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변희봉 논란으로 갑자기 은퇴 선언?” 그 상황에서 신인 감독에 받은 충격적 제안을 확인해 보세요.

1997년 배우 변희봉은 데뷔한 지 30년이 넘었지만 별다른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가끔 연기를 하고 일이 없으면 1년을 내리 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그 전화는 당시 IMF 사태가 닥치면서 나이 많은 배우부터 출연료를 깎아 솔선수범을 보여야 한다라는 한 방송사 PD의 전화였습니다.

IMF 때문에 어렵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었겠냐?만은 그러나 변희봉은 PD에게 “당신이 언제 내 사례를 제대로 준 적이 있냐? 그냥 당신들끼리 다 먹어라!”라며 쏘아붙이고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당시 그는 원래 출연료를 많이 받는 편도 아닐뿐더러, 배우가 된 지 30년이 넘었지만, 그간 배우라는 직업이 그를 부유하게 해준 적도, 편하게 밥 먹게 해준 적도 없었는데 그런 수모를 겪자, 결국 그는 미련 없이 배우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는 “나는 이제 힘을 잃었다.”라고 말한 뒤, 모든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변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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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로 데뷔

시간을 거슬러 1942년 전라도 장성군에서 한 여인이 6년이나 절에 가서 공을 들인 뒤에야 막내아들로 변희봉이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그는 할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면장 출신이라 마을의 큰일은 모두 변희봉 집에서 결정될 정도로 좋은 집 안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이후 성인이 된 그는 서울로 올라와 제약회사에서 숙직하며 살고 있었는데, 그때 그는 라디오 드라마라는 걸 처음 듣게 되었고 세상에 이렇게 재밌는 게 있다니 이건 어떻게 만드는 걸까?라며 생각하다가 자신도 그냥 시험이나 한번 보자해서 봤는데 덜컥 MBC 공채 2기 성우로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안에서는 어렵게 얻은 막내아들이 성인이 된 후, 뜬금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당시 딴따라라 불리던 방송국 일을 하려고 하자, 집 안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그가 고향에 내려갔을 땐 그의 아버지가 변희봉이 다시 서울로 못 가게 문을 밖에서 잠가놨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끝내 그가 성우로 활동하자, 한 번은 급행열차를 타고 새벽에 고향에 갔는데 아버지가 그에게 눈길 한번 안 주고 담배만 태우다가 “가라! 너는 이제 내 자식이 아니니까.”라고 했던 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삶

그렇게 집안의 극심한 반대에도 결국 방송 일을 시작한 변희봉은 당시 성우 월급이 너무나도 적어 형편이랄 것도 없이 생활이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그가 고향에서는 밥은 먹고 사는 집 자식이었는데 이젠 하숙비가 없어서 수없이 쫓겨 다니자, 괴로움에 그는 밤마다 외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그 시절 변희봉은 너무나도 많은 술 외상값으로 어딜 마음대로 다닐 수도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의 결혼

그때 그는 자신이 하도 돈이 없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누가 돈이나 땅을 많이 가지고 자신한테 시집이나 왔으면’하는 찰나, 지금의 아내와 중매를 보게 되었고 두 사람은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당시 그의 장인은 엽연초 공무원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담배 공사에 있었는데, 그래도 딸을 서울까지 객주로 보내려면 어쨌든 어느 정도 쓸 돈을 줘서 보낼 거라는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결혼식 하루 전날까지 아무런 얘기가 없자, 끝내 그는 그날 술을 엄청 먹어버린 후 “나 결혼 안 해! 나 장가 안 간다.”라며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찌 됐든 그 다음 날, 광주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여기저기 빵이라도 사서 인사를 가야겠는데 이제 마누라 되는 사람한테 “혹시 돈이 얼마나 있냐?”라고 했더니 딱 17,000원을 내놓자, 그는 이것저것 따져놓고 보니까 돈이 하나도 없자 그 이후 정말 기구하게 살았다고 했습니다.

배우의 길

아무튼 그렇게 유부남이 된 변희봉은 그 시절 TV가 급격하게 보급되면서 당시 성우들이 대부분 배우로 옮겨가게 되었고 그 역시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는 배우의 역할로 온갖 잡범, 도둑놈, 간첩, 교주 등의 역할을 맡았으며 그것 때문에 가정적으로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어느 날 6학년 다니는 큰아이가 친구들이 놀렸는지 울면서 들어와, “아빠! 그런 거 안 하면 우리는 못 먹고 사냐?”라며 항의했고 또한 아이들 생활기록부에 아버지 직업을 쓸 때도 아직은 자신이 배우라고 하기에는 마땅치 못해 항상 그냥 방송국이라고 써서 보내야만 했습니다. 당시를 그의 고백에 따르면 “그때는 잘 나가는 배우 몇 명 빼고는 나머지 배우들은 돈을 제대로 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돈도 돈이지만 또한 사람들로부터 자신과 같은 조연들은 얼마나 괄시받고 살았던지 그건 지금도 입에 담을 수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그를 버리지 않았고 점차 그의 역할도 좋아지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누구한테든 자신이 하는 일에 관해 얘기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연기 활동

그는 ‘이완용의 인력거꾼’에서 ‘이완용’ 역할을 했고 흥선대원군의 머슴 연기를 하다가 흥선대원군이 되었으며, 그리고 마침내 1979년 ‘안국동 아씨’에서 변희봉은 그 유명한 점쟁이 역을 맡게 됩니다. 이때를 그가 고백하길 “‘안국동 아씨’에서 내가 점쟁이 역할을 맡았는데 그걸 연기하려고 별별 점쟁이를 다 찾아다녔다.

그래서 그 생각만 하고 사는데 어느 날 꿈에 이승만 전 대통령이 나왔다. 그래서 그 특유의 목소리와 말투를 내가 기가 막히게 따라 하게 되었는데 이후 점쟁이 역할을 그 목소리로 해봤더니 대박이 났다. 하지만 문제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그 흉내를 너무 많이 내는 바람에 문광부, 문교부, 나중에 청와대까지 방송국에 압력을 넣었고 결국 나만 억울하게 드라마에서 바로 하차하게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방송 일이 잘 안 풀리자, 그는 TV를 떠나 이번에는 영화를 하려고 매니저까지 두었으며 그렇게 당시 영화 속에서 그에게 시나리오는 많이 들어왔지만 대부분 남녀가 불붙어서 문제를 다루는 역할들이 많았기 때문에 온 가족이 보는 TV에 나오는 사람이 그런 것을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는 생각에 결국 그는 다시 TV 쪽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갑자기 은퇴할 수밖에 없던 상황

그렇게 TV로 돌아온 그가 1984년 마침내 조선왕조 500년 설중매 편에서 유자광 역을 맡으며 이번에는 제대로 배우로서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때 그가 극 중 손금으로 점을 보면서 그 유명한 대사 “세상이 다 내 손 안에 있소이다.”가 이때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큰 유행어가 되면서 덕분에 그의 인생 최초로 광고까지 찍게 되었습니다.

이후 마침내 당시 서울 가련동에 마음에 드는 집도 하나 장만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MBC 드라마에 개성 있는 연기파 조연으로 출연하며 시청자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주웠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가 들어서면서 최진실, 최수종이 출연했던 질투 같은 트렌디 같은 드라마가 대세가 되자, 그와 같은 고참 연기파 배우들의 설 자리가 조금씩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는 그때그때 벌어서 먹고사는데 점점 일이 없어지면서 또다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 IMF까지 터지면서 앞서 얘기한 대로 방송국에서는 안 그래도 힘든데 그에게 급여를 깎자는 제의까지 하게 됩니다. 결국 이때 그는 더 하면 추접스럽다. 이렇게 사례까지 깎아가면서 배우를 하면 사람 꼬락서니가 뭐가 되느냐?라는 생각으로 끝내 그는 배우 생활 30년을 끝으로 모든 걸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어느 신인감독의 출연제의

그렇게 청춘을 다 바쳤던 배우를 그만두고 서울을 떠나려는 그 무렵, 한 신인 영화감독이 그에게 영화출연 제의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마음을 먹었기에 두말없이 거절했습니다.

“주인공이 아니면 사람으로도 보지 않는 당신들과 또 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며 거절했지만 그 신임 감독은 “자신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수사반장에서 나온 변희봉의 모습을 보고 좋아했다.”라며 “한 번만 해봤으면 좋겠다.”라고 계속 부탁했습니다. 결국 그 성화를 못 이긴 변희봉은 신임 감독 봉준호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라는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신임 감독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출연했지만, 그는 영화가 그냥 그런 수준일 것 같다라는 느낌에 개봉 후에도 그 영화를 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개봉 며칠 후, 봉준호 감독이 “꼭 같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라며 그에게 연락했습니다.


사실 그 영화에서도 그의 역할이 조금 민망한 캐릭터라,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 영화에서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자신을 보고 뭐라고 할까? 하는 민망한 생각에 소주 한 병을 다 마시고 얼굴이 붉게 올라온 채로 봉준호 감독과 영화를 봐야 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순간, 자신이 상상도 못 했던 장면들이 나오면서 그때 그는 “이 신임감독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라며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세계적인 감독이 된 봉준호와 함께 그는 3편의 작품을 더하며 네 번째 작품 옥자라는 영화는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올라, 그는 70세가 넘은 나이에 레드카펫을 밟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고목에 꽃이 피었다.”라고 했으며 그렇게 기다림이 길면 열매도 크다라고 했던가, 그에게도 봄날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생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그가 마지막으로 고백하길 “사람은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내가 어떻게 살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면 한도 끝도 없이 어려워진다. 그리고 시련 없이 크게 오는 것은 없다. 시련이라는 것을 겪어봐야 그다음에 조그마한 행복도 크게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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