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트롯맨 윤명선 알고 보니 “고소까지 당한 진짜 이유”에 대해 확인해 보세요.

세계적인 그룹 방탄소년단의 아버지 방시혁이 최근 한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으로 “제가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은 분이 있다. 음악을 할 수 있게 프로 작곡가로 일할 수 있게 해주신 윤명선 형이다.”라고 하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는데요.

이처럼 윤명선은 JYP 설립 초창기 수많은 스타를 키워낸 매니저 출신이자 또한 대한민국의 장윤정이라는 가수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만들어버린 메가 히트곡 “어머나”의 작곡가로서 작사 작곡 음반 프로듀서 실력까지 두루 갖춘 가요계 황금손입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불타는 트롯맨에서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확고한 음악적 기준을 바탕으로 명확한 평가를 하며 심사위원 중 가장 진정성 있는 심사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요.

하지만 그랬던 그가 한때는 하는 것마다 실패해서 120억을 떠안은 채 어머나를 만들었지만, 계은숙이 도박 사건에 연루되자 주현미마저 이를 거부하고 설상가상 2017년에는 손찌검으로 고소까지 당해 정식 재판까지 청구해야 했던 윤명선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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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의 인연

1969년에 태어난 윤명선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자유분방했던 탓에 할머니와 살아야 했고 집안이 워낙 가난해서 고생이란 고생을 다 했었는데 하지만 훗날 그의 고백에 따르면 이런 불우한 환경에도 부모님께 항상 감사한 것은 예술가로서 재능을 물려주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다 대학교 2학년 때 등록금을 벌기 위해서 음악에 대한 배경 지식이 전혀 없었지만, 하루는 음악 하는 선배에게 기타를 빌려 이틀 만에 크리스탈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MBC 신인 가요제에 참가한 윤명선은 놀랍게도 장려상을 수상하면서 음악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그렇게 전공은 행정학과였는데 노래를 뚝딱 만들어 MBC 가요제를 나가더니 이후부터는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음악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래서 군대도 시험을 봐 음악 부대로 명망이 높던 해군 홍보단에 지원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음악의 소질을 보이던 그는 해군 홍보단에 들어가면서 더욱 많은 영감과 음악가의 인연을 쌓게 되는데 당시 내무만 동료로 김건모, 추가열 등과 함께 생활하며 각종 악기 전공자들 사이에서 수준 높은 음악을 접하더니 서서히 진짜 음악가가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를 그가 고백하길 “대학교 때 가요제에 입상한 경험이 있어서 해군 홍보단에 들어갔고 그리고 홍보단에 있을 때 정말 많은 여러 음악을 접하면서 음악을 그때 다 배운 것 같다. 당시 섬 주민들을 대상으로 공연을 했는데 섬 주민들을 기쁘게 하는 건 트로트만한 게 없었기 때문에 트로트도 사실 그때 다 배웠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가수 데뷔와 실패

그렇게 군대에서 음악에 대한 자신감과 열정이 생겨 본인에게 재능이 있다고 판단해 전역 후 친형에게 무려 6천만 원을 투자받아 음반을 제작해 가수로 데뷔를 했고 하지만 앨범 발매 직전 가요계의 서태지 아이들의 등장으로 그의 앨범은 그야말로 쫄딱 망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그는 본인의 솔로 앨범의 전곡을 직접 작사 작곡할 정도로 음악적인 재능이 남달라 내심 기대했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을 보는 순간 이건 상대가 안 되겠다 싶었는데 실제로 상대가 되지 않아 크게 시선을 끌지 못했고 이후 미련이 남아 2집도 내봤으나 이번에도 역시 크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때 가수는 아닌 걸로 판단하고 그럼 앞으로 뭘 해야 하지? 고민을 하던 중 지금의 아내인 유재하 가요제 출신의 가수 정혜선을 만나 아내를 위한 음반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우선은 월급 30만 원짜리 로드 매니저로 방송계에 입문하게 됩니다.

로드 매니저로 성공

그렇게 가수 대신 매니저가 된 그는 가수 이주원을 시작으로 배우 장동건, 방송인 김승현 등의 매니저 생활을 거쳤고 그러다 가수 박진영을 만나 데뷔부터 7년간의 시간을 함께 보내며 박진영을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로 올려놓게 됩니다. 당시 그가 매니저로서 얼마나 열심히 했냐면 매일 새벽 6시 30분에 방송국에 출근해서 PD들에게 경옥고를 돌렸는데 그 시절 사이다가 300원인데 경옥고가 1500원이었으니 그야말로 파격적인 로비였습니다.

사실 이때 경옥고가 비싸도 너무 비싸 살 돈이 부족해서 남에게 빌려서 돌려야 했고 그럼에도 PD들이 경옥고를 좋아할 거라는 믿음으로 돌렸더니 그의 성실함이 통했는지 앞서 얘기한 대로 박진영이 크게 성공하면서 흐릿하기만 하던 그의 인생이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연예계를 떠나…

그리고 박진영을 시작으로 JYP 소속 가수들의 매니저를 맡았던 그는 JYP 1호 가수 진주에게 당시 다른 타이틀곡에 있었으나 매니저인 윤명선의 강력한 주장으로 “난 괜찮아”를 타이틀곡으로 변경한 덕분에 대박이 나는 등 매니저 업무뿐만 아니라 대박곡을 보는 눈과 음악적인 견해가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 때문인지 결국 그는 못다 한 음악의 한을 풀기 위해 엔터테인먼트를 차리고 가수들의 앨범 제작에 뛰어들게 되지만 그가 제작한 가수 김사랑의 1집 2집 앨범이 연이어 실패하면서 무려 20억의 빚만 남은 채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또다시 쓴맛을 본 그는 당시 충격이 컸었던지 결국 뜬금없이 미술 큐레이터가 되고 시를 쓰는 등 잠시 연예계를 떠나고 말았고 하지만 이때 미술계 쪽 일을 하면서 수많은 예술가를 만나 사상과 철학 심리 등을 배우며 훗날 그가 작곡가로서 필요한 다양하고 풍부한 식견을 기를 수 있는 중요한 시간들을 보내게 됩니다. 이때를 그가 고백하길 “사실 제작한 가수가 실패를 한 것도 한 거지만 박진영의 매니저를 해봤기 때문에 당시 그 사람보다 못하면 매니지먼트 할 맛이 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예전에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 만나는 사람이 그 사람보다 못하다 싶으면 바로 헤어지듯이 말이다. 당시 4년 가까이 연예계를 떠나 있었는데 쉬는 동안에도 홍보 전화는 미친 듯이 받았지만, 될성부른 싹이 보이지 않으면 아예 맡지를 않았다.” 라고 했습니다.

명곡 “어머나”의 탄생

아무튼 이처럼 그는 잠시 연예계를 떠나고 말았고 하지만 그것마저도 훗날 그가 매니저가 아닌 작곡가로서 성공하기 위한 운명이었는지 어느 날 길을 걷는데 그의 바로 앞에서 어떤 여자가 “어머나” 하면서 대자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바로 옆에서 또 아이를 안고 가던 아주머니가 애가 갑자기 손으로 얼굴을 치니 놀랐던지 “어머나” 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렇게 그날 하루 동안만 어머나를 좋게 10번은 들었던 그는 결국 어머나 하며 무릎을 치게 됩니다. 생각을 해보니 여자들은 놀라도 어머나 슬퍼도 어머나 기뻐도 어머나 반가워도 어머나인데 이렇게 중독성이 강한 단어가 없겠다 싶고 이걸 가지고 노래를 쓰면 히트하겠다 싶어 마침내 “어머나”라는 노래가 탄생했고 그리고 이때 작곡, 작사 다 합쳐서 30분도 채 안 걸려서 순식간에 써내려갔습니다.

또한 당시 그는 노래가 정말 마음에 들어 연말 작곡상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호언장담까지 했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이 노래를 들은 가수들은 모두 이 곡을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제일 먼저 제안을 했던 사람은 앵카 가수 계은숙으로 그런데 인연이 안 되려 그랬는지 이 곡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려 할 쯤 계은숙이 도박 사건에 연루되면서 결국 취소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노래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음률과 도발적인 가사 때문인지 계은숙 이후 선뜻 부르겠다는 임자를 찾지 못했고 그런데 놀랍게도 톱스타 주현미와 선이 닿아 이 노래를 부르겠다고 하는데 조건으로 제목을 바꾸면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고민을 했던 게 솔직히 주현미가 불러준다면 노래는 무조건 뜨는 건 확실하지만 그런데 노랫말을 바꾸면 곡이 이상해질 것 같아 감히 톱스타 주연미를 거절하고 말았고 이후 송대관, 김혜연, 엄정화 등 무려 7명의 가수에게 제안을 했으나 모두 퇴자를 받고 말았습니다.

장윤정의 “어머나”

그러다 여덟 번째 제안이 들어간 사람이 바로 신인 가수 장윤정으로 당시 소속사 대표를 통해 장윤정을 처음 보는데 얼굴을 보는 순간 주인을 만났구나 싶어 오디션도 볼 필요 없다 하고 노래를 들어보지도 않았는데 그 자리에서 곡을 주게 됩니다. 그런데 신인 가수 장윤정마저도 사실 이 노래의 가사 때문에 처음 곡을 받았을 때 부르기 싫어서 장작 사흘간이나 울고 말았고 이유인즉슨 “처음에는 이러지 마세요.”라고 하다가 곡 마지막에는 “내 사랑이에요. 다 줄게요.” 라고 전개되는 가사가 무척 싫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장윤정은 이 노래를 통해 단번에 트로트계의 여신으로 급부상했고 윤명선 그도 2004년 연말 KBS와 서울가요대상에서 작곡가상을 휩쓸었고 또한 이 노래 덕분에 과거 제작에 실패해서 생긴 20억의 빚을 모두 청산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그가 굳이 트로트 음악을 하게 된 이후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길 “처음부터 성인 쪽을 한 건 아니고 원래는 젊은 쪽을 했었다. 그런데 그때 가수들이 너무 바빠서 나를 믿어주질 못했다. 나는 프로듀서로서 내가 원하는 방향 내가 원하는 편곡 그리고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는데 하지만 가수들이 음악보다 엔터테이너다 보니까 음악 쪽에 할애하는 시간이 너무 작았던 거다.

그래서 우연히 성인 쪽을 기웃거렸는데 성인 쪽은 너무 잘 믿어주는 거다. 나에 대한 믿음과 시간이 충분히 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많은 시간과 믿음을 가지고 작업을 한번 해보자고 했다. 사실 젊은 쪽에서는 그런 게 어렵고 늘 하는 얘기가 ‘한 프로 안에 끝내야 됩니다.’ 이런 주문만 한다 그런데 성인 쪽은 내가 원할 때까지 계속 기다려준다 그리고 사실 나는 트로트라는 말을 별로 안 좋아한다. 힙합, 알앤비, 발라드가 아니면 포크까지 다 트로트로 들어가 버리니까 말이다. 그래서 트로트란 말 대신 새로운 용어가 나와야 할 것 같다.” 라고 했습니다.

25년 만에 지킨 아내와의 약속

아무튼 이후 그는 이승철의 “서쪽하늘”, 이루의 “까만안경” 등 수많은 히트곡을 제작하며 크게 성공했고 그러다 2017년 가장 특별한 인연을 맺은 가수의 앨범을 제작하게 되는데 그건 바로 젊은 날 약속했던 아내 정혜선의 앨범이었습니다.

사실 그가 로드 매니저 시절 경옥고를 돌리며 열심히 활동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가 당시에 있는 여자친구였던 정혜선 덕분으로 아내의 음악적 천재성을 알아본 그가 어떻게든 빨리 돈을 벌어 앨범을 내주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5년 만에 2017년 마침내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었고 2018년에는 3집 앨범까지 내놓으며 가수 정혜선의 제작자이자 남편 윤명선으로 그 모든 꿈들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고소까지 당한 진짜 이유

한편 2017년 윤명선은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장으로 부임하던 중 직원 A씨의 양 손목을 비틀어 인대를 다치게 한 혐의로 고소를 당하게 되는데 재판부는 A 씨의 진술 내용이 엇갈리고 신빙성에 의문이 생긴다고 판단해 모욕 부분에서는 무혐의로 불기소 처분하고 손찌검 혐의에 대해서는 약식 기소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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