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진성의 아내가 직접 밝힌 그의 충격적인 현재 건강 상태” 어떤 상태인지 지금 확인해 보세요.

진성
👉”가수 진성이 즐겨 먹는 이것은 혈관 건강에 탁월합니다.” 본초강목에도 기록된 이것에 대해 알아보세요.

부모에게 버림받은 어린시절

진성 씨는 어린 시절 2번이나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홍역 접종을 하지도 않은 3살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가버려졌습니다. 당시는 홍역으로 아이들이 많이 죽기도 했는데, 어린 시절 아무도 그를 제대로 돌봐주지 않아 접종하지 못한 그는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스스로 홍역 주사를 맞았다고 합니다.

사실 어머니에게도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고부간의 갈등으로 할머니가 너무 힘들게 하셨고, 아버지 또한 술만 먹으면 폭력을 휘두른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가출하자 아버지마저 어머니를 찾겠다고 나가버렸습니다. 결국 친할머니가 어린아이를 키우게 되었지만 4살 때 할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시더니 병석에 눕게 되었고 할머니는 2~3년 뒤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 후 진성 씨는 그 어린 나이에 친척 집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배고픈 시절 위안이 되었던 노래

진성 씨는 1960년생, 대부분 국민이 가난한 시절로 자기 식구 건사하기도 힘들 때인데 남의 식구인 어린 진성은 더욱 굶주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모님이 없는 것도 서러운데 배고픈 설움마저 견뎌야 했던 어린 진성에게 가장 큰 위안은 노래였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애달픈 노래의 가사가 자기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아 더욱 노래에 빠져들었습니다.

더구나 진성 씨는 노래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습니다. 라디오에서 노래를 들으면 바로 다음 날 따라 부를 정도였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산과 들로 다니며 진달래 등을 따먹으며 허기를 달랬고, 외로운 마음에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녔습니다. 그때 부른 노래가 이미자 씨의 동백 아가씨, 기러기 아빠 등이며 어린아이의 구슬픈 노래를 들은 논밭에서 일하는 어르신들은 “어린아이가 무슨 한이 많아 노래를 저렇게 서럽게 부르냐?”라며 짠해했습니다.

그래서 밥이며 동전 등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밥을 얻어먹기 위해 논두렁, 밭두렁 등지로 배회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군홧발로 차이며 버려진 어린 진성

학교 갈 나이가 되었지만, 부모님이 안 계셔 호적마저 없어 초등학교에 입학하지도 못했는데요. 10살쯤에 주위에서 하는 말을 듣고, 부모님이 자기를 버리고 갈 거면 차라리 고아원에 버렸으면 고아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무상으로 학교도 보내주고 밥도 먹여주었을 텐데…. 하며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고아보다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헤어진 지 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11살이 되던 해에 다시 어머니를 만나 가족이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진성 씨는 12살에 비로소 학교에 처음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나이 때문에 바로 4학년이 되었으며 다시 합친 부모님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심하게 싸웠고 결국 외삼촌이 어머니를 데리러 왔습니다. 어머니 없이 너무나 굶주렸던 어린아이는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며 외삼촌과 어머니를 쫓아 버스정류장까지 따라갔습니다.

버스를 타는 어머니를 따라 자기도 버스에 올라타려는 순간, 외삼촌이 군홧발로 어린아이의 가슴팍을 찼고, 당시 진흙 투성이었던 버스정류장 바닥에 떨어진 어린 진성의 가슴 속에는 그만 한이 맺히고 말았습니다. 부모님이 원수같이 느껴지고 다시는 그들을 찾지 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 어머니와 1년 정도 같이 살다가 또다시 어머니에게 버림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렇게 12살의 어린 진성은 또다시 고아보다 못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상경하여 허드렛일을 하며 키운 가수의 꿈

아버지는 유랑 극단을 따라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다 가는 중학교에 유일하게 홀로 못 가게 됩니다. 교복 입은 친구들이 부러워 숨어다니며 배회하다가 우연히 6학년 담임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에게 서울에 올라가 기술을 배우라며 얼마간의 차비와 숙식비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14살에 홀로 서울로 상경했고, 그때부터 먹고 살기 위해 중국집 배달 일부터 시작해 닥치는 대로 일합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가수에 대한 꿈을 잃지 않아, 15~16살의 유랑 극단에서 일하기도 하고 17~18살에 야간 업소에서 가수 일을 시작합니다. 물론 노래만 부른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허드렛일 등 잡일도 함께 하는 땜빵 가수였습니다.

다시는 부모님을 찾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저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기가 유명한 가수가 되면 부모님이 자기를 찾아오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자신의 신세가 마치 돈이지만 값어치 없는 동전 같다고 느꼈는데, 이 또한 훗날 그가 지은 노래가사로 탄생합니다.

점차 이름을 알리며

어느 날 야간업소에서 일하고 있는데 한 작사가가 다가와 메들리 가수를 제안해서 25살 때 메들리 음반을 출시합니다. 거의 20년간 메들리 가수로 활동하며 10집 이상을 만들었고 메들리 업계에서는 인정받는 가수가 되었지만, 아직도 그는 대중에게는 무명 가수였습니다. 남의 곡을 부르는 메들리 가수에서 자신의 곡을 부르고 싶었던 그는 님의 등불, 내가 바보야 등을 냈지만 당시에는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30대에도 여전히 밤무대를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그의 인생에 서서히 서광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바로 태클을 걸지마 노래입니다. 그는 “이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했어요. 아버지 무덤에 갔다가 이 노래를 짓게 되었습니다. 막걸리 한 잔 올리고, 자기도 술 한잔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버지 환청이 들렸어요.

“너는 그쪽에서 그렇게 오래된 녀석이 왜 아직도 헤매고 있냐? 누가 너에게 태클을 거는 사람이 있으면 아비가 다 막아줄 테니 마음껏 한번 날아봐라.” 그 말을 듣고 불과 5분 만에 가사와 멜로디가 동시에 나왔다고 합니다. 태클을 걸지마는 사실은 자기의 비참한 삶에 대한 절규였다고 합니다. 그 후 2012년 안동역에서라는 노래가 뜨면서 대한민국 곳곳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암과 심장 판막증

그렇게 1년 반 정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을 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젊은 시절에 술로 외로움을 달래는 나날을 보내서 그런지 그는 암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개의 병이 한꺼번에 옵니다.암뿐만 아니라 심장 판막증까지 진단받습니다. 사실 심장 판막증만 해도 대단히 위험한 병인데 림프종 혈액암까지 걸린 것이었습니다.

10대에 가수 생활을 시작해 40년 만에 무명을 벗고 이제 겨우 성공 가도를 달리려는 순간, 너무나 가혹한 시련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때가 2016년 12월 29일이었으며 알고 보니 심장 판막증이면 노래 부르는 것도 버겁다고 합니다. “심장 판막증 진단받고 한두 달 더 노래하겠다고 버텼으면 이미 죽었을 거예요. 노래 부르고 나면 가슴이 당긴 적도 많았거든요.


길거리에 그냥 주저앉아서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음 스케줄 장소로 이동했던 적도 많아요. 그런데 심장이 좋지 않아 암 치료를 바로 할 수가 없었어요. 항암 치료해야 하는데 심장에 무리가 와 쇼크사할 수가 있어서 한 달간 심장부터 다스린 뒤에 항암 치료를 시작했죠.” 나중에 수술하는데 끔찍한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가수의 생명과도 같은 목 부분에 무려 20cm 넘게 절개했어요.

이런 수술은 전신 마취해야 하는데 심장이 약해서 부분 마취하고 수술했는데요. 정신이 말짱한 상태에서 째고 자르고 하는 과정을 다 느끼고 있으려니 그 공포란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골수 채취까지마취 없이 했는데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죽음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으며 사실 너무 힘들어 생을 포기할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6개월 정도를 병상에 누워 있자, 근육이 다 빠져 걷지를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아내의 헌신과 사랑

그는 이제는 노래뿐만 아니라 오디션 예능에서까지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가 이렇게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아내 덕분입니다. 투병 중 너무 힘들어 포기할까? 했는데 아내가 있어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불행했던 과거와 문명 가수인 처지 때문에 원래는 결혼을 꿈꿀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는 50살이 다 되어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안동역에서가 떴는데 덜컥 암에 걸린 것입니다. 결혼하자마자 아내를 힘들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순간, 그녀에 대한 사랑이 더욱 깊어진 계기가 있었습니다. 진성 씨가 퇴원 후 아내는 남편 몸에 좋다고 하는 약초를 캐기 위해 심마니 같은 사람들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항암에 좋다는 ‘야생 백도라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채취하기 위해 4m 정도 되는 암석 위에 있는 백도라지를 캐려다가 발을 헛디뎌 2바퀴 굴렀고 결국 여기저기 꿰매고 타박상을 입게 됩니다.

다친 아내를 끌어안고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평생 한 번도 제대로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그에게 어머니와 같은 희생과 헌신의 사랑을 보여준 아내를 드디어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는 이제 아내만을 바라보는 남자가 되었습니다.

자식이 없는 이유

한편 그의 어머니와는 결국 다시 만났습니다. “아직도 조금 어색하지만, 자신을 낳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자식 된 도리를 다하겠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릴 때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에 진성 씨는 자식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불행했던 유전자를 자식에게 물려줄 수 없다”라며 이유를 밝혔습니다.

심장 기능이 37%?

진성 씨가 2021년 불후의 명곡에서 밝히길 “암은 어느 정도 나았는데 심장이 지금도 기능이 37%밖에 안 된다.“라며 앞으로 가요계의 생활을 얼마나 할지 모르겠지만, 명곡다운 명곡을 남기고 싶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그의 아내도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일 나가면은 또 괜찮을까? 근데 또 아침에 저렇게 일어나서 컨디션 안 좋으면 하루 종일 근심 걱정된다.

집에 올 때까지 편하지 않아요.” 또한 진성은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67살까지 활동할 거고, 그 안에 건강이 안 좋아지면 더 일찍 끝내야죠. 이후로 3년은 노래 봉사 활동하면서 지내려고요. 작은 재단이라도 만들어서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진 애들한테 보태주고 싶어요. 나름대로 머릿속에 그리고 있긴 한데 잘 이루어질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항상 밝게 웃으며 열심히 활동하고 노래 부르는 모습은 정말 뭉클합니다. 부디 건강관리 잘하셔서 많은 사람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노래 오래오래 불러주시기를 바랍니다.

관련 영상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You may also like...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You cannot copy content of this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