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자 마침내 입을 땐 충격적인 사실” 그녀가 쉴 수 없었던 진짜 이유를 확인해 보세요.

여성 코미디언 최초로 방송 3사 시상식에서 2관왕 대상 수상자인 이영자는 여전히 여러 방송에서 활약을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50대인 이영자가 실버타운 입주를 계획 중이라고 밝혀 궁금증을 자아냈었습니다. 활발하게 활동을 하는 이영자는 왜 실버타운 입주를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가족사
👉“40년간 장수 진행자로 활약하던 임성훈의 최근 안타까운 근황” 옆에서 지켜본 박소현이 눈물을 흘린 이유에 대해 알아보세요.

그녀의 어린 시절

엄마에 대해 지극히 생각하는 이영자이지만, 사실 이영자는 어린 시절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아 열등감이 컸을 정도였습니다. 어린 시절 이영자는 생선가게를 하는 부모님과 살았습니다. 이영자는 생선 냄새가 창피했고, 혹시 제 몸에서도 냄새가 나지 않을까, 항상 전전긍긍했다고 합니다.

생선가게 딸이라는 콤플렉스가 어디를 가나 냄새부터 맡는 습관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철저히 남아선호사상이었다는 어머니는 평생 이영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철저히 남아선호사상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나중에 알았어요. 닭다리가 그렇게 맛있다는걸…. 언제나 닭다리는 오빠고 닭날개는 아버지고 제게 돌아오는 건 닭목살일 뿐이었어요.

이 열등감 때문에 친구들이 별 뜻 없이 무슨 냄새 나지?라는 말만 해도 발끈하여 싸웠고, 좋아해요.라는 말을 들어도 급전이 필요하다라고 오해할 정도였죠.”

아버지의 빈자리

또한 이영자의 아버지는 외도도 잦았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도 참 많이 외도하셨어요. 나는 엄마가 차라리 아버지와 차라리 이혼했으면 싶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가 누구랑 바람피웠는지 평생 기억하더라고요. 아버지가 혼선을 주려고 했는지, 바람 상대가 한 명이 아니었어요.

여러 명이라서 난 헷갈렸는데 어머니는 다 기억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부모님이 결혼생활을 유지했어요.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듯해요. 공식적인 별거는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사업 때문에 1년에 두 번 정도 집에 오셨어요. 아버지가 매일 들어오셨다면 전쟁 같은 하루하루였을 거예요. 엄마가 기분이 좋은 날은 같이 좋고, 우울해하면 같이 우울했어요.”

개그계 데뷔

이렇게 가족을 생각하는 딸이었지만 정작 자신이 대학 진학을 원했을 때 부모님은 딸의 꿈을 반대했었습니다. 시장에서 하루에 2만 원씩 고등어를 팔아서 등록금을 모은 이영자는 서울예대 연극과에 입학하게 됩니다. 사실 이영자는 데뷔하기 전, 이미 대학 졸업 후 밤무대에서 활동합니다.

1980년대 말부터 밤무대의 특A급 MC로 유명했습니다. 물론 개그계 진출 이후에도 바로 밤무대 활동을 안 한 게 아니었고 여전히 레전드급 활약을 했다고 합니다. 이후 MBC에서 정식으로 데뷔한 이후 여러 유행어를 히트시키며 1990년대의 대표적인 개그우먼으로 인기를 누립니다.

MBC 에이스로 활약하던 1993년에는 강호동을 과하게 밀어주던 이경규 때문에 “이런 식으로 할 거면 날 잘라라.”라고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출했다가 진짜로 잘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94년 SBS 기쁜 우리 토요일로 이적해 영자의 전성시대를 히트시키고, 이듬해인 1995년에는 KBS 슈퍼선데이에서 구수한 아줌마 연기로 금촌댁네 사람들을 시청률 40%를 부과하는 초인기 프로그램으로 만듭니다.

한편 PD에게 금촌댁네 사람들의 신인이었던 홍진경을 출연시켜달라고 무릎 꿇고 빌고, 자기 출연료의 일부를 잘라다가 붙여줄 정도로 홍진경의 데뷔를 도왔습니다. 이영자는 홍진경을 연예인으로 대성하게 해준 주인공입니다.

이영자는 스스로 홍진경의 매니저가 되기를 자처했고, 그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홍진경을 대성하게 해주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금촌댁네 사람들기쁜 우리 토요일로 홍진경의 이름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데에 성공합니다.

엄마의 사랑을 갈구

아들만을 좋아했던 어머니이었지만 어린 이영자는 그런데도 엄마의 사랑을 갈구했습니다. “어머니가 장사하시다 보니까 어린 시절 나에게 밥을 해준 적이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소풍날만 유일하게 김밥을 싸주더라고요.

그게 너무 아까웠어요.” 엄마가 해준 김밥이 너무 아까웠던 어린 이영자는 결국 소풍에 들고 갔던 그대로 도시락을 남겨왔습니다. 방송에서 일화를 말하던 이영자는 결국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아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1남 3녀 중 셋째였던 이영자이지만 그녀는 가족의 기둥이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과거 생선가게 냉동 창고에 갇혀서 그 충격에 큰 수술을 해야 했어요. 그 때문에 반신불수가 되셨고 이후로 생선 장사를 그만두셨어요.

다행히 당시 연예인으로 활동 중이었어요. 데뷔 직후 3주 만에 유명해졌고 돈도 많이 벌게 됐어요. 그래서 데뷔 후 처음 모은 돈으로 쓰러진 어머니 수술비를 마련할 수 있었어요. 연예인이 아니었다면 수술비를 내지 못했을 거예요.”


그녀가 쉴 수 없는 진짜 이유

서민이었던 이영자의 가정에서 그녀가 연예인이 되어 돈을 많이 벌게 되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가족들의 기둥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언니의 형부가 조카들이 3세, 3개월일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자 언니가 너무 애처로워 조카들을 내 자식처럼 생각하고 그녀가 연예인으로 돈을 벌어 제일 먼저 한 게 언니의 집을 마련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녀가 온 가족들의 기둥이었으며 어느 날 고개를 돌렸더니 모두가 자신만 바라보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남들은 이영자에게 “이제 결혼해야지”라고 이야기하지만 “만약에 자신이 결혼을 했다면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가족들을 지켜낼 수 없을까 봐 할 수가 없었으며 세월이 흘러 이제는 자신의 인생을 챙기러 돌아보니 어느덧 세월이 많이 지나 나이를 깨 먹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집안에 강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 있으면 상대적으로 가족들이 나약해진다며 이제는 가족들이 뭘 해도 “영자가 있으니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방송을 쉴 수도 없고 열심히 살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You may also like...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You cannot copy content of this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