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년 63세 유명 배우의 안타까운 소식 “왜 사람을 두 번 죽이냐”며 여동생이 분노한 이유를 확인해 보세요.

요즘 같은 세상에 정직하고 명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돈과 성공을 향해 질주하면서 반대로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바보 취급하거나 멸시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평생을 매진한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오늘은 무대만을 바라보며 살다가 떠난 배우 강태기의 일생과 죽음 논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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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과 배우 데뷔

강태기의 본명은 강성으로 1950년 황해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전투 경찰이던 아버지를 따라 월남해 서울 곳곳을 이사 다니며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드라마 센터에서 전국 고교생 연극경연대회를 보면서 흥미를 느껴 서라벌고등학교를 지망했습니다.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자 강태기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 선언합니다.

아들의 행동에 당황한 아버지는 결국 승낙하지만, 서라벌 고교는 입시가 끝난 상태였는데요. 하지만 강태기는 무작정 입학금을 들고 서라벌고교 교감을 찾아갔고 입학을 허락받습니다. 본격적으로 연기 수업받던 고교 시절 TBC 공채 탤런트 6기로 뽑혔고 1969년 드라마 “124군 부대”로 본격 데뷔하지만, 그의 꿈은 연극 무대였습니다.


1970년 서울예대의 전신인 서울연극학교를 졸업하고 극단 실험극장이 입단하면서 연극 맥베스의 단역으로 무대에 섰습니다. 한동안 무명배우로 활동하다 1975년 “에쿠우스”의 알런 역을 열연하면서 실력을 드러냈습니다. 한국 연극 영화 예술상 연극 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1983년까지 알런 역할을 다섯 번이나 맡았고 알런 전문 배우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는 영화와 드라마에도 출연해 왔으나 언제나 홈 그라운드는 연극이었고 2009년부터 4년간 한국배우협회 회장 등을 맡으며 척박해진 한국 연극인들의 복지와 권익 향상에 노력해 왔습니다.

대표작 에쿠우스

강태기를 말하다 보면 대표작 “에쿠우스”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요. 당대 최고의 흥행 작품으로 그 시절 연극계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만 명 이상이 극장을 찾았고 이때부터 연극은 소극장 르네상스 시대가 열렸습니다. 강태기와 함께 일했던 실험 소극장 대표는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116석의 소극장이었는데 관객들의 숨소리가 추운 겨울을 녹일 정도였습니다. 3개월 전에 예약하고 볼 정도였으니까요.
늘 전석 매진이었습니다. 상상해보세요.”

강태기는 에쿠우스의 알란 역을 하면서 혼을 불살랐습니다. 어느 날은 고열로 쓰러졌는데 병원에 가서 링겔을 맞은 채로 극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막이 오르자 바늘을 빼고 간신히 무대에 올랐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무대를 휘어잡았습니다. 그는 “에우쿠스”를 가리켜 “이 작품으로 나는 연극을 평생 버릴 수 없게 되었다.”며 연극을 향한 연심을 드러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운명은 연극 배우

그래서 돈을 벌 기회가 있었지만 강태기는 돈보다 배우의 꿈을 택했습니다. 당시 강태기는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최고라는 극찬을 받았고 방송국과 영화계에서도 러브콜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강태기는 달랐습니다. 연극이 우선이었기에 연극 연습이나 무대에 서는 날은 무조건 올인했습니다. 그래서 영화와 드라마에도 출연했지만 늘 주연이 아닌 단역을 맡았습니다.

연기력이 필요하지만 잠시 나오는 역할 그런 역할이 강태기의 단골이었습니다. 그런 강태기에게 연극은 한마디로 수행이었습니다. “늘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배우에게 채우고 덜어낸다는 게 참으로 고된 일입니다. 참된 인간으로서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한 끊임없는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간혹 그런 배우들이 있어요.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연기하는 다음 날도 술 냄새가 나는 거예요. 그럼 안 되죠. 프로다운 모습이 있어야 해요.” 배우로서 금욕적인 생활을 유지했고 돈을 멀리했지만 후회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연극 배우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배우는 순수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나는 삶을 진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운명은 연극 배우입니다.

노년의 무대는 점점 사라지고…

그는 생전에 “살아있을 땐 내가 없었던 걸로 해도 좋으나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것이 최대의 소망이고 영원한 예술가는 죽은 다음에 더 스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왔습니다. 바람대로 그는 죽은 다음 진정한 배우로 칭송받습니다.

하지만 인간 강태기는 쓸쓸하고 가난하게 세상과 이별에 나섰습니다. 50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명배우라 칭송받던 배우였지만 노년의 무대는 점점 사라졌습니다. 제작사는 오랜 기간 연극을 해 온 중견 배우 대신 게런티가 낮은 젊은 배우를 채용했습니다. 하지만 젊은 배우들의 사정도 어려웠습니다.

한 달 무대에 서고 몇십만 원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니 연기 좀 한다는 배우들은 드라마와 영화로 넘어갔고 연극 무대는 배우 등용문으로 변해갔습니다.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과 여동생의 분노

2013년 3월 배우 강태기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름은 낯설지만, 그의 얼굴을 보면 “아 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연극계의 대배우였던 그는 인천 서구의 한 아파트에서 숨져 있는 것을 여동생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합니다. 2007년 이혼한 강태기는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 지인에게 사기를 당해 괴로워했습니다.

그렇게 1년을 외부와 단절된 채 거의 매일 술만 마셨다는 뉴스가 전해지면서 안타까움을 더했는데요. 갑작스러운 사망에 유족들은 부검을 의뢰했고 그 결과 사망 원인은 심장마비였습니다 고 강태기의 여동생은 “자는 줄 알았어요. 맨 처음에는 오빠라고 불렀는데 대답이 없었어요.” 라며 발견 당시를 설명했습니다.

덧붙여 여동생은 매일 술만 마셨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했습니다. “오빠 주위에 술병은 없었습니다. 소주병이 있었다는 뉴스는 잘못된 내용입니다.”라며 오보를 바로잡아 달라고 요구했고 일각에서 제기된 자살 의혹에 대해서도 분노했습니다.


자살은 말도 안 됩니다. 몇 년 전부터 고혈압 약을 먹었지만 우울증은 없었습니다. 왜 말도 안 되는 추측성 보도로 사람을 두 번 죽이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항변했습니다. 이 모든 논란은 현장에 출동한 경찰의 인터뷰 때문이었는데요. 경찰 눈에는 세간살이가 단출한 집안에서 60대 남성이 혼자 숨져 있는 모습은 자살이나 음주로 인한 사고 정도로 비쳤기 때문입니다.

유족들은 고인에게 씌워진 의혹을 해소하고자 부검을 선택했고 그의 사인은 심장마비로 밝혀졌습니다. 당시 여동생은 “우리 오빠는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랑스러운 오빠라고 소리치고 싶습니다.”라며 고인을 애도했습니다.

동료들의 한마디

그의 부고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연예계 동료들 역시 앞다투어 슬픔을 전했습니다. 개그맨 남희석은 한 무대에 선 적이 있던 고인을 향해 “너무도 쓸쓸히 가셨다. 참 멋진 배우”라며 추모의 뜻을 전했습니다. 신성우는 SNS에 애도의 뜻을 표했으며 소설가 이외수는 “탤런트 겸 연극배우 강태기 ‘에쿠우스’로 유명한 연기파 배우였지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며 추모했습니다. 동료 연극배우 권병길은 “명배우를 보존시켜주지 못하는 빈궁한 연기자의 세계를 저주하며 그는 떠났다.”라는 글귀를 올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배우로서의 강태기를 얼마나 존경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었는데요.

마지막으로

이토록 연극에 온 열정을 다하며 살아온 강태기였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무대는 점점 그를 찾지 않았습니다. 평생 연극배우로 살았고 연극의 미래만 생각해 왔는데도 그의 연극 사랑은 외사랑이었습니다. 죽기 전 그는 주변에 작품이 없다며 하소연을 했는데요.

그가 떠난 집 거실에는 손 글씨가 빼곡히 적힌 낡은 연극 대본집만 남았습니다. 100세 시대에 짧은 생을 살다가 가다니 너무 마음 아픈 일이지만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자신이 좋아하던 연극을 향한 사랑이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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