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트롯2 진해성 아버지 알고 보니 “뒤늦게 밝혀진 충격 정체”에 대해 확인해 보세요.

지난 미스터트롯에서 최고의 기량을 선보인 진해성이 사실은 가정사에 슬픈 사연이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안타까움을 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가 가수로 나서기까지는 부모님은 물론이고 이모와 이모부까지 영향을 끼쳤던 사정도 있었는데요. 오늘은 가수 진해성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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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에 빠진 계기

1990년에 부산에서 본명 이상성으로 태어난 진혜성이 트로트라는 신세계에 빠진 건 8살 때였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즐겨 들으시던 배호의 노래들을 함께 들으며 “안개 낀 장충단공원”, “돌아가는 삼각지” 같은 노래들을 어릴 적부터 흥얼거리게 되는데요.

어린 나이에 트롯의 멜로디에 이끌린 진해성은 동요보다 트롯을 입에 달고 살았고 중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축제가 열렸을 때는 다른 친구들이 댄스 곡이나 가요를 부를 때 자기가 좋아하는 트롯을 고집스럽게 불렀습니다. 발라드나 다른 장르는 자신에게 안 맞는다고 생각한 그는 축제 무대에서 발군의 노래 실력으로 엄청난 박수와 함성을 받으며 트롯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우게 되는데요.

그의 부모님과 학창 시절

학창시절 진해성은 축구, 양궁, 육상, 유도 등 체육 특기자로 다양한 운동을 했던 학생이었는데 원래는 축구를 했지만 진해에서 작은 막창집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간 부모님은 어려운 형편상 아들에게 돈이 많이 들어가는 축구 선수로 뒷바라지를 해주기가 어려워졌고 결국 너무나 안타깝지만, 아들을 유도 선수로 전향시키기로 하게 됩니다.

아들이 원래는 축구를 잘했고 럭비 선수 권유도 받았지만, 그의 집 안은 형편이 그만큼 받쳐주지 못해 아쉽게 종목을 바꿔야 했던 사정이 있었던 것인데요. 그렇게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유도 선수가 되었지만, 집안 형편을 타박하기는커녕 더 열심히 훈련에 매진해 고등학교 때까지 수많은 대회에서 수상하며 두각을 나타내게 됩니다.

아버지와의 3년 약속

이토록 아버지를 잘 따른 착한 아들이었던 진혜성은 대학 진학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게 되는데 무슨 과를 가느냐의 인생의 앞날이 결정되는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결국 오랜 고민 끝에 아버지께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되고 싶다고 말씀을 드리게 됩니다. 진해성은 자신이 유도를 오래 하긴 했지만 냉정하게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정도의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준까지는 힘들다고 생각했고 어릴 적부터 친구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했으니 학교 축제도 나가며 키워왔던 가수의 꿈을 드디어 부모님께 드러냈던 것인데요.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단호하게 “절대 안 된다.”며 강력하게 반대를 하셨습니다. “세상에 노래 잘하는 사람이 천지에 널렸는데 어떻게 니가 가수가 되겠냐”며 아버지는 결사적으로 반대의 뜻을 밝히셨는데요.

하지만 그간 아버지 말씀이라면 모두 순종하던 진해성은 이번만큼은 트롯을 포기하면 인생을 포기하는 것만 같았고 고집이 완강했던 바람에 결국 아버지는 “3년만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포기하라”는 조건을 달고 아들의 소원을 수락하시게 됩니다. 결국 실용음악과에 진학한 진해성은 스무 살에 바로 군대부터 다녀오게 되는데요.

예명 “진해성”의 탄생

운전병으로 군 복무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가수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트롯 가수의 걸맞은 예명이 필요했는데 이상성이라는 이름이 발음이 어렵다고 느낀 아버지는 아들에게 진해의 별이 되라는 의미로 “진해성”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시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받은 진혜성은 처음에는 이름이 촌스럽다며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어른들 말을 들으면 떡 하나 더 떨어진다는 옛말도 있듯이 그는 나중에는 트롯 가수로 그 이름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진해의 별” 뜻도 좋아 그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가수로 나서게 됩니다.

첫 앨범을 발표하고…

진해성은 2012년에 첫 앨범 “내 사랑 받아줘”를 발표하고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으로 아무것도 모르고 소속사도 없이 이모와 이모부가 매니저를 해주시며 활동을 시작하는데요.

갑작스런 조카의 가수 선언에 이모와 이모부까지 덩달아 고생을 하셨던 것인데 지금은 소속사에서 해주지만 처음에는 그 모든 것을 다 진해성이 스스로 하며 자신이 운전하면서 CD를 들고 홍보를 다녔고 옷 맞추는 것 , 미용실 예약하는 것, 인사 다니는 것 모두 스스로 했기에 그런 일들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기 때문에 그는 지금 자신의 매니저와 스태프들을 보면 마음이 더 간다고 합니다.


당시 홍보를 하려면 방송국에 가서 피디들 책상에 CD를 돌려야 했는데 피디들의 책상에는 항상 너무나 많은 가수들이 놓고 간 CD들이 쌓여 있어서 유명 가수로 살아남기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요.

또한 대학 재학 당시의 젊은 애가 무슨 트로트냐는 시선을 받으며 친구들 사이에서도 어울리지 못했던 진해성은 그럴수록 친구들보다는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의 어른들이 주로 모이는 곳만 찾아가며 좋아하던 트로트를 불렀습니다.

길고 긴 무명 시절

그렇게 열심히 자신을 알리고 다닌 진혜성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결국 아버지와 약속한 3년이 다 되고 말았는데요. 하지만 이 상태에서 “조금만 더 하면 되겠는데”가 보이니까 진해성은 아버지께 조금만 더 해보겠다고 말씀을 드리게 되었고 아버지도 지금껏 해온 노력이 아쉬워서 그럼 조금만 더 해보라고 허락하시게 되는데 그렇게 한 해 한 해 버티던 게 결국 나중에는 10년이나 지나버리고 말게 됩니다.

무명 시절 부산 지역에서 활동하던 진해성은 처음에는 중장년들이 모이는 곳만 찾아다니다가 나중에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트로트의 매력을 알려주고 싶다는 뜻에서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는데요. 2014년에서 15년경 대학가 중심으로 버스킹 즉 길거리 즉석 공연이 유행처럼 일어나게 되는데 다른 이들은 기타를 치며 주로 발라드를 불렀지만 진해성은 거리에서 트롯을 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거다 싶어 앰프를 들고 길거리로 나가 자신이 최초로 길거리 트롯 버스킹을 시작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처음엔 그런 글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범상치 않은 실력에 점차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요. 나중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놀러 온 젊은 친구들까지 그의 버스킹을 좋아해 주었고 그렇게 진해성은 새벽에 나가 밤이 늦도록 길거리에서 하루 종일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그는 부산에서는 광안리와 해운대 서울에서는 홍대에서 버스킹을 했는데요. 결국 이 못 말리는 열정은 피타를 하도 많이 쳐서 손가락 피부가 찢어져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게 만들 정도였는데 지금도 그 기타에 남아 있는 핏자국을 보면 진해성은 그것이 영광의 흔적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그러나 그렇게 대단한 열정으로 노래를 해도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는데 점점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께 용돈을 타서 쓰는 것도 더 이상 손을 못 벌리겠고 장남 노릇도 못 하고 있으니 진혜성은 7살이나 어린 동생에게도 미안함을 느끼며 눈치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때 동생은 형을 타박하기는커녕 더 열심히 노래하라고 응원을 보내줬고 조금만 더 하면 된다고 더 버티라고 격려하며 형을 대신해서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는데요. 진해성은 행사에서 노래를 부르고 출연료를 받으면 절반을 동생에게 용돈으로 주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동생은 형의 힘든 사정을 알고 그 돈을 일절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속 깊은 동생과 집 안의 모든 어른까지 진해성의 성공을 진심으로 빌었던 것인데요.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

불교 신자인 진해성은 이 시기에 지금의 소속사 KDH 엔터테인먼트의 김도희 대표와 만나게 되는데 무명의 트롯 가수가 홍대 앞에서 기타 하나 어깨에 매고 거리에서 버스킹 하는 걸 유심히 본 김 대표는 진해성이 그 장소에서 어울리지 않게 트로트를 너무나 유창하게 그것도 애절함이 묻어나는 보이스로 부르니 한마디로 물건이라고 생각했고 노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명함을 주면서 연락을 달라고 말을 건네게 됩니다.

하지만 첫 만남에 진해성이 연락을 하지 않자 불심이 남달랐던 김 대표는 또 홍대를 찾아가 진해성의 노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게 되는데요. 결국 둘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눴고 두 사람 사이는 소속사 대표와 소속 가수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후 진해성은 길거리는 물론이고 전국 사찰의 산사음악회에서도 노래를 부르며 쉼없이 활동을 이어나가게 되는데요. 결국 길거리에서 그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의 팬이 되어 줬고 그가 나온다는 방송이나 무대가 있으면 진해성 이름이 적힌 플렌카드와 파란색 풍선을 흔들어주며 진해성은 조금씩 가수로 자리를 잡아나가게 됩니다.

사실 트롯가수는 다른 장르와 달리 한 곡이라도 자신의 히트곡을 가지기 어려울 뿐더러 진입 장벽 역시 높아서 10년 이상 무명생활을 거치고 더 시간을 쏟아도 성공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사람들이 태반인데요. 하지만 진해성은 억척같이 자신을 알리고 다닌 끝에 “사랑 반 눈물 반”이라는 곡이 노래 교실과 가요제 행사 등에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 피나는 노력으로 결국 디너쇼를 해보자는 제안까지 받으며 63빌딩에서 데뷔 후 처음으로 송년 디너쇼까지 열게 됩니다. 그는 아주 유명한 대형 가수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던 것인데요.

트롯전국체전 참가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친분이 있던 개그맨 조세호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게 되는데 조세호는 진혜성에게 KBS에서 트롯전국체전이라는 프로그램을 할 것 같으니 도전할 의향이 있냐고 물어보게 됩니다. 진해성은 일단 알았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이미 현역에서 활동 중인 가수였기 때문에 괜히 도전했다가 중도 탈락하면 본전도 못 찾고 망신을 당할까 봐 도전을 결심하지 못했는데요.

그러다 얼마가 지나고 또 조세호로부터 전화가 오는데 이번에는 참가 의향을 묻는 것이 아니라 고민할 필요도 없으니 무조건 나가라는 이야기였고 진해성은 또 일단 알겠다고 대답을 하게 됩니다. 진해성은 참가를 할 것인지 고민이 되어 아버지께 의견을 여쭈었는데 아버지 역시 나가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무명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팬들이 오디션 프로에 출전하는 걸 기다리기도 했고 요즘은 트롯 오디션 프로가 아니면 자신을 알릴 기회도 없어서 결국 용기를 내게 되는데요.


그런데 대회에 나간 진해성은 거기에서 너무나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는데 그 프로에는 대한민국에서 내노라 하는 진짜 실력자들이 전부 다 나와버린 바람에 진해성은 “이 사람들이 도대체 어디 숨어 있다 다 나왔냐”며 첫 라운드부터 상당히 위축이 되게 됩니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는 오디션 시작하기 전에 잘못 먹었던 약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며 심장에 무리가 가는 위험한 상황까지 맞이하게 되는데요.

그때 진해성은 인터넷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사람들의 사연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 사람이 한 번 아프고 나니까 자신이 이렇게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것 두 눈 멀쩡하고 귀 멀쩡하게 사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깨닫게 되었고 하루하루를 고맙게 살아가야겠구나 쫓기지 말고 즐기면서 하나하나 느끼면서 살아야겠구나 생각하며 삶을 바라보는 자세를 바꾸게 됩니다.

감격의 우승

그렇게 진해성은 아픈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경연에 참가하게 되는데 방송 초반부터 유력 우승 후보로 꼽히기도 했지만 컨디션이 안 좋았던 탓인지 원래 가지고 있던 실력을 모두 발휘하지 못했고 결국 안타깝게 1라운드와 2라운드에서 모두 탈락하게 되는데요.

그때 신이 도와 천만 다행히 패자부활전에서 설운도가 추가 합격자로 올려주며 위기의 상황에서 기사회생했고 그렇게 살아난 진해성은 그때부터 더욱 죽기 살기로 하루 종일 녹음실에 처박혀 매일 죽어라 연습을 거듭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그렇게 노력한 끝에 결승까지 올라가게 되었고 끝내 감격의 우승까지 거머쥐게 됐는데요.

눈물의 우승 소감

계속된 탈락으로 우승은 정말 꿈도 꾸지 않았는데 그렇게 우승의 자리에 오르자 진해성은 그간 무명 생활을 하며 겪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감격 속에 눈물을 펑펑 흘리게 됩니다. 당시 그가 밝히기에 “결승전 올라오기 전에 성적이 좋은 건 아니었다. 결승전 진출만 해도 기회가 더 온 거라 생각했다. 시청자 투표를 통해서 금메달의 진해성이라고 발표되니까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지나온 길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가수 활동을 하면서 힘든 일도 있었고 억울한 일도 있었고 그런 생각이 지나가 서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참가하기까지는 사실 부담감이 컸다. 제 노래 “사랑 반 눈물 반”을 아는 분들은 있는데 가수가 누구인지 모르더라 그래서 여기서 탈락하면 심적으로 타격을 받을 것 같기도 했고 또 저에게 기대하는 분들도 많아서 정말 부담감이 컸다.

그럴 때마다 무대에서 팬 분들을 생각했다. 절 이끌어준 분들이 있어 용기 내서 할 수 있었다. 늘 무대에 오르기 전에 팬분들을 생각하고 올라간다. 10년 동안 따라와 준 분들도 있다. 팬분들을 떠올리면서 무대를 꾸며 나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진혜성에게 부모님은 고생했다며 지금부터 시작이니 우승했다고 건방스러워지지 말고 항상 초심을 유지할 것을 당부했는데요.
우승 상금으로 받은 1억 원을 모두 부모님께 드린 그가 말하기에 “저는 제 손에 10억이 들어와도 부모님이 필요하다시면 다 드릴 거예요. 부모님 안 계셨으면 저도 세상에 없잖아요. 어린 시절 꿈을 주셨는데 노후는 제가 책임져야죠.

부모님이 제 돈 다 까먹으셔도 저는 괜찮아요.”라며 부모님을 향한 효심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참가를 독려한 조세호에게도 감사함을 표하며 만일 오디션에 나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며 참으로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미스터트롯 참가 그리고 팬들에 대한 고마움

그런 그는 기세를 이어 2년 후 미스터트롯에도 참가를 하게 되었고 10년을 활동하며 쌓인 팬들 덕분에 시청자 투표에서 줄곧 상위권에 랭크되더니 결국 최종 탑7에 들어가는 쾌거를 이뤄내게 됩니다. 특히 준결승에서 마스터 점수 결과 최하위로 탈락 위기에 처한 진해성을 구해준 것은 다름 아닌 팬들이었는데요.

그는 실시간 문자 투표에서 두 번째로 많은 표를 얻으며 순위를 4위까지 대폭 끌어올려 결승에 진출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진해성은 10년간 두텁게 쌓인 팬들이 그를 절대 탈락하도록 가만 놔두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미스터트롯 탑7까지 이뤄낸 그의 인생은 이제 완벽하게 대형 정상급 가수로 활동하는 것만이 남았는데요.


하지만 그는 절대 자만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10년을 무명으로 활동한 그가 말하기 “한 방에 올라가면 떨어지기가 쉽거든요. 계단을 걸어 올라간 사람이랑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간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어요. 계단을 오른 사람은 비상구의 위치도 알게 되고 나갈 구멍도 살펴보면서 오르거든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면 그런 걸 볼 겨를이 없어요.

이것저것 경험하면서 계단을 오른다고 생각해요. 내가 힘들었던 1층에 있었던 때를 잊지 말아야겠지요. 지금은 감사하게도 트로트를 많이 사랑해 주시지만 언젠가는 관심이 내려오지 않겠습니까. 지겨워 하실 수도 있는 부분이고요. 영탁 형님도 그러셨어요. 영원히 인기가 있을 건 아니니까. 마인드 컨트롤 잘하고 겸손하게 팬분들 잘 모시고 다녀야 한다고요. 그 말 저도 너무 잘 알고 있어요.”라며 기쁠 때도 있었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늘 옆에 있어준 팬들 덕분에 버텼다며 팬들에 대한 고마움을 드러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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