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아버지 배우 숙환으로 결국…” 세 번 자살 시도, 빚에 허덕이다가 아들까지 잃은 안타까운 그의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이순재 신구 등과 함께 반세기를 풍미해온 원로배우 송재호는 지난 2020년 11월 7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무려 120여 편의 작품에서 다양한 역할로 대중과 만나며 60여 년의 시간 동안 배우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지병으로 1년 이상 투병 생활을 하던 중 향년 83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여느 연예인들이 그러했듯 송재호의 삶도 늘 순항은 아니었습니다. 젊은 시절 영화 제작사를 차리게 되지만, 망하면서 큰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고 사채로 빚을 갚는 등 악순환이 반복됐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사업에 실패함과 동시에 아끼던 막내아들을 잃기까지 합니다. 고인은 이러한 자기 삶에 비관하여 삶을 끝내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시도도 여러 차례 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다시 일어섰고 뜻깊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작품 속 인물처럼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을 되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국민 아버지
👉“배우 박원숙 전남편들로 인해 전 재산을 날리고 하나뿐인 아들마저 결국…” 그녀의 기구한 인생사에 대하 확인해 보세요.

그의 데뷔

1937년생인 송재호는 평양 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와 어머니를 연이어 잃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부산으로 월남 이후 1959년 부산 KBS에서 성우로 방송국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보다 넓은 세상에서 연기하고 싶다라는 마음에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아는 사람 없는 충무로에서 우연히 먼저 연기자로 데뷔한 지인을 만나 그의 소개로 영화 하녀로 유명한 김기영 감독을 만나 다짜고짜 영화를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내 영화에는 쌍꺼풀 없으면 출연 못 한다.”라는 말과 함께 퇴짜를 맞았고, 오기가 발동해 곧바로 성형외과를 찾아 쌍꺼풀 수술받기까지 했습니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에는 출연하진 못했지만 이후 박종호 감독과의 인연으로 1964년 학사주점에 출연하며 본격적인 배우의 길로 들어섭니다. 1968년 86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KBS 드라마 오디션에 합격하며 특채 탤런트로 선발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제2의 인생을 열었습니다.

그의 전성기

이후 주연을 맡은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의 흥행과 함께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극장 앞에서 골목까지 줄을 선 사람들을 보니 눈물이 났어요. 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에 사람이 그렇게 몰렸다는 사실에 감격스러웠죠.” 장미희와 함께 주연을 맡은 김호선 감독의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도 크게 성공했습니다.

선한 인상 때문에 중년이 된 이후에는 주로 인자하고 정 많은 아버지 역할로 많이 출연했지만, 젊은 시절에는 반항아 등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했습니다. “그때는 항상 내가 최고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눈에 보이는 게 없었던 거죠.

지금은 나이가 들어 쭈글쭈글해졌지만, 그 시절 내 우상은 제임스 딘이었어요. 하루에 담배를 3갑씩 피우고 양주를 두 손에 들고 병나발을 불고 술 마시고 운전한다고 객기도 부리고 그랬죠.”

사격 마니아

1973년부터 취미로 시작했던 사격의 실력이 일취월장해서 전국 체전에 4번이나 출전할 정도였습니다. 박종규 전 청와대 경호실장과의 인연으로, 총을 잡은 뒤 플레이 사격 마니아가 됐습니다. 1979년 서울용호구락부 소속 사격연맹에 선수로 등록됐고 이후 전국 체전에 출전해 금메달을 딸 만큼 실력이 취미 수준을 넘어서기도 했습니다.

국제사격연맹 심판 자격증도 갖춰 1986년 아시안게임 사격 종목 국제심판, 1988년 서울올림픽 사격 종목 보조심판으로도 활약했습니다. 불교도인 어머니에게서 미물이라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교육받았던 그는 “오래도록 사격에 빠져 살았지만 한 번도 동물 살상 목적으로 총을 들지 않았어요.”라고 했습니다.

대한수렵연합회 부회장 겸 밀렵감시단장을 지냈던 이유이기도 하였습니다. 밀렵이야말로 생태환경을 위협하는 만행이라고 했던 그는 한 인터뷰에서 밀렵을 단속하다 목숨을 잃을 뻔한 위협을 겪기도 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영화배우 활동

1980년대 한국 영화가 쇠락하면서 영화와 점점 멀어진 뒤엔, 주 무대를 TV로 옮겼습니다. 조연이나 단역 배우들에게 인격적인 대우를 하지 않는 영화 현장에 대한 불만으로 영화계를 멀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2001년 개봉한 무사 출연을 계기로 다시 충무로로 돌아옵니다. 이후 봉준호 감독의 출세작 살인의 추억을 비롯해, 그때 그 사람들, 화려한 휴가, 해운대 등에 출연했습니다. 2013년까지는 매년 한 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이후 2년에 한 편꼴로 출연작이 줄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9년 개봉한 자전차왕 엄복동, 질투의 역사로 충무로와 작별을 고했습니다.

빚으로 시작된 시련

이렇게 남들이 보기에 매우 호탕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했을 것 같은 송재호였지만, 사실 속으로는 곪고 있었습니다. 혈기 왕성하고 성공 가도를 달리던 송재호는 30대 초반에 영화 제작자로 나섰지만, 곧바로 망해서 1억 원이 넘는 빚을 지게 됩니다. 엄청난 빚 때문에 은행을 이용하는 것에 한계를 느껴 사채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사채로 빚을 갚는 등 빚으로 빚을 갚는 악순환이 계속됐습니다.

한 번은 사채업자에게 하도 시달려 날붙이를 배에 대고 “오지 마! 한 발자국만 더 오면 확 그어버릴 거야.”하고 위협을 가해 사채업자들의 봉변을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 괴로웠고 삶의 희망도 보이지 않았어요. 늘 쫓기듯 찌들어 사는 인생이 너무 힘든 나머지 목숨을 끊으려고 세 번이나 시도했었죠.

약을 먹고 끊으려고 했는데 실패했어요.” 힘든 생활 속에서 양주 2병을 한입에 물고 나발을 불고 하루 5갑의 담배를 피웠던 송재호는 1980년 고정 출연하던 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패널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가게 되면서 차츰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됩니다.

막내 아들의 사고

하지만 송재호에게 시련은 그치지 않습니다. 다시 영화 제작자로 재기를 시도했던 2000년 영화사를 차렸지만, 2001년 미국 세계무역센터 테러로 인해 뉴욕 현지 촬영 영화가 무산되면서 다시 경제적인 타격을 받습니다. 게다가 막내 아들까지 교통사고로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충격으로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고, 극심한 충격과 분노로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기까지 했습니다.

“교통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다급히 강릉으로 달려갔는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어요. 우리 막내가 먼저 가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더라고요. 28살 다 키워놓은 장성한 아들인데, 5명의 자식 가운데서도 막내라서 유난히 정이 많이 가는 아이였어요.” 그러나 힘들었던 막내 아들의 사고는 그의 가족을 다시 뭉치게 했고, 비뚤어진 생활을 하던 큰 아들도 마흔이 넘어 성직자가 되면서 다시 용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항상 그의 곁을 지켜준 아내

그리고 송재호는 2005년이 되어서야 겨우 빚과 이자를 모두 갚게 됩니다. 50년을 이자를 갚기 위한 인생으로 살았던 셈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혼자 견딘 것은 아닙니다. 일찍 결혼했기 때문에 부인이 항상 옆에 있었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모른 척하고 있고 집사람이 알아서 다 해결했어요.

아이들도 모두 사회에서 제 몫을 하게끔 반듯하게 키워주었고요. 아내가 세상을 뜨면 나는 울음이 그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먼저 가야라는 생각하죠. 내가 집사람에게 해준 게 없어서 그 어떤 말로도 고마움을 대신할 수 없어서 미안해요.”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부인과 관련된 내용은 매체를 통해 일부 알려진 게 전부였습니다. 측근에 따르면 아내는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송재호의 실제 모습은 드라마 부모님 전상서와 가장 흡사하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온갖 풍파를 겪었지만, 내색도 없이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2020년 11월 7일, 1년 이상 앓던 숙환으로 그는 숨을 거둡니다. 고인은 연기뿐만 아니라, 사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목소리를 냈습니다.

한국방송연기자 노동조합 대외협력국장은 부고 소식을 접한 뒤 “선생님은 조합 행사나 시위 때 늘 함께 자리해 주셨습니다. 유명 배우 입장에서 쉽지 않은 일인데도 맨 앞줄에서 현수막을 들어주는 그런 분이셨습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이 있기에 여전히 그의 부재가 실감이 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자하고 따뜻한 우리네 아버지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던 그가 부디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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