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동준 집과 카페 모두 팔고 돌연 잠적인 충격적인 이유” 어떤 이유인지 지금 확인해 보세요.

혈기 왕성한 남자를 뜻하는 단어인 사나이는 성별을 지칭하는 객관적인 단어 남자를 한 단계 강화한 말입니다. 어머니나 아줌마라는 말이 그렇듯 사나이에는 한국 사회가 남자에게 바라는 여러 가지 의미들이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의미들이 대개 금지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나이가 큰 뜻을 품어야지, 이게 뭐냐? 사나이가 왜 겁을 내느냐?사나이라는 그럴싸한 단어에 한국 남자들은 어려서부터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을 안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이동준 역시 조작 논란으로 난리가 나자, 해서는 안 될 행동까지 하며 사비로만 무려 52억 원을 모두 날린 뒤 집도 팔고, 카페도 팔아 부산으로 잠적할 수밖에 없었던 이동준의 사나이다운 인생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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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1958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이동주는 국민학교 시절 지금의 이미지와 다르게 체격이 그리 크지 않아, 당시 반에서 가장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친구의 가방을 들어줘야 하는 굴욕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동네에 태권도장이 생겨 친구들을 따라 월 회비 400원에 등록하면서 태권도를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얼마 후 파란 띠를 땄는데,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좋고 자신감도 생겨 마침내 덩치 큰 친구에게 정식으로 도전장을 내밀게 됩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학교에서는 그 친구를 힘으로 따라갈 사람이 누구도 없었는데, 파란 띠를 따고 나니 무서울 게 없던 그가 호기롭게 도전을 했지만 태권도를 배운 게 무색하게도 기술 한번 못 써보고 항복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태권도를 배웠음에도 이길 수 없었던 그는 집에 돌아왔는데 분이 풀리지 않아, 결국 동네 친구 5명을 데리고 다시 찾아가 마침내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재밌는 점은 이러한 행동이 자신도 창피했는지 훗날 한 방송을 통해 이 친구를 찾아서 사과하기도 했습니다.

태권도를 그만 둘 수밖에 없던 사연

이를 계기로 이후 태권도 선수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79년부터 국가대표로 활동해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연속으로 금메달을 차지하며 가장 잘나가는 스타 선수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그러다 선수 생활 8년 차에 접어들 무렵,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마침내 태권도가 처음으로 정식 종목으로 채택이 되자, 선수 입장에서 반드시 출전하고 싶었고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은퇴하고자 결심하게 됩니다.

당시 그는 무려 8년간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을 정도로 한국에서는 태권도를 가장 잘하는 선수였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86년 아시안게임의 국가대표는 그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뭔가 알 수 없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억울하게 떨어지면서 국가대표의 자리를 놓치게 됩니다.

이때를 그가 고백하길 “지금 세월이 지났으니까 이야기하자면, 당시 국가대표 선발전 결승전에서 나의 판단이나 관객들의 반응으로 보나 판정에서 내가 이긴 것이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떨어졌다. 사실 국가대표 정도 되면 선수들이 심판보다 더 정확하게 점수를 안다. 그리고 이때는 전자 호구가 없으니까 주심이 배심원들한테 가서 받아서 점수대로 판단하곤 했다. 이날은 이상하게도 30분 동안이나 고민하면서 판단을 안 하더라.


그래서 이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냐면 내가 이겼는데 왜 고민하고 있지? 무슨 일 있나? 했다. 그런데 갑자기 관중석에서 야유가 나오더니 내가 졌다고 하더라. 내 입장에서는 억울하게 패배했으니 당연히 분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고 그때는 정말로 태권도에 대한 배신감이 너무 커서 결국 도복도 찍고 감독, 코치, 심판할 것 없이 다 그냥 엎어버렸다.

그러자 그때 전무이사로 계시던 분이 너 이러면 연금 타는 것까지 문제가 있다라고 할 정도로 정말 이성을 잃었었다. 그러고 며칠이 지나고 비디오 판독했는데 판독해도 내가 이겼더라. 하지만 협회에서 하는 말이 이동준이가 이긴 건 분명히 맞지만, 다시 이걸 엎을 수는 없다. 이동준이 현역 선수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으므로 자질이 안 된다.라고 하더라.

그래서 이때 내가 깨달은 게 이런 게 조작이구나! 그러면 태권도 안 하겠다. 그래서 도복 벗고 거기서 다 찢어버렸다. 세계선수권 대회 3연패에서 국위선양하고 열심히 한 나에게 조작을 해버리니…. 그래 안 하게 하고 그날부로 태권도를 그만 뒀다.”라고 했습니다./

그 유명한 11대 1 싸움

아무튼 이 사건을 계기로 결국 태권도를 그만두게 되었고 그러다 어느 날 지인을 찾으러 무도회장에 갔다가 행패 부리는 불한당과 시비가 붙어 그 유명한 11대 1로 싸워서 이기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는 실화로 당시 특수부대 출신 군인들이 술이 떡이 되어서 무도회장을 깽판 치며 완전히 뒤집어 놓는 상황이었는데, 그가 혼자 나서서 단 1분 만에 깨끗하게 정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여기에는 연예인들도 있었는데, 바로 드라마 수사반장 팀으로 최불암, 김상순 등이 이 장면을 목격하고 그를 좀 보자며 초대한 뒤 “영화에서나 봤던 걸 실제로는 처음 봤다.”라며 “혹시 시간이 되면 MBC로 놀러 오라.”라는 제안하게 됩니다. 그렇게 최불암의 제안을 받고 방송국에 가보니 그날의 이야기가 이미 쫙 퍼져 오히려 그가 연예인들에게 사인과 악수를 해주는 신기한 일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무렵, 한 기자가 그에게 말하길 “이동준 씨는 얼굴도 준수한데 태권도도 관뒀으니 혹시 연예계에 관심이 없냐?”라고 묻자, “기회가 되면 하는 거죠.”라고 답을 했었는데 그의 고백에 따르면 “이것이 발단되어 충무로에서 득달같이 연락이 왔다.”라고 했습니다.

연기자 데뷔

이때를 그가 고백하길 “내가 86년도 2월에 태권도를 은퇴했고 반년쯤 뒤에 한 감독님이 대본 하나를 건네더라. 보니까 내가 주인공이었고 그리고 당연히 액션인 줄 알았는데 뜨거운 멜로였다. 그래서 일단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 사실 고등학교 때 친구 한 명이 영화배우 하겠다고 충무로에 갔다가 돈만 뜯기고 엑스트라로 겨우 한 컷 찍고 온 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처음부터 주인공이라니 솔직히 뜨거운 멜로고 보고 안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하기로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여자친구였던 지금의 아내가 만약 배우가 되면 절대 결혼을 안 한다라고 하더라. 그래서 당시 아내를 설득하느라 가장 많은 애를 먹었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단계적인 연기 수업을 받지 않고, 솔직히 연기의 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당시 그가 출연했던 대부분의 작품이 대사가 그다지 없는 진한 멜로 영화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다 1990년 TV 드라마에도 잠깐 출연하긴 했으나, 나오는 작품마다 모두 망하는 바람에 탤런트 쪽으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그의 고백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본인의 성격이 워낙에 괄괄한 데다가, 사실 이때는 연기 이외에 밤무대 행사가 훨씬 더 쏠쏠했단. 당시 드라마 출연 제의를 거절하고 밤무대 위주로 했었다. 그런데 이것이 방송국에 높으신 분들에게 찍혀서 이후 TV에는 많이 출연할 수 없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그의 말이 맞는 것이 사실 TV에 꾸준히 출연하는 톱스타가 아닌 일반적인 배우나 가수들은 당시 방송 출연보다 밤무대 출연이 금전적으로 훨씬 더 이득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연예인이 밤무대를 기피했던 이유는 밤무대가 애초에 무법지대에 가까워서 취객, 건달 등등 꼬이기 마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동준은 애초에 상대할 실력이 있었기에 자진해서 저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1992년에는 건달 드라마 적색지대에서 주인공을 맡아 당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하지만 배우로서는 여러모로 액션 이미지만 빠르게 소모되어 버린 안타까운 사례가 되어 이 드라마 이후로 또다시 TV 활동보다는 밤무대 행사를 더 선호하게 됩니다.

영화 ‘클레멘타인’ 투자로 집도 팔고 카페도 팔고…

아무튼 그렇게 활동하다가 2004년에는 그의 일생을 바꿔버린 엄청난 사건을 맡게 됩니다. 그건 바로 자신의 태권도 일대기를 그린 영화 클레멘타인이라는 영화를 제작했다가 무려 52억 원을 날려 먹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때를 그가 고백하길 “사실 내가 원래 하고 싶었던 건 배우가 아니라 가수였다. 그래서 내가 미사리에서 라이브 카페를 했었는데 이게 대박이 나면서 정말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다시피 했었다.

당시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냐면 은행에서 돈 세는 기계가 가게에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결국 이게 독이 되어, 만약 내가 이때 돈을 많이 벌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텐데, 돈이 워낙에 많다 보니 이상하게 영화를 제작하고 싶더라. 그리고 때마침 영화에 20억을 투자하겠다는 회사도 만났고 결국 이때부터 사무실을 내고 좌판을 깔았다. 그러나 투자하겠다던 회사가 갑자기 발을 빼면서 이미 내 전 재산은 다 들어간 상태인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집도 팔고, 라이브 카페도 팔아 순수 내 사비로만 52억 원을 들여서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어찌 됐든 영화는 우여곡절 끝에 만들게 되었고 이때 배급사가 다 만든 영화를 9개월 뒤에나 개봉하자고 하는데, 그 이유로는 할리우드 영화 ‘트로이가’ 이 시기에 같이 개봉하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하지만 내가 그게 싫어서 무조건 앞당기자고 밀어붙였다. 사실 나는 밀어붙이는 걸로는 1등이다. 운동하다 보니 판단이 빠르고 판단을 빨리해야 상대를 제압하니까…. 이리 재고, 저리 재는 건, 잘하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개봉한 그의 영화는 의욕만 너무 앞섰던 걸까? 배급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개봉일을 앞당기더니 극장에 걸린 지 3일 만에 막을 내리면서 결국 투자금 50억 원은 고사하고 오히려 빚만 9억이 생겨버린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그에게 가장 한이 되었던 건 “영화관에 오래 걸리지 못하고 단 3일 만에 내려야 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얼마나 한이 되었는지, 그는 돈을 떠나서 “누군가에게 이 영화를 보여줘야겠다.”라는 마음 하나로 무작정 부산에 내려가서 부산 시민회관 KBS 홀을 대관해 달라고 사정한 뒤, 일주일 동안 재개봉하는 기적 같은 일을 해내게 됩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학생들이 단체로 관람하는 등 6만 명이라는 관객이 이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 이걸로 내 한은 다 풀었다, “라며 가슴에 맺힌 모든 한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부산으로 잠적한 이유

그러고 이제 서울로 돌아가려는데 아는 후배가 그에게 한다는 말이 “형님 올라가면 뭐 합니까? 이미 이동준 망했다라고 소문이 다 퍼졌는데, 여기 부산에 그냥 계시죠.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하자, 다시 한번 부산에서 라이브 카페를 시작하게 됩니다.

당시 그는 광안리의 카페를 열어 부산에 있는 터널 광고판을 전부 다 사서 자신의 카페 홍보로 도배를 하였습니다. 터널을 오가는 부산 시민들이 그걸 보고 금방 가게로 몰려들면서 단 1년 만에 9억 원을 청산할 수 있었습니다.

임성한 드라마 캐스팅

그러다 어느 날, 평소 보이지 않는 배우만 섭외하기로 유명한 유명 작가 임성한이 영화가 망하고 부산에 잠적해버린 이동준을 찾으면서 마침내 드라마 아현동 마님으로 TV에도 다시 복귀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신비로운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드라마 아현동 마님을 연출한 손문권 PD가 무려 12살 연상의 임성한 작가와 결혼하면서 이동준에게 주례를 서줄 수 있냐? 라는 제안하자 얼떨결에 그가 주례를 보게 됩니다. 아무튼 이후에도 이들 부부가 그를 캐스팅해서신기생뎐이라는 드라마도 출연하자, 한때 그도임성한 사단에 들어가는 듯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평소 형님이라 부르며 결혼식에 주례까지 부탁했던 손문권 PD가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 하늘로 가면서, 이후로는 더 이상 임성한의 작품에서 그를 볼 수 없었습니다. 또한 당시 임성한 작가를 둘러싸고 여러 의혹이 제기되어 한동안 그녀도 드라마를 쓰지 못하다가, 훗날결혼 작사 이혼 작곡`이라는 드라마로 화려하게 복귀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이동준 그가 고백하길 “살아생전 신성일 선배님이 나를 무지하게 예뻐하셨다. 80년대 당시 인터뷰를 하시면 내 뒤를 이을 자가 이동준이다라고 하실 정도였다. 그러다 선배님께서 영화 제작하시면서 같이 하자기에 출연도 했었는데 이 작품이 완전히 망했다. 사실 이걸 봤으면 훗날 나도 제작을 안 해야 했는데…. 참으로 안타깝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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