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이 된 최고의 액션배우” 폐암 이겨냈지만 결국 안타까운 소식… 그의 인상사를 확인해 보세요.

힘든 상황에 부딪혔을 때 사람들은 간혹 어딘가의 의지의 시련을 극복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종교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래서인지 가끔 화려한 무대 위를 떠나 종교의 귀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종종 들려옵니다.

우리는 그중에서 7080년대 액션 배우로 이름을 날리다 스님이 된 배우 김영일에 대해 알아볼까 하는데요. 오늘은 김영일이 왜 출가를 했는지 또 출가 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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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영일

1952년생 김영일은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출신으로 한국보다는 홍콩 영화계에서 이름을 날린 배우입니다. 그는 홍콩에서 한응이란 이름으로 활동을 했는데요. 주로 당랑권 고수로 자주 나오며 김원진, 황정리 못지않은 인기를 구가했습니다. 김영일은 쿵후, 태권도, 합기도, 유도, 검도 등 무술 공인 단수만 24단이었는데요.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동남아 무술 영화계를 주름 잡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이소룡의 출세작인 “당산 대형”에서 이소룡과 대적하는 악역을 맡았고 신정무문에서는 성룡의 맞수로 출연했는데요. 한국 국적이라 홍콩 영화계에서 주인공을 맞지는 못했지만 당대 최고의 스타던 이소룡과 성룡과 맞서 싸우는 역할로 화려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비록 홍콩 무술 영화만큼은 아니지만 그는 한국에서도 여러 작품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렸는데요. 적색지대, 여자의 남자, 걸어서 하늘까지, 슈팅 등에서 주요 역할을 맡은 바 있습니다.

4번의 출가 기회

그렇게 활동을 이어 나가던 김영일은 어느새 부터인가 방송에서 보이지 않더니 스님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는데요. 사실 그는 살아오는 동안 네 번이나 불교에 귀의할 뻔한 적이 있습니다. 김영일의 첫 번째 출가 기회는 네 살 때였습니다. 그는 네 살이란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혼자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곱 살이 되는 해에 입양이 되면서 그 위기를 극복했는데요. 당시 중국어 통역관이자 쿵후 고단자였던 양아버지 김정두를 만나며 그는 첫 출가의 기회가 멀어졌습니다.

김영일이 직접 밝힌 두 번째 출가의 기회는 고등학교 3학년 때였는데요. 청주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김영일은 집에서 기르던 개를 슬쩍 해 먹은 것이 화근이 돼 심한 황달을 앓았습니다. 여러 가지 약을 써봤지만, 증세에는 차도가 없었는데요.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다 근처 절까지 찾아갔다고 전해집니다.

그가 찾은 절에서 수련하던 스님은 김영일의 병을 완치할 수 있다고 단언했는데요. 신기하게도 스님의 말처럼 김영일은 건강을 말끔하게 회복했습니다. 그런 사건을 겪으면서 김영일은 부처님의 신묘한 힘을 느꼈다는데요. 이후 대학교에 가며 출가 생각은 잠잠해졌습니다.


김영일의 세 번째 출가의 기회는 88년에 찾아왔는데요. 그는 88년 교통사고를 당하며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몸이 상한 것은 치유하면 그만이었지만 교통사고로 파산 상태가 된 가정을 이끌고 갈 자신이 없었어요. 김영일은 그런 상황에 부처님을 찾으며 신앙심을 깊게 다졌다는데요. 이때 역시 출가는 하지 못했지만, 부인과 함께 수계를 받고 정식 출가를 하려 고뇌했다고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을 겪었던 김영일은 아직 속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삶을 이어 나갔는데요. 그때 부처님은 김영일에게 네 번째 출가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96년 “신세대 보고 어른들은 몰라요”에 출연할 즈음 김영일은 건강에 이상을 느꼈습니다. 감기에 자주 걸리고 목에 통증을 느끼는 빈도도 잦아졌습니다.


단순히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김영일은 방송 종료 후 3개월간 휴식 기간을 가졌는데요.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른 후 드라마 슈팅에 출연하며 그의 병세는 심각해졌습니다. 슈팅은 허준호, 박준규, 이혜숙, 주호성 등이 나오는 축구 드라마입니다. 축구부 감독과 대원들의 진정한 스포츠 정신을 그린 이 드라마는 작중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는 장면이 많았는데요.

그럴 때마다 김영일은 매번 몸에 이상을 느꼈습니다. 심한 몸살 기운은 물론이고 구토까지 연거푸 했는데요. 워낙 타고난 건강 체질이었던 그는 “이러다 낫겠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동네 약국에서 약을 지어 먹으며 촬영을 계속하곤 했습니다.

폐암 진단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목이 잠겨버렸는데요. 대사를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의 상황이 되자 큰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세 차례나 검사를 받았지만 아무런 진단도 받지 못했는데요. 세 차례나 병명이 나오지 않고 괜찮다는 말에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분명 그의 몸은 이상을 느꼈습니다.

김영일은 2개월 만에 몸무게가 8킬로그램이나 빠졌는데요. 이때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병원에서 CT와 MRI 촬영을 했는데요. 그제야 몸이 아픈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의사는 기관지 중간 부분을 가리키며 암의 가능성이 80% 이상이라는 충격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김영일은 폐암 진단을 받았는데요. 암세포가 많이 번지지 않았던 상황이라 다행이었지만 암이라는 것부터가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는 병실로 달려온 아내와 아이들과 부둥켜 안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암세포가 성대를 눌러 말이 나오지 않아 가족들을 위로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절망을 길게 할 새도 없이 항암 치료가 시작되었는데요. 항암제를 투여한 후 지독한 고통이 따랐습니다. 한 번 투여하면 보름 동안은 초주검 되어야 했습니다.

항암제를 투여한 지 보름 후면 고통이 조금씩 사그라져 갔는데요. 김영일은 다시 항암제가 투여될 때까지 온갖 제약 서적과 민간요법을 뒤져가며 치료법을 찾으려고 회복 의지를 다졌습니다. 더불어 항암 효과가 있다는 약초들을 주식 삼아 먹으며 하루를 보냈는데요.

기적 같은 완치 판정 그리고 출가

그렇게 8개월이 흐른 뒤 김영일의 건강은 조금씩 회복되어 갔습니다. 몸이 가벼워졌고 말문도 열렸는데요. 그는 97년 4월 몸에서 암세포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기적 같은 완치 판정을 받았습니다. 부처님이 또 한 번의 삶을 살게 해준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부터라도 나를 위해 살기보다는 남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어요.” 김영일은 병마와 싸우며 종교에 더욱 기대게 되었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가운데 세상의 이치까지 깨달았는데요. 사람이 세상에 나왔다가 돌아가는 것이 도리이듯 생명의 고귀함과 삼라만상의 근본 이치를 실천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출가하여 “보월스님”이라는 법명으로 종교 활동을 시작했는데요. 연기에 바친 속세의 경력을 활용해 불교 포교에 일조하겠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불교에 귀의한 스타들

김영일처럼 시련을 겪으면서 불교에 귀의한 스타들은 또 있는데요. 94년 미스코리아 선 “차우림”은 교통사고로 남편을 떠나보내고 아들까지 병을 얻으며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녀의 아들은 빙이로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업이라고 생각하고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그녀는 “저는 자식을 위해서 그런 선택을 했지만 자식은 엄마가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제발 그런 생각 안 하기를 바라요.”라며 아들을 위한 모성을 드러냈는데요.

차오림뿐 아니라 스님이 된 스타는 또 있습니다. 80년대 아이유라고 불린 가수 이경미는 연예계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속세를 떠났습니다. 화려한 삶도 그녀 마음의 허기는 채워주지 못했는데요. 결국 이경미는 무대 위에서 내려와 스님이 된 근황을 전했습니다.

출가 후 별세 소식

그리고 이들처럼 실연을 겪으며 출가한 김영일은 지난 2004년 향년 51세의 나이로 별세 소식을 전했는데요. 굴곡진 삶을 살았던 그가 부처님 곁에서 편안히 눈 감기를 바란다며 많은 이들이 애도의 뜻을 표했습니다.

말도 제대로 못 할 나이, 네 살에 부모님을 여의고 또 여러 번 아픔을 겪었던 김영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가 종교에 귀의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마음의 평안을 얻기를 바란다는 응원의 목소리가 컸습니다. 하지만 그는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보를 전했는데요.

불교 영화를 만들어 연예계와 불교계의 길이 남을 역사의 한 획을 긋겠다는 그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 아쉽습니다. 지금 있는 그곳에서 못다 한뜻을 다 펼치고 부처님 곁에서 평안하길 바라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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