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각과 재혼한 김용임의 안타까운 근황” 멀쩡한 집안 분란 만든 이유를 확인해 보세요.

현재 대한민국은 이혼율이 워낙에 높다 보니 이제는 더 이상 결혼한 부부가 반드시 노후를 같이 보낸다는 의미에 백년해로를 찾아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과거 결혼식 주례사의 단골 메뉴였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남편은 부인을 아끼고 사랑하며, 아내는 남편을 공경하라.”라는 덕담도 이제는 역사 속의 한 페이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독신으로 지내는 것은 여전히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혼을 한 뒤에도 남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됩니다. 오늘의 주인공 김용임씨 역시 번갯불에 콩 볶듯 순식간에 이혼당하고, 이혼도 억울한데 남편의 외도 사실까지 알게 되었고, 무려 7명의 시누이에게 있는 돈, 없는 돈, 다 빌려주고 지금까지도 못 돌려받고 있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김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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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던 노래 실력

1965년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김용임은 TV도 흔하지 않던 어린 시절, 하루는 만화방에서 10원을 주고 문턱 멀리서 TV를 보고 와 집에 돌아와서 노래를 막 따라 불렀습니다. 음정, 박자, 가사를 딱딱 맞춰서 잘하니까 그걸 본 아버지가 깜짝 놀라셨고 이때부터 막내딸에게 노래를 시켜야겠다라는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후부터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베이비 가수가 되어 극장 쇼 무대에 서게 되며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김영광, 길옥윤 등 유명 작곡가 사무실을 찾아다닌 끝에 21살의 나이로 마침내 가요계에 데뷔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꿈을 품고 데뷔했지만, 반응이 없자 나오는 음반마다 폐기 처분이 되어야 했고, 또한 당시에는 자신을 가수라고 소개하기가 떨어져 상실감에 꿈을 잃고 한동안은 방에서 나오지 않다고 합니다. 결국 1992년 결혼과 함께 가요계를 완전히 떠나버리게 됩니다.

시련의 연속

이처럼 가수로서 빛을 보지 못하고 결혼 뒤 아이까지 낳으면서 평생의 꿈이었던 가수를 포기하게 되자, 한때는 아버지가 차라리 자신에게 공부에 대해 가르쳤으면 이런 고통을 받지 않았을 텐데….라는 원망까지 했습니다. 당시 아버지가 편찮으시기 시작하면서 집안도 점차 기울어졌습니다. 심지어 이후 남편마저 다른 여자가 생겼는지 너무나도 황당한 이유로 그녀에게 이혼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녀가 고백하길 “내가 첫 번째 남편과 이혼하고 싶어서 했던 게 정말 아닌 게, 하루는 외출 후 화장실에다가 양말을 벗어 놓고 그냥 쉬고 있었는데, 바로 남편의 잔소리가 시작됐다. 그래서 내가 내일 빨면 되지. 별거 아닌 걸로 왜 그래?라고 했는데 그런데도 계속 나를 다그치면서 너무 불같이 화를 내길래, 내가 싫어? 그렇게 살기 싫으면 이혼해!라고 했다. 사실 이건 정말 이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진심이 아닌 괜히 남편한테 투정한 거였다.

그 말을 하자마자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래! 이혼하자고 했으니까 우리 진짜 이혼하자라고 하더라. 그렇게 양말로 꼬투리를 잡아 번갯불에 콩 볶듯 순식간에 이혼하게 될 위기에 처하자, 어떻게든 남편의 마음을 돌리려고 여보. 내가 잘못했어.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이러지 말자. 화가 나고 욱해서 했던 말이지, 정말 이혼하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어라고 하는데도 아주 단호하더라 끝내 남편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결국 이혼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좀 이상하다 싶고,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사실 남편 옆에는 다른 여자가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기회

이처럼 그녀는 이혼도 억울한데 남편의 외도 사실까지 알게 되자 당시 가슴에는 커다란 응어리가 생겨 본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고, 그런데도 생계를 위해서 노래 강사로 일하던 중 마침내 그녀에게도 기회가 찾아오게 됩니다. 어느 날 한 음반 제작자로부터 “메들리 테이프를 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고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었던 그녀는 무조건 하겠다라고 응한 뒤, 별 기대는 안 하고 마음을 비우고 녹음했다.

그런데 이게 대박이 나면서 100만 장이나 나가더니 얼떨결에 오랜 무명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기대도 하지 않고 그저 고속도로 휴게소 판매용으로 만든 트로트 메들리 앨범이 대박이 나자, 당시 음반 사장님이 크게 기뻐하면서 “뭘 해줄까?”라고 물었는데, 이때 그녀가 돈이 아닌 정식 앨범을 만들어 달라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그렇게 탄생한 노래가 사랑하다 병났으니 고쳐 달라고 외치던 의사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열두줄사랑의 밧줄까지 크게 히트하면서 데뷔한 지 18년 만에 아니, 베이비 가수 시절까지 되돌아가면 무려 35년 만에 인기가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새로운 사랑

그리고 이 무렵 마침내 새로운 사랑도 찾아오게 되는데 바로 당시 그녀의 매니저였던 지금의 남편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처음에는 서로에 대한 호감이 전혀 없었으며 그녀가 고백하길 “처음 남편을 가수와 매니저로 만났는데 너무 무뚝뚝하고 공과 사가 명확하길래 속으로, 저런 남자랑 사는 여자는 참 피곤하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나였다. 그리고 우리 남편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되게 화난 사람처럼 보이는 인상으로, 솔직히 말 안 하고 있으면 어디 주먹 쓰는 사람 느낌도 좀 난다. 그리고 당시 남편과 나는 매니저와 가수 관계에서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매일 싸웠다.

그래서 언제 헤어질지 몰라 회사에서는 늘 불안해했었다. 그런데 남편과 일하면서부터 히트곡도 많이 나오고 모든 일이 잘되자, 그때부터는 뭔가 이 사람이 멋있어 보여 결국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재혼 – 7명의 시누이

그렇게 매니저와 가수로 시작된 인연은 서로가 결혼을 논할 정도로 깊어졌지만, 당시 그녀는 남편과의 결혼을 쉽게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은 이미 한 번 갔다 온 상처도 있으며 가장 망설였던 이유로 남편의 시누이가 무려 7명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남편도 그걸 알았는지 “걱정하지 말라”하며 하는 말이 “자신이 누나들 다 이길 수 있고 넌 가만히 있으면 된다. 내가 다 알아서 해줄 테니까.”라고 했는데 실제로도 남편이 10남매 중 막내인데도 불구하고 시누이들이 꼼짝을 못 하자, 이 사람은 정말로 믿어도 되겠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또 남편의 어머니가 아프다고 해서 결혼 전 병문안을 가게 되었는데, 7명의 시누이가 병원에 있자 속으로 겁을 먹었으나 당시 시누이들이 “어머! 김용임 씨 오셨네요. 감사해요.”라며 손님맞이를 너무 따뜻하게 해주니 정말 괜찮겠다. 생각하고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혼 직후부터 시누이들은 눈에 띄게 확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와 관련해 그녀가 고백하길 “결혼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인데 당시 남편의 집안에서는 총각인 남동생이 애 딸린 이혼녀와 결혼한다니까 난리가 났었다고 하더라.

그래서 하루는 결혼을 주제로 집안 회의가 열렸는데 그때 고모부들이 절충했다. 처남이 한 번도 여자를 데려온 적이 없는데 이 여자를 얘기했을 때는 확실한 여자일 것이다라고 해서 시 고모부의 든든한 지원 덕분에 어쨌든 결혼할 수 있었다.


한편 그녀의 남편이 10남매 중 막내였다면 김용임도 7남매 중 막내라, 친정 오빠나 언니들이 연세가 많아서 경제적인 능력이 없다 보니 막냇동생인 그녀가 여러모로 지원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친정에서는 뭐가 필요하다고 하면 늘 그녀에게 전화를 걸곤 했고 그럴 때마다 남편의 눈치를 보다가 결국 하루는 남편이 한다는 말이 “야 너희 집은 대체 왜 그러냐?”라고 하며 해서는 안 될 발언까지 하게 됩니다.

그녀는 굉장히 속상했지만 그런데도 민망해서 “그렇게 우리 집 식구들은 도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어?”라고 하며 오히려 더 큰 소리를 냈더니 그제야 남편이 조용해지는 안타까운 일을 종종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녀는 “내가 우리 친정 식구들을 도와줄 때마다 눈치가 보여서 남편 때문이라도 오히려 더 크게 화를 내곤 했다. 그런데 사실 시댁에서 사업을 하시는 형님 한 분이 그 전부터 몇 번이나 사업 자금을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드렸다.

그러다 점점 금액이 커지더니 한 번은 억 단위의 사업 자금을 요구하길래, 형님 저도 그 정도의 돈은 없어요. 그때그때 벌어서 쓰느라…. 죄송해요라고 했더니 그러면 적금을 깨거나 대출받아서 좀 해줘라고 하더라. 사실 나도 친정에 도와준 게 있어서 마음이 약해졌고 남편에게 이걸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라고 물으니 그동안 잘 돌려줬으니까 좀 해줘 봐.라고 하더라.

당시 적금도 깨고 보험회사에 있는 돈 다 빼고 끌어모아서 형님의 사업 자금을 빌려드렸는데 결과는 빌려준 돈 아직 못 받았다. 결국 돈 안 갚는 시누이에게 전화걸어 형님 이러시면 안 되죠. 금방 돌려준다고 하시고 저 이자도 나가고 그러는데 빨리 해 주셔야겠는데요라고 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이 “내가 주지 말라고 그랬는데 왜 빌려줘서 멀쩡한 집안 분란을 만들어?”라고 하면 적반하장으로 나오길래, 당신 식구들 대체 왜 그래?라고 하고 싶었지만, 더 큰 싸움이 될까 봐…. 비록 나는 당했지만 참고 말았다.”라고 했습니다.

천사같은 손위 형님

사실 그녀의 형님은 남편이 중학교 때, 이 집 안에 시집와서 갖은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김치를 담그다가 이 집안 식구들이 젓갈을 싫어하는 것도 모르고 새우젓을 넣어 난리가 났습니다. 그녀의 남편도 다른 집에 놀러 가거나 항상 어디를 갈 때마다 수저를 챙겨서 다닐 정도로 깔끔한 성격인데, 형님이 그것마저 맞추고 사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형님이 한다는 말이 “도련님 나중에 장가가면 내가 도련님 와이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라며 속으로 벼르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강력한 복수를 꿈꾸던 손위 동서였기 때문에, 남편이 형님을 처음으로 소개할 때 “당신 형수님한테 잘해야 할 거야”라고 하자 “왜”라고 물었더니 “그런 일 있어. 당신이 잘해야 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시누이 살이도 무서운데 동서살이까지 해야 한다생각하니큰일 났다싶었습니다. 막상 형님을 딱 만났는데 형님이 너무 잘해주시자 깜짝 놀라고 말았고 이후에 형님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 집 안에 연예인 김용임이 시집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태껏 내가 하던 일 계속 내가 하고 말지.”라며 결국 복수는 포기하고 다 내려놓았던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동서는 밖에서 일하는 사람이니까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줘야겠다.”라며 항상 천사같은 배려를 해주었고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라고 엄마처럼 따뜻한 위로를 해주자, 감동의 눈물을 펑펑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형님은 적이 아니라, 시댁이라는 전쟁터에서 꽃피운 동지로, 이후 형님한테는 그저 잘해주고 싶은 마음뿐이고 집안에서 버틸 힘이 생겨났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김용임, 그녀가 고백하길 “우리 때도 그랬지만, 요즘 후배 가수들도 데뷔만 하면 금방 대중에게 알려진다고 생각한다. ‘선배님 저는 언제 뜨나요?’라고 묻는 후배들이 많다. 그러면 그럴 때마다 ‘나도 뜨는 데 30년 걸렸다’라고 말해주고 ‘급한 마음을 갖지 말고 실력을 쌓아 놓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전해준다.

언제 뜨냐라는 이야기를 할 시간에 노래연습을 더하고 재능을 닦아 놓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된다고 전해준다. 특히 연예인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밝게 웃어주어야 한다. 행사를 한번 하더라도 좋은 느낌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 불러준다. 그리고 가수는 노래만 잘한다고 될 게 아니라, 좋은 얼굴, 밝은 미소로 보이는 제스처 하나하나까지 상품성을 가지고 파는 것이 가수라는 직업이다.

물론 가수도 사람인데 힘든 순간이 있다. 특히 무명일 때 소속사 매니저도 없을 때,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들다. 그래도 계속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노래가 조금씩 알려지면서 처음에는 모른 척하던 방송국 pd들도 노래가 좋다고 먼저 다가오는 날이 올 거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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