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째 딸의 무덤 찾아다니는…” 여가수 트로이카의 충격적인 근황을 확인해 보세요.

1960년대 최고 가수 박재란은 산 너머 남촌에는을 통해 현미, 한명숙과 함께 60년대 여가수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고 당시 수많은 히트곡을 내며 스타들의 스타였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무대 위에서 가장 빛났던 삶을 살았지만, 조명이 꺼진 무대 밖 인간 박재란의 삶은 실현과 고난 그리고 역경뿐이었다고 했습니다. 두 번의 이혼과 믿었던 동생에게 당한 사기로 전 재산을 다 잃고, 심지어 수갑을 차고 감옥까지 가야 했던 그녀의 인생은 우리가 알고 있던 가수 박재란의 삶과 180도 달랐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딸마저 먼저 하늘로 떠나보내는 시련을 겪었으며 설상가상 사위와의 불화로 딸의 무덤조차도 찾을 수 없다는 가수 박재란 그녀의 눈물로 채워진 인생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여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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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인기

17살의 가수로 데뷔한 박재란은 산 너머 남촌에는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이후 발표하는 곡마다 히트를 하며 당대 최고의 톱스타로 자리매김했었습니다.

당시에 그녀가 고백하길 “분장하는 상자에 돈이 꽉 채워질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럼 집에 가서 가족들과 그 돈을 쏟아붓고 밤새도록 돈을 세웠다. 그럴 정도로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벌었고 그렇다 보니 솔직히 돈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 당시 故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청와대 파티에도 초대됐을 만큼 최고의 스타였던 박재란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선택으로 당시 수많은 사람을 놀라게 만듭니다.

첫번째 결혼 생활

바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녀의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였습니다. 그렇게 박재란은 달콤한 연애를 하며 결혼까지 했지만, 결혼이라는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특히 첫 번째 남편의 반복되는 사업 실패로 빚을 갚느라고 결혼하고 나서도 그녀는 돈만 벌려고 돌아다녔으며, 워낙에 빚을 많이 지다 보니까 결국 다 못 갚았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첫 번째 남편은 당시 명동에 있던 다방 마담과 바람 나서 홍콩으로 도망가려고 비자까지 받았었고 결국 거기에서 그녀가 이혼의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훗날 당시를 그녀가 고백하길 “나도 세월이 흘렀고 나이가 있어 첫 남편의 이야기를 나쁘게만 해서 미안하지만, 서로가 지나간 과거니까 이야기하자면, 첫 남편은 우선 경제적으로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 사람 때문에 너무나 빚에 쪼들리다 보니까, 나중에는 집 두 채도 다 팔아먹고 결국 전세까지 갔었다. 그래도 자녀가 있으니까 나는 끝까지 결혼 생활하려고 했는데 결국 다방 마담과 바람으로 여자 문제까지 일으키자, 나는 이렇게까지 살려고 노력하는데 용서할 수가 없었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렇게 첫 번째 남편과 이혼한 박재란은 이혼녀라는 곧 주홍글씨였던 당시 분위기에 여자가 이혼한다는 것은 한 번 죽는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는 이혼 이후 너무도 큰 충격과 우울증으로 당시 정신병원에도 오래 입원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퇴원 후에도 우울한 마음이 도저히 가라앉지 않자, 그래 내가 한국을 떠나자! 일단은 다른 나라로 가보자. 그러면 내 아픔이 없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미국 이민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미국으로 떠나 두번째 결혼 생활

그때 그녀의 두 딸도 함께 미국에 데려가려 했지만, 첫 번째 남편이 절대 안 된다. 못 데려간다라고 반대하며 심지어 박재란과 딸들을 아예 못 만나게 차단했다고 했습니다. 결국 엄마로서 두 딸을 못 본다는 아픔과 이혼녀라는 주홍글씨에 현실에서 도피하듯 선택했던 미국행이었지만, 결국 그 선택은 더 큰 외로움과 큰 실현을 몰고 왔습니다. 그렇게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난 그녀는 미국 한인 사이에 행사들이 많다 보니 거기서 돈을 다시 많이 벌면서 비교적 빠르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미국 활동 당시 영주권이 없었던 그녀는 불법 체류로 걸려 유치장에 가기도 했고 그렇게 영주권 취득을 못 하면 추방당할 위기였던 그녀는 다행히 자신을 좋아하는 연하의 남성과 재혼해 영주권을 결국 취득합니다. 첫 번째 이혼은 아픔을 알기에 두 번째 결혼은 어떻게 해서든 실패하기 싫어서 정말 많이 노력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남편 또한 친구를 잘못 만나는 바람에 나쁜 약을 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나중에는 집에도 안 들어오고 행방불명이 되었고 1~2년이 지나도 집에 안 들어오자 자동 이혼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타국 생활이 그렇듯 외로움에 사람을 믿었고 그게 진심인 줄 알고 모든 것을 빌려주었지만 1970년 당시 10억 원을 미국에 있는 교민에게 사기까지 당하며 결국 바다에 나가서 신발까지 벗고 극단적인 시도도 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삶을 꿈꿨던 미국에서의 삶마저 수감생활과 사기, 또다시 이혼으로 역경의 연속이었으며 마치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결국 그녀의 삶은 또다시 온통 절망뿐이었지만 그런 현실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한국에 두고 온 두 딸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때문이었습니다.

15년만에 재회한 딸들

그렇게 미국 생활을 접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박재란은 소식도 없이 그저 기억으로만 남아 있었던 어린 두 딸을 다시 만났을 때, 둘째 딸은 생각지도 못했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딸은 한 번만 더 노래를 부른 가수 故 박성신으로, 가수 박재란의 딸이 아닌 실력으로 가요제에 입상하며 가수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그녀가 고백하길 “내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전남편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고 아이들도 다 성장했으니까 보고 싶은 마음이 계속 들었다. 딸들이 나를 많이 원망했을 거로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전 남편 생활을 다 알았기 때문에 나를 원망 안 했다. 그리고 당시 성신이가 가수였고 현미가 중간 역할을 하면서 너희는 그것을 모른다. 너희 엄마가 왜 미국에 갔는지…. 너희 절대 엄마 오해하면 안 돼.라고 딸들이 오해할까 봐 모든 것을 이야기해줬다.

그래서 성신이가 이해하고 자기 언니한테도 이야기하자, 엄마가 미국으로 떠난 것이 이렇게 된 거구나라며 자신을 이해해 주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만약 현미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딸들과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고 했습니다.

둘째 딸의 죽음

그렇게 15년 만에 사랑하는 딸과 제외하며 행복을 꿈꿨지만, 그 역시도 너무도 허무하게 깨져버리는데, 둘째 딸 故 박성신 씨는 지난 2014년에 심장 질환으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마주해야 했던 딸과의 이별은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훗날 그녀가 고백하기 “내가 활발하게 활동할 때 임신해서 안 들키려고 복대를 아주 세게 했다. 결국 둘째 딸은 조산을 해서 인큐베이터에 들어갔고 병원에서 하는 말이 각 기관이 다 약해져 있다라고 했다.

그리고 나도 심장 수술을 받았었는데 결국 우리 딸도 나의 유전과 실수로 일찍 가지 않았나? 하는 죄책감이 너무 많이 든다.”라고 했습니다.

딸의 묘를 찾아다니며…

한편 그녀가 충북 진천 일대 야산 속 무덤가를 헤매며 딸의 묘를 찾고 있다는 안타까운 내용이 방송을 타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자기 딸 묘를 찾고 있다며 사정이 있어서 딸 무덤을 8년째 찾고 있다고 털어놨으며 딸이 어디에 묻혔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당시 박재란은 장례식에는 참석했지만, 딸의 영정 사진을 보자마자 큰 충격에 정신조차 가누지 못했고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장례 절차가 끝난 뒤였습니다.

그 후 조금 회복돼서 사위에게 연락하니까 사위는 행방불명으로 지금도 연락이 안 된다고 했으며 그런 와중에도 어렴풋이 기억으로 딸의 장지가 충북 진천이라는 것이 들렸던 것 같다라고 했고 그래서 그 단서 하나 가지고 8년째 찾으러 다니며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사연이 방송 나간 뒤 제작진은 故 박성신의 묘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의 제보를 받았고 결국 박재란과 함께 박성신의 묘를 찾게 됩니다.

박재란은 “딸의 묘를 찾게 될 꿈만 같다”라며 박성신의 묘 앞에서 “어째서 그렇게 먼저 갔냐? 네가 없어서 엄마가 외롭다.”라고 외치며 오열했고 자신의 한을 풀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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