 입대를 해서 김창완 씨 혼자 활동한 시기입니다. 빨간 풍선,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찻잔 등등의 명곡과 동요 1집의 개구쟁이로 유명하죠. 김창완 씨가 말하기를 자기가 순수해서 동요를 쓴 게 아니라고 합니다. 어린 시절 아픔 때문에 유아기적 퇴행으로 현실을 벗어나 숨을 공간을 마련해줘서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산울림 3기

산울림 3기는 아우들이 제대 후 다시 복귀했고 가장 인기 절정기입니다. 오늘날까지 불리는 고요한 위안을 제공하는 서정적인 노래들이 이 시기에 많이 작곡되었죠.

청춘, 회상, 너의 의미, 가지마오, 산할아버지(동요) 등이 발표되었고 또한 1983년에 발표한 김창완 씨의 솔로곡 어머니와 고등어는 이 시기에 소중한 수확이죠. 트로트 같은 창법에서도 김창완 씨의 노랫말의 비범함은 여전했습니다.

산울림 4기 그리고 막내의 죽음

산울림 4기는 아우들이 각자 사업 등을 이유로 빠지고 김창완 씨 혼자 활동한 시기입니다. 극단적으로 어둡고 고독한 쓸쓸한 정서가 한계까지 닿아 있고 이 당시 김창완 씨의 염세적인 심리 상태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큰일이 터지죠 막내이자 드러머였던 김창익 씨는 1990년대 말 캐나다로 이민을 갔지만 이후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꾸준히 음악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2008년 1월 29일 캐나다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합니다. 김창희 씨는 이날 밴쿠버의 언덕진 장소에서 제설 작업을 하다 리프트가 넘어지면서 그 밑에 깔렸습니다. 사고 직후 주위 사람들과 대화가 가능할 정도였지만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어요.


엠뷸런스가 도착했을 때는 산소호흡기를 대야 할 정도로 호흡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병원으로 옮겨진 후 끝내 숨을 거둡니다. 다리가 심하게 다쳐 있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는데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렇게 황망하게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라 더욱 충격이 컸습니다.

향년 50세 맏형 김창완 씨는 SBS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 방송 직후 동생의 사망 소식을 듣고 오열했습니다. 바로 밴쿠버로 달려간 형제들은 막내의 죽음을 마주하고 비통한 마음을 금치 못했습니다. 김창완 씨는 한동안 너무너무 괴로워했고 이후 김창완 밴드를 결성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지 절단의 고통

훗날 김창완 씨는 백지연의 피플 인사이드에 출연해 동생 창익이 떠난 후 “내 몸이 잘린 건 아닌데 잘려나간 듯한 고통을 느꼈다.”고 하며 음악을 같이 해서가 아니라 형제와는 한 몸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동생 이외에는 아무도 그 자리를 메울 수 없는 절절한 심정을 토로한 것이죠. 오늘 준비한 소식은 여기까지인데요. 귀한 보물 같은 음악을 선물해 준 김창완 씨와 산울림 형제들에게 감사 인사와 응원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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