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가수 박구윤 충격 폭로 “심한 욕과 인사도 안 받는 선배의 정체” 그의 안타까운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오늘의 주인공 박구윤은 한때 트로트를 하겠다고 하자 집안 망신이라며 그야말로 쫄딱 망하고 말았고, 또한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라고 최고의 트로트 작곡가 아버지가 있음에도 선배들이 인사를 받지 않고, 심지어 격 떨어진다며 욕까지 하자 지금도 자신의 이름을 모른다고 고백한 박구윤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박구윤
👉국민 트로트 가수 장윤정의 재산 수준이 화제입니다. 엄마에게 다 뺏긴 줄 알았는데 최근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어린 시절 현철과의 인연

1982년 서울에서 태어난 박구윤은 태어나 보니 아버지가 현철의 봉선화연정, 송대관의 네박자 등을 만든 트로트계의 전설적인 작곡가 박현진으로, 그래서 엄마 뱃속에서부터 태교로 트로트를 들으며 모태 트로트로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트로트 가수들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던 박구윤은 특히 그중에서도 가수 현철과 굉장히 가깝게 지냈습니다. 당시 현철은 어린 박구윤이 너무 예뻐 툭하면 아빠 박현진에게 “니 새끼 내도”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한편 박구윤의 아버지 박현진은 현철과의 인연이 20대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60년대 중반 부산에서 가수 지망생들을 가르치던 박구윤의 아버지는 부산시장 앞에서 노래하는 동네 형 현철과 날마다 피아노를 치고 노래하며 함께 놀곤 했습니다. 그때도 현철의 노래를 들으면 이 형 노래 진짜 잘한다라며 감탄하고 했었는데 하지만 당시 꺾고 뒤집는 창법이 외색이라며 금지곡이 되다 보니 이때 현철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배가 산적처럼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박구윤의 아버지가 군대에 가면서 두 사람은 자연스레 멀어졌고, 그러다 제대 후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고 서울로 상경해 나이트클럽에서 열심히 일하는데, 어느 날 TV에서 한때 친했던 동네 형 현철이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을 부르는 걸 보게 됩니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레코드사에 전화를 걸었고 때마침 현철이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 예전처럼 같이 공연하며 친형제처럼 지냅니다. 박구윤의 아버지가 만든 노래로 현철은 오랜 무명 끝에 가요 대상을 받게 되는데 그 곡이 바로 봉선화 연정입니다.

R&B가수를 준비하지만 결국….

박구윤은 성인이 된 이후 트로트가 싫었던 그는 자신만의 음악이 있고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가겠다라며 뜬금없이 R&B 가수의 꿈을 꾸게 됩니다. 이처럼 트로트는 전혀 생각을 안 하고 R&B를 준비하던 그는 박효신, 김범수, 이적 등 당시 내놓으라 하는 R&B 가수들의 코러스를 하며 본인도 가수를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데뷔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와중 예전에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오르게 됩니다. 당시 아버지가 “그러지 말고 그냥 트로트 해라. 트로트를 해야 가수의 생명력도 길고 포괄적으로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게 트로트다.”하며 권장했었습니다.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막상 갈림길에 서자, 그때 아버지가 하셨던 말이 생각이 났고 더군다나 당시 장윤정, 박현빈 등 트로트 신예들이 치고 나오는데, 특히 동갑내기 박현빈이 2006년 월드컵 때 빠라빠빠로 뜨는 것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사랑받고 싶다라며 크게 부러워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R&B와 트로트 중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트로트로 결정을 내린 그는 제일 먼저 했던 게 이 소식을 누구보다 기뻐할 아버지에게 달려가 “아버지 저 트로트 하겠습니다.”라고 했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당시 아버지가 기뻐하기는커녕 뭔가 못마땅해하며 “네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 오디션을 보자.”라고 했습니다.

엄격한 오디션

이와 관련해 박구윤이 고백하길 “오디션을 보자는 아버지의 말에 사실 너무 서운하고 아버지가 미웠다. 심지어 오디션마저 떨어졌는데 당시 아버지가 나의 노래를 듣고 하셨던 말이 “집안 망신이다. 이 정도 실력으로 트로트 할 거면 그냥 가라”라고 하셨다. 참고로 이때 내가 불렀던 노래가 아버지의 곡 중, 태진아 선배님이 부른 애인으로 그걸 편곡해서 피아노를 치며 불렀는데 매몰차게 가라고 하시더라. 그런데도 “네가 다시 하고 싶으면 다시 연습해서 찾아오라”라고 하셨고 그래서 한 달 정도 연습 후 고집 있게 똑같은 노래로 또다시 아버지 앞에서 노래를 불렀더니 그제야 머리끝이 쭈뼛쭈뼛 선다고 하시더라.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뭔가 못마땅해서 아버지께 “지난번에 저 왜 떨어뜨리셨어요?”하고 물었더니 그때 아버지가 하셨던 말이 “니가 진짜 트로트에 대한 사랑이 있는지 꼭 검증하고 싶었다. 솔직히 그때 한 70% 정도는 됐는데 그런데도 과감히 보냈던 이유는 트로트에 대한 애정과 진정성을 검증하고 싶었다.”라고 하시는데 그 깊은 뜻을 알고 나서 아버지가 나에 대한 마음이 크셨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아버지의 합격을 받아 마침내 트로트 가수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아버지의 후광이 싫어서 아버지의 곡을 받지 않고 이름도 성을 버리고 구윤이라는 이름으로 가요에 데뷔하게 됩니다.

트로트 가수로 데뷔하지만..

그리고 데뷔곡이 말랑말랑이라는 노래였는데 사실 이 노래는 아버지의 후광 싫어 선택했다고 하나, 아버지와 똑같은 길을 걷고 있는 친형이 만든 노래로써, 당시 아버지의 강압으로 만든 곡이라 그런지 박구윤의 첫 트로트 앨범은 그야말로 쫄딱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와 관련해 박구윤의 아버지 박현진이 고백하길 “우리 두 아들이 어릴 때부터 내가 작곡하는 걸 보고 컸다. 손바닥만 한 집에서 애들이 자다 깨면 보는 게 아버지가 작곡하는 모습이다 보니 가랑비에 옷 젖는다라고 두 아들이 작곡하더라. 구윤이도 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했고 큰아들도 작곡가다.

아무튼 형이 동생을 위해서 곡을 만들어줬는데 가사가 “말랑말랑 만져주세요”로 시작한다. 여자분들이 좋아할 줄 알았단다. 그런데 무조건을 부른 가수 박상철 씨가 그러더라 이 노래는 절대 안 됩니다. 당장 노래 바꾸세요라고 하는데 실제로 반응을 보니 처참하더라.”라고 했습니다. 박구윤이 고백하길 “형이 만들어준 노래 말랑말랑으로 데뷔했는데 그야말로 쫄딱 망했다. 사실 우리 형도 히트곡이 많은 유명한 작곡가인데 아버지의 강압으로 만든 곡이라 그런지 역시 모든 건 자연스러운 게 좋은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가는 곳마다 데뷔곡이 망했다고 말하니 형이 가슴 아파하더라. 그래서 지금은 형에게 괜히 미안하다. 아무튼 첫 곡을 내고 잘 안되자 나는 아닌가 보다 싶어 가수의 꿈을 포기하려 했을 때 나에게 멘토가 되어 준 형님이 계시는데 바로 박상철 형님이다. 형님이 안 계셨으면 나도 없었을 거다. 당시 형님이 구윤아 니가 가수가 안 되면 누가 되겠냐?라며 나에게 늘 힘을 주셨다. 형님의 노래 황진이, 무조건, 자옥아가 우리 아버지가 만든 노래인데 그래서인지 당시 형님이 나에게 했던 말이 내가 너를 돕는 이유는 너희 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시더라.”라고 했습니다.

노래 ‘뿐이고’

아무튼 1집 앨범과 2집 앨범을 모두 실패하고 3집이 되어서야 히트곡 제조기인 아버지가 아들 박구윤을 위해 곡을 쓰게 되는데, 보통 다른 사람 곡은 7~15일 정도면 만드는데 예민해서 그런지 무려 3달이 넘도록 곡이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훗날 박구윤의 최대 히트곡이 되는 뿐이고를 만들었지만, 박구윤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를 믿고 연습하는데, 하면 할수록 이 노래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배 가수들에게 검증받기로 합니다. 선배 가수 박상철을 찾아가 “형님! 노래 한번 들어봐 주세요.”라며 뿐이고를 불렀더니 박상철은 “이 노래 안 뜨면 내가 장을 지진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가수는 한혜진을 찾아가 검증하니, 마치 짠 듯 “야! 이 노래 안 뜨면 내가 장을 지진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두 선배의 확언을 듣고서야 ‘뿐이고’를 녹음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리 노래가 좋다고 해도 무명 가수 박구윤을 찾는 방송국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실의에 빠지게 되는데, 그런데 주변 지인들이 “우선 무대 따지지 말고 어디서나 최선을 다하라.”라며 그를 이끌어주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 박구윤이 선택했던 게 바로 ‘노래 교실’이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 노래교실을 시작으로..

그렇게 방송에서는 노래 부를 수 없으니 강사도 아닌 그가 자신의 노래를 홍보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 노래 교실을 뛰어다녔고, 또한 당시 불러주기만 하면 강원도 산골 오지라도 무조건 찾아갔습니다. 이처럼 방송은 못하더라도 노래 교실에서만큼은 자신의 노래를 할 수 있었습니다. 보니 당시 그가 다녔던 노래 교실이 무려 7,000 군데 이상이었고 심지어 이때는 매니저도 없어 직접 운전하며 다녔었는데 그 때문인지 전국 곳곳 가성비 좋은 식당과 숙소는 누구보다 환하게 잘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당시만 하더라도 박구윤의 메가 히트곡 뿐이고는 어머니 노래 교실에서나 울려 퍼졌지, 대중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소속사 대표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오는데 “구윤아! 꿈에서 가위가 보인다. 가위 좀 사 와봐.”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소속사 대표의 꿈 때문에 뜬금없이 가위를 찾아야 했던 그는 부평역 공장에서 가위를 구매했고 상의 끝에 퍼포먼스로 가위를 빨갛게 칠해서 그걸 들고 무대에 오르기로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 소속사 대표의 가위 퍼포먼스를 듣고 20대 중반의 박구윤은 솔직히 너무 싫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가위라도 들어보자. 사람들이 내 얼굴은 몰라도 빨간색 가위와 빨간색 옷이라도 기억해 줬으면…. 하는 절박한 마음으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첫 방송하는 날, 당시 PD가 박구윤의 모습을 보더니 “야! 너 우리 방송을 뭐로 보고 지금 그딴 걸 들고 왔냐? 이런 거 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때 박구윤이 PD에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만약 관객들의 호응이 없으면 바로 때려치우겠습니다.”라며 애원 끝에 겨우 무대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빨간 반짝이에 빨간 가위를 들고 무대에서 노래를 딱 불렀는데 열화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본 PD도 “야! 이거 봐라 재밌는데 앞으로 계속 한번 해봐. 내가 너 보장하는데 다른 피디들도 널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라며 그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심한 욕과 인사도 안 받는 선배들

하지만 당시 엿장수 가위를 들고 노래하는 글이 못마땅해 하는 선배 가수들이 대단히 많았는데 훗날 그의 고백에 따르면 “당시 수많은 선배님이 자신의 모습에 회초리를 들었는데 그게 뭐냐? 하면서 인사를 안 받는 건 기본이고 심지어 어떤 선배들은 격 떨어진다라며 욕까지 하는 선배들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름 석 자 알리며….

2010년에 발표한 뿐이고는 2년 뒤에 뒤늦게 대박이 나면서 마침내 그는 인생 최대의 전성기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노래가 너무 유명해서, 정작 본인의 이름 석 자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훗날 복면가왕에 나와 그가 했던 말이 “자신의 이름을 더욱 알리고 싶다.”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그가 고백하길 “20대 중반의 트로트 가수로 데뷔해 어느덧 데뷔 17년 차를 맞이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이로운 바도 많고 아쉬운 부분도 많다. 스스로의 음악 인생에 점수를 주자면 딱 50점 정도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아직은 하고 싶은 음악도 이루고 싶은 바도 많기에 차근차근 숙제를 해나가며 나머지 50점을 채워가고 싶다. 사람은 살아가다 보면 누구에게나 아픔과 고통은 찾아온다. 그러나 반드시 내일의 희망창 해는 떠오르기 마련이다.

나 역시도 항상 긍정적인 삶을 모토로 살아간다. 동전의 앞면, 뒷면처럼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이후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찾아오더라. 지금 이 영상을 보는 모든 분이 즐겁고 행복한 생각만을 했으면 좋겠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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