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청춘’ 오기택 뇌출혈 투병 중 결국…” 안타까운 소식과 그의 전재산의 행방에 대해 확인해 보세요.

아빠의 청춘이라는 노래를 알고 계시나요? 바로 그 노래를 불렀던 가수 오기택 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83세를 일기로 지병으로 별세했다고 합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미혼으로 살았고 남은 재산은 장학금으로 기부하겠다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평생을 외롭게 살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그의 인생을 돌아보고 그를 죽음으로 내몬 너무나 안타까운 사고를 전해드립니다.

오기택
👉“가수 정수라 정주영 아들 알고 보니…. 여태껏 어찌 숨기고 살았나?” 어떤 상황인지 확인해 보세요.

외로운 어린 시절

오기택 씨는 1939년 전라남도 해남군 북일면 흥촌리에서 아버지 오월봉 씨와 어머니 주장악 씨 사이에 외동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3살 때 부친상을 치르고, 중학교 시절에 모친상을 치러 일찍 부모마저 여의었습니다.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홀로 고향에 살기 어려워지자, 서울에 살던 외삼촌의 도움을 받아 상경해서 성동 공업고등학교 기계과를 졸업했습니다. 그 후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잘한다”라는 얘기를 들었던 그는 자연스럽게 노래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국민 가수로 등극

동화백화점에서 작사가 고복수 씨가 운영하던 동화예술학원에서 노래를 배우던 중, 1961년 KBS에서 실시한 제1회 직장인 콩쿠르에서 동화백화점 대표로 출전해 1등을 차지한 것이 계기가 되어 갈 수로 데뷔합니다. 오기택 씨를 처음 스타로 만든 노래는 1963년 취입한 영등포의 밤입니다.

1960년대 당시 우리나라 산업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영등포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던 서민의 애환과 미래에 대한 꿈과 사랑을 담은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는 3년 뒤인 1966년 남궁원, 엄앵란이 주연한 영화 영등포의 밤의 주제가로 쓰였고, 오기택 씨가 특별 출연해 더욱 화제를 모았으며 더 큰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20대 젊은 나이인데도 청년 오기택 씨는 영등포의 밤을 구성지게 불렀습니다.


한 자락 쫙 깔린 바리톤 목소리로 가슴을 후벼팠습니다. 당시 영등포 사람들은 거의 애국가처럼 불렀습니다. 이 노래에 어마어마한 인기로 영등포 땅값이 크게 오르기도 했고, 2010년엔 곡의 배경인 서울 영등포구에 이 노래를 기리는 노래비가 세워졌습니다.

오기택 씨는 데뷔 직후인 1963년 해병대의 홍보단 사병으로 입대했으며 1965년 전역하였고, 1966년 한 해 동안 아빠의 청춘, 고향 무정, 충청도 아줌마, 마도로스 박 등의 곡들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빠른 시간에 국민 가수로 등극합니다.

노래 ‘아빠의 청춘’

특히 아빠의 청춘은 우리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노래였습니다. 6·25전쟁의 후유증으로 가난과 배고픔 속에서 1960년대는 정말 힘든 시대였습니다. 당시 아빠 세대들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에게만큼은 가난을 물려주지 않아야 한다라는 일념으로 꾹꾹 참고 견뎌야 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나온 노래는 당시 아빠들의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듯 전국적으로 급속히 퍼졌습니다. 이른바 국민가요로 애창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지금도 40대 이상의 남성들은 거나하게 술 한 잔 마시면 단골로 나오는 노래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게, 그는 3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아버지를 주제로 한 노래로 성공한 것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여러모로 아들에게 미안해서하늘에서 아들을 도와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기택 씨는 특유의 그윽하면서도 중후한 저음이 매력적인데, 저음의 마법사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이었냐면, 1967년에는 부산 문화방송 10대 가수상을 수상하는 등 두 차례에 걸쳐 10대 가수상을 수상했고 1970년대 들어서는 일본에서 원정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고향인 해남에서는 2007년부터 매년 오기택 가요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2018년에는 해남에 오기택 노래비도 만들어졌습니다. 그는 평생 외롭게 살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1975년에는 한국 연예인협회 이사장직으로 선임된 데 이어, 1979년에는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장을 맡아 가수들의 침목과 권익을 위해 힘썼습니다. 그런 오기택 씨에게 1996년 좌절의 그림자가 찾아들었습니다.

충격적인 사고

1996년 12월 30일 낚시광인 그는 제주 추자도로 혼자 낚시를 떠났습니다. 며칠간 낚시할 생각으로 도착한 곳은 추자도의 염섬이라는 무인도였습니다. 낚시를 즐기다가 1월 2일 아침 섬을 떠나기 위해 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때 갑자기 어지럼 증세와 함께 왼쪽 팔, 다리에 힘이 쭉 빠지더니 그대로 쓰러졌습니다.

운이 없게도 바다 쪽으로 경사진 낭떠러지 앞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겨우 오른손을 뻗어 옆에 있는 소나무 가지를 잡았습니다. 설상가상 팔의 힘이 점점 빠지게 되었고 바지의 허리띠를 겨우 풀어 오른손을 소나무에다 칭칭 감았습니다. 캄캄한 밤이 되었습니다. 배가 고프면 솔잎으로 허기를 채웠습니다. 입술이 덜덜 떨릴 정도로 진눈깨비에 추위까지 엄습 하였고 졸음을 이기기 위해 아무 노래나 마구 불러댔습니다.


“부처님과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어요. 몸 전체가 꽁꽁 얼어붙어 버렸습니다.” 낚싯배가 온 것은 다음날 1월 3일 오전 10시였습니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극적으로 구출된 오기택 씨는 제주경찰청 헬기로 긴급 후송돼, 제주 한라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았습니다. 4일 오후에는 대한항공 편으로 서울 성모병원으로 옮겨져 뇌 수술받게 되었습니다.

오기택 씨는 이렇게 그 끔찍했던 기억을 회상했습니다. “뇌출혈이 있었지요. 평소 혈압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아찔했습니다. 해병대에서 고된 훈련을 받았기에 24시간을 버텼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 일찍 부모를 여의고,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혼자 재활 치료하느라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결혼을 안 한 후회도 많았어요.”

끝나지 않은 불행

그렇게 그는 58살에 언어장애와 마비증세가 와서 평생 투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몸 상태에서 오기택 씨는 1998년에도 작곡가 김희갑 씨가 쓴 자네 누군가 등이 수록된 앨범을 발매하며 노래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불행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후 2011년 다시 건강이 몹시 악화하여서 서대문구 소재의 요양병원에서 선후배 가수와 해남군 향우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을 이어 나갔습니다. 수술 이후 안 마시던 술을 “이제는 괜찮겠지.”, 하며 마신 게 원인이 된 듯했습니다. 이후 노래를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폐렴까지 걸리게 되었는데 그때는 스스로도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걸 느꼈습니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1부터 100까지 숫자를 세면서 버텼는데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거동이 불편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휠체어에 의지해야 이동할 수 있고, 요양사가 돌봐줘야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헌정콘서트

이런 그를 응원하기 위해 감동적인 무대가 펼쳐집니다. 2014년에 그를 위한 헌정 콘서트가 서울 영등포구 아트홀에서 3시간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이날 헌정 콘서트는 18년째 투병 중인 그를 위해 후배 가수들과 재경 해남군 향우회가 마련했습니다. 오기택 씨를 평소 아껴왔던 코미디언 송해 씨와 이용식 씨, 가수 남상규 씨와 태진아 씨, 설운도 씨, 박진도 씨, 진성 씨 등 20여 명의 남녀 가수들은 이날 열창하며 그의 쾌유를 빌었습니다.

코미디언 겸 가수인 송해 씨는 오기택 씨의 쾌유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내 나이가 어때서 등 3곡이나 불러 참가한 후원 회원들에게 열띤 박수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몸 상태도 그의 노래에 대한 열정을 꺾지 못했습니다. 2015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TV에서 가요무대전국 노래자랑은 꼭 챙겨봐요. 눈물이 나올 때도 있죠. 가끔 제 노래가 나오니까요.” 계속해서 그는 이렇게 밝혔습니다.

“지금도 가끔 방송사 프로그램 제작진이 전화를 걸어와서 출연 의뢰를 한다. 말을 또렷하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거절을 해왔다, 그러나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몸을 만들어 세상 앞에 나서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그는 말을 듣지 않는 몸으로 하루 종일 움직이며 매일 운동하고 있었습니다.

재산의 행방과 마지막 말

오기택 씨는 무대 복귀의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평생 한번 못해본 콘서트를 자신의 돈으로 열고자 했습니다. 콘서트 장소도 정해 놨었습니다. 직접 무대에 설 상황이 안됐기에 후배 가수들이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헌정공연 형태로 구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병세가 악화돼 사망 전까지 수차례 입퇴원을 반복하느라 끝내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서울 여의도성모병원 중환자실에 계셨는데 의료진은 마지막은 편안하게 가셨다고 전했습니다. 고인은 결혼을 하지 않아서 형제들이 상주를 맡았습니다. 빈소는 서울 영등포구 한강성심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고 장례절차를 마친 후 고향인 전남 해남의 선산에서 영면에 들었습니다. 유산은 고인의 뜻에 따라 전액 전남 해남고등학교에 장학금으로 기증되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오기택입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다시 가요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날이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렇게 노래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그는 끝내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25년을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생을 외롭게 살았지만, 어려운 시대에 국민을 노래로 위로하고 희망을 준 고인의 업적에 감사드리며 비록 소망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재활 노력을 꾸준히 해온 불굴의 의지, 인생의 승리자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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