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세 박술녀 뒤늦은 충격 고백 “故 김자옥 남긴 또 다른 유언”에 대해 확인해 보세요.

박술녀
👉”김자옥이 마지막으로 남긴 메모를 보니 가슴이 미어지네요.” 뒤늦게 공개된 메모에 내용을 확인해 보세요.

故 김자옥의 마지막

한복은 평소에도 입을 수 있지만 탄생부터 삶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날에 입는 옷이라고 합니다. 요즘에는 수의 대신 한복을 입는 경우도 많습니다. 배우 김자옥은 한복 명인 박술녀의 한복을 수의 대신 입었습니다. 김자옥이 눈을 감은 뒤 박술녀는 개그우먼 이성미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선생님 자옥 선생님이 운명했는데 선생님 옷을 입고 가신대요'”라는 이성미의 말에 박술녀는 비단으로 속바지를 만들어 필요한 걸 챙겨 보냈습니다. 박술녀는 “한복을 입고 가는 분들이 많다. 내가 건강할 때 잘 입던 한복을 세월이 지나서 잘 보관했다가 다시 입고 떠나는 것이다`라며 김자옥을 떠올렸습니다. 이렇듯 박술녀의 한복은 최고의 한복으로 꼽힙니다. 자신의 이름이 브랜드가 되기까지 그녀의 삶도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출산할 때도, 암 투병할 때도,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박술녀는 일하고 있었습니다. 바쁜 나날로 이혼 위기까지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후회가 많은 세월이었지만 여전히 그 일을 놓지 않고 있는 명장입니다.

가난한 어린 시절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할 만큼 지독하게 억셌던 가난을 딛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한복 디자이너가 되기까지 그녀는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요? 눈먼 점술가로 가난과 사투한 박술녀의 외할머니는 아기 때 강아지가 눈을 핥은 후로 앞이 보이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이후 박술녀 할머니는 다른 집에 아이를 낳아주러 가게 됐지만, 딸만 둘을 낳아 쫓겨나고 말았다고 합니다. 가난 때문에 박술녀의 어머니는 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에 박술녀의 어머니는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 동생을 엎고 서당 앞에서 공부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삶의 이치와 지혜를 알게 됩니다. 박술녀라는 이름은 그렇게 가난으로 고생하던 외할머니가 부자가 되라며 지어준 이름이었습니다. 박술녀는 열두 대문을 달고 산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박술녀는 쉽게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노름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았고 어머니가 아버지 대신 가장으로 생계를 이어갔지만 하루 세 끼를 먹는 건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박술녀는 그런 가난 속에서도 꼭 친척 결혼식에 갈 때는 한복을 입었고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박술녀는 한복을 만들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박술녀는 결국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유일한 학창 시절인 초등학교 시절조차 자신의 가난한 형편 때문에 틈만 나면 학교에 결석했습니다.

한복 디자이너로 자리매김

박술녀는 이후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탓에 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천안의 방직공장 여공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26살 때 한복의 전설이라는 이라자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서 한복을 배우게 됩니다. 하루에 잠을 4시간만 자고 발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바느질하면서 반복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5년 만에 독립하며 자신의 가게를 차리게 됩니다. 그리고 박술녀는 처음 군자동에 냈던 한복집을 강남으로 진출시켰고 수많은 연예인이 즐겨 찾는 명품 한복 디자이너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미남형 남편과 결혼

박술녀는 체격도 권장하고 덩치도 큰 여장부 스타일이기 때문에 남자들로부터 호감을 얻기 힘들었지만, 자신이 반했던 성격도 좋고 얼굴도 잘생긴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됩니다. 남편의 직업은 당시 체신공무원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박술녀를 대신해서 집안일을 돌보게 됩니다.

남편은 원래 안정적인 직장에 잘생긴 외모, 좋은 성격까지 두루 빠질 것이 없었던 1등 신랑감이었고 박술녀는 평범한 아가씨였습니다. 맞선을 통해 만나게 되는데 박술녀는 남편을 첫눈에 보고 반했습니다. 이에 박술녀는 남편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하게 되었고 결국 남편도 넘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남편의 젊을 적 사진을 보면 선이 굵은 남자다운 외모에 미남형으로 첫눈에 반했다라는 박술녀의 이야기가 이해될 정도입니다. 27번의 맞선 끝에 만난 남편은 한 번씩 여행을 가고 1년만 딱 만난 다음 결혼하자라고 했지만, 박술녀가 결혼하자고 애원했다고 합니다.


부부는 아들과 딸 한 명씩을 낳았는데 출산을 한 후에 박술녀의 이름을 내건 한복집이 유명해지면서 차츰 일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박술녀의 한복이 차츰 알려지게 되면서 박술녀는 결국 남편을 설득해서 자기 대신에 집안일을 하게 했다고 합니다. “우리 애들 어릴 때도 나는 나와서 일해야 했어요.

그래서 남편이 다 키웠어요. 남편은 공무원이었어요. 그런데 그 일을 관두고 아이를 키웠어요. 남의 손을 타기 싫었어요. 남편 역시 깊이 고민하다가 당시까지 20년을 해오던 체신부 공무원을 그만두고 집안일과 육아에 나서게 되었는데요. 이 이유는 자신의 공무원 생활보다 아내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더 좋다는 판단 때문이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나서 박술녀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소홀했던 점을 크게 후회했습니다. “내가 제일 잘했다고 생각하는 게 결혼해서 자식 2명 있는 거예요.

더 잘했다고 생각하는 게 이혼 안 했다는 거예요. 가장 후회되는 게 아들이 34살, 딸이 30살이에요. 외국에서 의대를 다니고 있어요. 애들을 한 번도 안아준 기억이 없어요. 그게 서글퍼요. 애들 꿈이 뭔지 몰랐어요. 내가 50세 되면 요리 배워서 남편 밥 차려주려고 했는데 더 바쁘더라고요.”

후회의 연속

이런 박술녀 부부에게도 이혼의 위기는 있었습니다. 두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박술녀는 키우던 개의 식사를 제때 챙겨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한꺼번에 개밥을 준 적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남편과 말다툼을 벌이게 되는데 남편이 ‘이혼하자’라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결국 이혼하러 서초동 법원까지 가게 됩니다. “이혼 도장을 찍기 전 남편에게 도장을 챙겨 오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해 가까스로 이혼할 뻔한 위기를 넘길 수 있었어요. ‘이혼하자’라는 말은 부부 사이에 절대 해서는 안 될 금기어인 것 같아요.”


부부의 위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박술녀는 일에 몰두하며 살다 보니 건강을 챙길 수 없었습니다. 갑상선암에 걸렸을 때도 걸린 상태로 호스를 뽑고 뛰어다니며 일했고, 양수가 터졌을 때도 양수인 줄 모르고 일을 했습니다. 출산 후 무통 주사를 꼽고 미싱을 할 정도로 일을 중심으로 박술녀의 인생이 돌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박술녀는 “일을 얼마나 했냐는 건 말할 수가 없어요. 어머니가 운명하셨는데도 손님이랑 약속해서 거길 갔어요. 지금은 슬퍼요. 그때는 몰랐어요. 어머니 돌아가시고 너무 슬픈 게, 슬플 경황이 없어 슬펐어요. 그렇게 일했어요.”라고 털어놨습니다. 박술녀는 “안쓰러운 게 내 명함에 얼굴이 있어요. 어머니가 명함을 바라보고 계셨었다고 하는데 그게 슬픈 줄 몰랐어요. 언제 한 번 오냐?라고 하면 짜증을 냈어요. 바쁘고 바쁜데 왜 자꾸 전화하느냐?라고 했어요.

그게 후회가 돼요.”라며 눈물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돌이켜보면 후회가 많은 삶이기도 했지만, 그 또한 그녀가 살아온 인생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일에 집착하고 몰두했나?하고 후회할 때도 있지만 여전히 일이 많고 그 일을 모두 해내고 있는 박술녀입니다. 앞으로도 건강하게 계속해서 우리의 한복을 널리 알리는 명장으로 활약하는 모습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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