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처럼 살다가 떠났습니다” 84세 김지미 안타까운 인생사에 대해 지금 확인해 보세요.

한국 영화계에 살아있는 전설이자, 파란만장한 남성 편력 때문에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 불리는 배우 김지미는 당시 한 감독이 그녀를 보고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예쁠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만큼 당대 최고의 스타이자 그야말로 미녀의 대명사였습니다. 또한 보수적인 대한민국 사회에서 여장부 소리를 들으며 화통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그녀입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있는 걸 잘 한다., 살아보니 대단한 남자가 없더라.라며 결혼의 고수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연이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끝내 의식을 회복 못해 아들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그녀. 그리고 보통의 여자라면 그 절반의 삶조차 감당키 어려웠을 텐데 살고 헤어질 때마다 팔자가 그렇게 센 여자가 어딨는지, 본인의 인생을 불행이라고 고백한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김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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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데뷔와 첫번째 결혼

1940년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난 김지미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업을 크게 운영하였습니다. 그 어려운 1950년대에 뷰익라는 최고급 자가용을 타고 초등학교를 등교할 만큼 엄청나게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형제들이 다들 인물이 좋고 공부도 잘해 큰오빠와 큰언니는 서울대를 나왔으며, 둘째 언니는 이화여고 대표 미인 소리를 들었고 그녀 또한 일찌감치 자신의 장래를 외교관으로 정해놓고, 당시 서울대를 다니던 큰오빠를 따라 미국 유학을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친척 언니가 운영하던 명동 다방에 놀러 갔다가, 웬 검정 고무신을 신고 들어온 괴상한 인상의 남자로부터 “영화에 출연할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받게 됩니다. 이 남자는 김기영 감독으로, 당시 김지미를 보고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예쁠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라며 광화문 근처 그녀의 집까지 찾아와 배역을 제안했고 이후 집안의 사람들과의 논의 끝에 결국 배역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게 김지미는 18세 겨울에 데뷔해서 19세에 영화가 흥행했고 그다음 해 20살 때는 아직 너무 어린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12살 연상의 노총각인 영화감독 홍성기와 갑작스레 결혼하게 됩니다.

훗날 그녀의 고백에 따르면 “당시 한국 영화계에서 군림하던 홍 감독이 본인에게 끈질기게 결혼하자 그러니까 어린 나이에 그럼 결혼해야 하는 건가보다 싶었다. 솔직히 아무 경황도 없이 사랑이라는 감정도 제대로 모르고 결혼했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남편 홍성기는 영화 촬영으로 늘 바쁘고 그녀 역시 일주일에 1~2번 집에 들어갈까, 말까 하는 상황이 되자, 가정을 중요하게 보지 않게 되어 결국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이혼과 간통

물론 이혼의 직접적인 사유는 세간에 알려진 데로 최무룡과의 연애 때문이기도 합니다. 당시 그녀가 첫 번째 결혼 후 최무룡과 같은 영화사의 전속 배우가 되었으며 남편 홍상기는 볼 시간이 없고 잘생긴 최무룡과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늘 촬영 현장에 앉아, 서로의 속상한 얘기 같은 걸 털어놓다 보니 어느새 정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김지미도 김지미지만, 당시 최무룡은 배우 강효실과 결혼한 유부남으로 막 최민수를 출산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처럼 강효실은 최민수를 낳자마자 열흘 만에 남편과 김지미의 사이를 확인하고 결국 두 사람은 간통죄로 구속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때 김지미가 돈이 없던 최무룡을 대신해서 그 당시 대한민국 위자료 중 최고 금액인 400만 원을 지급해주며 석방과 동시에 큰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20대의 여배우가 이 정도의 사건에 연루되면 사실 한국에서는 거의 은퇴나 마찬가지였으나 그녀는 사건 후에도 변함없이 배우로서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훗날 그녀의 고백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이 참 희한한 게 나를 욕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또 한편에서는 우리가 못하는 거 실컷 해서 통쾌하다. 당당하게 잘했다.라는 얘기를 편지로 전화로 전해왔다.” “당시 한국 사회가 보수적이었다고 하지만 나의 불륜 사실을 내신 부러워하는 사람도 많았던 것 같다.”라고 했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단순한 간통을 넘어서 1남 1녀를 낳으며 최민수에게 이복형제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최무룡과의 이혼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들은 돌이 지날 무렵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참고로 그녀가 최민수를 잠시 맡아 기른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훗날 최민수가 성장한 후에도 김지미를 어머니처럼 모셨다고 합니다. 사실 최민수가 엄청난 대인인 셈입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와 김지미의 관계로 인해 친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했고 이후 대부분을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는데도, 대외적으로 김지미에 대해 험담하거나 원망을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말하기를 “정말 이상하게도 그런 원망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돌아와 최무룡은 김지미와 재혼 후 영화배우를 넘어서 어느 날부터는 감독과 제작에도 손을 대기 시작하는데 그리고 그럴 때마다 김지미가 사비를 털어서 지원했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최무룡의 계속되는 영화 흥행 실패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채, 1969년 두 사람은 결국 이혼했습니다. 그러나 훗날 김지미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최무룡과 사이에는 경제적인 문제 외에 좀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최무룡이 영화를 제작한다고 집에 들어오지 않자, 행방을 수소문해 보니 아침 일찍 세종로 다방에 커피를 마시러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딸을 등에 업은 채 남편이 나타난다는 다방에 아침 일찍 진을 치고 기다리게 됩니다.

그러자 얼마 후 밤새 마작을 한 남편과 그 일행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다방에 들어왔고 그때 김지미가 “아이고~ 영숙이 아버지 이러면 안 돼요, “라고 외치며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창피를 주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최무룡이 “여보 미안해 이러면 몸 상하니까 진정해.”라며 오히려 김지미의 건강을 챙기면서 걱정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김지미는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도 영화 제작을 그만두기를 바라는 것도 노름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고백에 따르면 “당시 최무룡이 이 여편네야! 새벽에 어딜 찾아와!"라고 소리치며 자신을 신나게 혼내주기를 바랐으나 그 사람이 오히려 내 몸을 걱정하자,아! 이 사람은 내가 평생을 맡길 남자가 아니구나.`라고 느끼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녀는 자신을 제압할 강인한 남자를 원했는지 어쨌든 최무룡과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나훈아와의 인연

이후 이번에는 11살 연하의 강한 남자 나훈아와 만나게 됩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연상연하 커플이 드물었기 때문에 또 한 번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게 됩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두 사람은 혼인신고는 한 적이 없고 1976년부터 82년까지 동거한 것으로 사실혼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원래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고 같이 다니는 사이일 뿐이었으나, 언론에 오해로 교제 중이라고 보도가 나가자, 이에 김지미가 오기가 생겨 정말로 교제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김지미는 나훈아와 오랜 동거에도 결혼은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나훈아와의 관계가 연인보다는 스승과 제자에 더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당시 나훈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그녀가 예절과 서예 등 다방면에 걸쳐서 그를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나훈아 역시 훗날 “김지미는 나를 남자로 만들어준 사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앞서 얘기했던 최무룡 때 사건처럼 자신을 꽉 잡아줄 수 있는 카리스마 있는 사람을 원해서 두 사람은 6년 정도의 동거 끝에 또다시 각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네 번째 결혼

그러다 1991년 대망의 네 번째 남자이자 세 번째 남편인 의사 이종구를 만나게 됩니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연예계 쪽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종구가 김지미의 어머니에게 참 잘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 역시 의사 사위를 두면 당신이 좀 더 오래 사실 걸로 생각하셨는지, 그녀가 조금만 관심을 보여도 어머니가 그렇게 자꾸 떠미셨다고 했습니다.

이후 이종구가 8개월 동안이나 러브레터를 보내면서 결국 김지미의 마음을 얻게 되었고, 그녀 역시 애정은 둘째치고 노년의 편안한 상대가 옆에 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침내 네 번째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이 서로 지지고 볶으면서, 금세 이리 와봐 하면서 껴안고 서로 사랑을 확인하는 게 건전한 가정인데, 의사 남편과 결혼한 이후에는 항상 “네 그러세요.”, “다녀왔습니다.”, “안녕히 다녀오세요.”라며 격식만 차리게 되고 거리감만 생겨서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몹시 피곤하게 살던 그녀는 “그때 자신이 만약 20~30대였다면 진작에 이혼했을 텐데…. 여섯 명이나 되는 손자, 손녀들 때문에 장작 11년이나 참고 산 뒤에야 뒤늦게 이혼하게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훗날 그녀의 고백에 따르면 “본인이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후회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하지만 이번만은 왜 진작 이혼을 안 하고 11년을 끌었는지, 처음으로 자기 삶에 있어 후회하게 되었다, “라고 했습니다.

최무룡 별세 – 영화처럼 살다 갔습니다

이종구 박사와의 결혼 생활 중 김지미는 최무룡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되는데 심장마비로 쓰러져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 최무룡의 빈소를 찾은 김지미는 눈시울을 붉히며 “그분과 한 가정을 꾸렸었고 함께 촬영 현장에서 동고동락하면서 영화를 배운 후배였습니다. 고인은 인간적이고 예술가적 기질이 풍부한 사람이어서 영화처럼 살다 갔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불꽃을 영화에 바치겠다는 게 그분 생각이었는데 아쉽게도 너무 일찍 떠났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영화계 후배로 영화인 협회 이사장으로 영화사의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긴 그분을 내 손으로 보내드리는 게 당연합니다.”라며 당시 영화인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던 김지미가 결국 최무룡의 장례위원장까지 맡으며 마지막을 함께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신과 결혼했던 사람 중 누가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그래도 최무룡이 인간성이 참 좋았다.”며 대신 “성격 좋고 동료애 많은 것 때문에 맺고 끊는 게 부족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최무룡도 후회 한 매체에서 김지미와는 홍콩에서 첫 밤을 보냈다는 것까지 밝히기도 했지만 김지미는 서울에서 처음 남녀 관계가 이루어졌다며 자신의 기억은 다르다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그녀는 또한 “결혼은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 가장 편한 상대와 해야 한다는 걸 제가 이 나이가 돼서야 깨달았어요. 집안 좋고 돈이 많다고 해서 그 집에 딸을 시집 보내려고 하지 마세요. 딸이 불행해져요. 저는 조카들에게 다른 것은 보지 말고 그 사람의 장래에 희망을 걸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다고 말합니다. 완전하게 갖춰진 사람을 만나려고도 하지 말라고 하지요. 완전하게 갖춰진 것을 얻으려면 그만큼 희생이 필요하니까요.” 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돌아보면 김지미도 이렇게 인생의 참뜻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런 그녀도 이제 어느덧 8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는데요.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며 산전수전을 거쳐온 그녀의 남은 인생의 행복만이 가득하기를 기원하며 배우 김지미에게 여러분의 따뜻한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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