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부른 국민 테너 노환으로 결국… “국립 오페라단에서 퇴출 된 충격 이유”를 확인해 보세요.

1980~90년대 국민가요로 불리던 ‘향수’를 가수 이동원과 함께 불렀던 성악가 테너 ‘박인수’ 전 서울대 교수가 지난 2월 2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노환으로 향년 85세로 별세하였다고 합니다.

한동안 보이지 않아 어디 계시나 소식이 궁금하였는데 안타까운 비보를 전해듣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테너 박인수의 인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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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박인수는 대한민국의 성악가이며 음역은 테너입니다. 1938년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일본 주오대학 법학부에서 유학했고, 서울시청에서 운수과장, 도시계획과장, 건설과장 등 요직을 거쳤으나, 너무나 청렴하여 자식들 학비조차 제대로 내지 못할 정도로 집안이 가난했다고 한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노래를 좋아했고 노래를 한번 시작하면 트로트에서부터 이탈리아 민요, 오페라 아리아, 가곡에 이르기까지 계속 불렀다고 한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매우 알뜰했고, 음식 솜씨가 굉장히 좋았습니다. 4살 되던 해에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서 미아리로 이사를 했는데 그때 당시 미아리에는 집이 몇 채 없었고, 산과 들, 논과 밭만 있는 전형적인 농촌이었는데 미아리 인근에 살면서 여름에는 붕어와 피라미를 잡으러 다니고, 가을에는 메뚜기를 잡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서울 돈암초등학교에 진학한 후 책 읽는 걸 굉장히 좋아했으며 초등학교 때는 소년지로 나오는 것들은 죄다 읽었고, 중학교 땐 세계 명작시리즈를 거의 다 읽었을 정도로 책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웬만한 명작 수준의 책들은 중학교 때 다 뗐습니다. 중학교에 입학을 한 뒤부터는 럭비부에 들어가고 기계체조도 배웠습니다. 유도부터 수영에 이르기까지 안 배운 종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싸움 꽤나 한다는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그러다 싸움패인 ‘미아리 오형제파’를 결성했는데요. 친구들에 의해 두목으로 추대되었고, 싸움질을 일삼고 다니면서도, 마도로스가 되어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마도로스에서 성악가로…

한편으로는 어머니를 따라 동네 교회엘 다니기 시작했는데, 노래 부르는 게 좋아서 성가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경동고등학교 2학년 말 교회 목사로부터 성악을 하라라는 권유받고, 마도로스가 되겠다라는 꿈을 접고 성악으로 진로를 바꾸게 됩니다. 바로 음대에 진학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 후 구청에 임시직으로 들어가 일하면서 야간으로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대한민국의 3대 테너 중 하나였던 이화 예고의 이우근 선생에게서 무료로 성악 레슨을 받게 됩니다. 그 덕분에 결국 1960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하게 됩니다. 대학 시절 집에서 도시락을 싸서 다녔는데 반찬이라고는 콩나물과 김치가 전부였습니다.

특별한 날에는 어묵을 먹는 게 다였는데 그러다 봄, 가을 주말마다 중국집 결혼식 하객 행세를 하고 몰래 피로연장에 가서 고기를 먹으면서 영양을 보충하면서 성악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성악가로 성공

1967년 국립오페라단에서 마탄의 사수를 올릴 때 주인공 ‘막스’ 역을 맡아 학생 신분으로 데뷔하게 됩니다. 그런데 공연 당시 잘하고 싶은 욕심에 발성을 바꾼 게 화근이 되어서 오페라 자체를 완전히 망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서울 시내 일간지들이 일제히 혹평하였고, 결국 오페라 무대에 서자마자 한국 오페라계에서 매장이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후 남대문 시장에서 포장마차를 하며 돈을 벌었으나, 그것마저 실패하게 되자. 결국 어렵게 친구의 도움을 받아 1968년 서울 시향과 협연으로 아내와 함께 부부 음악회를 열었는데, 다행히 좋은 평을 얻게 됩니다.


이후 여기저기서 출연 요청이 들어왔고, 프리마 오페라단에서 올린 사랑의 묘약에서 ‘네모리노’ 역을 맡아 드디어 재기에 성공하게 됩니다. 1969년에는 친구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젊은 성악가들을 모아 ‘서울 오페라 아카데미’를 결성했습니다. 라 보엠을 제작해 우리나라 최초로 원어로 부르게 되었고 그렇게 무대에 올린 오페라가 성공하니 여기저기서 출연 요청이 쇄도합니다.

그러자 작곡자들도 자기 작품을 노래해달라라며 요청해왔고 그의 노래가 FM 전파를 타고 방송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버펄로 심포니오케스트라 바이올리니스트로 일하던 서울대 선배가 추천하여, 1969년 여름, 버펄로 심포니오케스트라의 오페라에 출연하게 됩니다.

미국 진출하며 승승장구

이러한 인연으로 1970년 5월 미국에 진출하였고, 줄리아드 음대에서 마리아 칼라스의 마스터 클래스 오디션에 합격하여 전액을 장학금으로 받으며 줄리어드 음대에서 성악 교육을 받게 됩니다. 생활비를 매달 받긴 했지만, 뉴욕의 집세를 감당하기엔 빠듯하여, 뉴욕의 한국 음식점에서 배달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1976년부터 미국 뉴 헤븐 오페라단과 버팔로 오페라단에서 라 보엠의 ‘로돌프’역을 했고, 캐나다 온타리오 더 쇼 페스티벌)에서 낙소스의 아리아드네의 ‘바쿠스’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1년에 반 이상은 미국 전역과 남미, 캐나다 등으로 연주 여행을 다니며 승승장구합니다.

국민가요 ‘향수’를 불러 국립 오페라단에서 제명

그러다가 1983년에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교수로 임용되어, 2003년 퇴임할 때까지 300회가 넘는 오페라 공연을 했습니다. 1989년에는 클래식과 가곡을 접목한 국민가요 향수를 가수 이동원과 함께 불러 큰 이슈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습니다. 당시에는 공연 직후 클래식계에서 클래식 음악을 모욕했다라는 비난을 받았고, 자신이 단장으로 내정되기까지 한 국립 오페라단에서 제명까지 당하게 됩니다.

당시만 해도 클래식대중가요의 크로스오버는 상당히 생소했으며 이 때문에 클래식계에서 반발이 심했습니다. 그러나 4년 후 시작된 KBS의 열린 음악회, 파바로티를 비롯한 3대 테너가 주도했던 성악계의 크로스오버 추세가 자리잡힌 것을 보면, 도리어 선견지명이었던 셈입니다.

2003년 서울대 정년퇴임 후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음악대학원장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가 정년퇴임 후에도 사망 전까지 매년 50회에 가까운 국내외 공연을 소화하였습니다. 또한 2011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안타까운 별세 소식

가수 故 이동원 씨와 이 노래를 함께 불렀던 성악가 박인수 전 서울대 교수가 향년 85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클래식과 가요 사이의 벽이 높았던 시절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던 고인은, 생전에 국민 테너로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고인은 2023년 2월 28일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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