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천재 가수가 세상 떠난 후 “아버지는 그녀를 살리려고 충격 행동을 하는데…”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지금 확인해 보세요.

첼리스트 아버지와 화가 어머니 사이에서 다재다능한 남매가 태어납니다. 바로 현이와 덕이로 80년대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장현과 장덕입니다. 특히 장덕은 심수봉과 함께 대한민국 음악계 최초의 현대적인 여자 싱어송라이터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배우로도 인기를 끌었기에, 최근에도 80년대 아이유로 불리는 등 여전히 많은 이들이 그리워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하지만 장덕과 장현에게는 비운의 가수로 불리기도 합니다. 바로 30대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입니다. 큰 인기를 끌었던 천재 뮤지션 남매 장덕, 장현의 생을 살펴보며 그들을 떠올리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천재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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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동생 장덕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장덕, 장현의 집안은 전형적인 예술가 집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장덕이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부모님은 파경했고 그 후 동양철학에 심취한 아버지를 따라 서울 도봉산 아래 작은 사찰에 머물던 어린 장덕은 남의 집 가정교사로 일하던 오빠가 귀가할 때까지 텅 빈방 안에서 혼자 기타를 치며 외로움을 달랬습니다.

첼로, 피아노, 그림, 글짓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장덕은 이 때문인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어설프지만 스스로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불우했던 가정사 때문인지 그녀가 만든 곡들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둡고 쓸쓸한 내용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는 추후 그녀를 스타로 만든 노래를 만드는 것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사춘기가 되면서 장덕의 성격은 더욱 침울해졌습니다. 급기야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으로 가출하는가 하면, 수면제를 먹고 극단적 시도까지 했습니다.

가수 데뷔

충격을 받은 장덕의 어머니는 딸이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다는 걸 떠올리고는 오빠와 함께 드래곤 랫츠라는 듀엣을 결성해 미8군 무대에 설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오빠와 통기타를 메고 아메리칸 엠버시 클럽에서 열린 미8군 주최의 파티 무대에서 To be a child again이라는 곡으로 데뷔했습니다.

남매는 이 공연을 통해 출연료도 받고 아메리칸 엠버시 클럽의 쇼 매니저로부터 드래곤 랫츠의 노래와 미모에 반했다는 찬사를 들으며 엘 클리나드를 통해 출연 계약까지 정식으로 요청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무대에서 남매는 곧바로 방송국 PD들의 눈에 띄어 스카우트되었고 1개월 뒤 TBC TV의 청소년과 젊은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오라오라에 출연해 장덕이 작사, 작곡한 꼬마 인형, 일기장을 부르며 최연소 남매 듀엣으로 일반 무대에 데뷔하게 됩니다.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갈 무렵 장덕은 어머니에게 안양 예술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어머니는 처음엔 1년을 더 다녀야 한다며 말렸지만, 안양 예술고등학교에 찾아갔고 다행히도 현이와 덕이로 연예계에 데뷔한 후라서 그 재능을 인정받고 입학을 허락받습니다.

천재소녀 승승장구하다..

그해 4월, 남매는 드래곤 랫츠에서 현이와 덕이로 듀엣 명을 바꾸고, 친구야 친구, 사랑한다고 말해주오 등 3곡이 수록된 옴니버스 형식의 모음집 음반 친구야 친구를 발표했습니다. 1977년 4월 고등학교 1학년의 장덕은 명보극장에서 개봉된 임원식 감독이 영화 내 마음 나도 몰라에서 주연으로 출연합니다.

한 달 뒤 장덕이 어머니와 함께 살던 때 이사로 인해 집들이에 참석한 가수 송창식은 장덕이 중학교 3학년 때 작사, 작곡한 소녀와 가로등을 장현이 기타 연주와 함께 노래를 불러주자 감탄하며 이후 서울 국제가요제에 출품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합니다. 결국 송창식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장덕은 소녀와 가로등을 1976년에 김기웅 곡에 말해줘요로 데뷔한 히트곡도 없는 신인 가수 진미령에게 주며 작사, 작곡가로서 제1회 MBC 서울 가요제에 출전합니다.


이후에도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고 가요제에서도 계속 입상했으며, 현이와 덕이 정규 앨범을 발표하기도 하고 계속해서 작사, 작곡가로서도 4년 연속 입상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귀여운 보조개와 동그란 눈, 트레이드 마크가 된 깜찍한 단발머리 차림에 장덕은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중후반까지 가요계의 스타로 군림하게 됩니다.

당시 대중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여성 싱어송 라이터였던 여고생 장덕은 서울 가요제를 계기로 당대의 젊은이들이 가장 열광하는 스타로 급부상했습니다. 중학교 때 이미 자작곡으로 5살 터울의 오빠 장현과 듀엣으로 데뷔 음반을 냈을 만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녀는 한마디로 하늘이 낸 천재였습니다.

국내 활동을 접고 미국행

하지만 장덕의 삶은 모두가 선망하는 스타가 된 후에도 꽤 많은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뒤편에서 남몰래 우울증을 앓고 있던 그녀는 결국 아버지의 재혼을 계기로 또 한 번 소동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하이틴 스타의 소동은 팬들에게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녀는 결국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둔 79년 말, 국내 활동을 모두 접고 미국에 있던 어머니를 찾아 도망치듯 태평양을 건너게 됩니다.

미국에 도착한 후 델몬트 대학을 거쳐 테네시 주립대 실용음악과에 입학한 장덕은 그 후 약 2년 동안 국내 가요계에는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내시빌 작곡가 모임인 BMI에 가입해 활동할 만큼 공부에 열중했던 그녀는 그 덕분에 음악적으로는 한 단계 성숙해졌습니다. 미국 본토의 음악을 수혈받은 후 그녀의 노래는 소녀적 감수성에서 벗어나 정서적으로나 사운드 구성에서 훨씬 더 풍부해졌습니다. 또한 장덕은 유학 초창기부터 자신을 살뜰히 돌봐주던 한 재미교포와 결혼해 서서히 마음의 안정을 찾는가 싶었습니다.

오랜 침묵을 깨고 ‘리 패밀리’라는 가족 그룹을 결성해 한인회 각종 행사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그 시절의 장덕은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 행복한 신부였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독한 향수병이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결국 한국 생활을 잊지 못해 힘들어하던 그녀는 2년여의 짧은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1983년 10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가수로서의 재기를 모색하게 됩니다.

또 한번의 전성기

하지만 어린 여가수의 극단적 시도 소동에 찍힌 주홍글씨는 생각보다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또한 공백기를 극복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장덕 역시 음반에 대한 미적지근한 반응을 통해 몇 년 사이에 완전히 잊혀버린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시련에 빠진 그녀는 가족들에게 연락도 하지 않고 한남동에 있는 자취방에 틀어박혀 외로움을 곱씹었습니다.

그러다가 동생의 안타까운 처지를 알게 된 오빠 장현이 울산에서 찾아와 현이와 덕이를 재결성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듀엣 재결성을 기념하기 위해 1985년 내놓은 음반 수록곡 중에서 ‘너 나 좋아해’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장덕은 기적적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1년 후 솔로 가수로 독립해 님 떠난 후를 연속 히트시키는 등 다시 한 번 자신의 음악적 저력을 과시했습니다. 이은하가 불러 큰 인기를 끈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역시 장덕이 만든 곡이었습니다. 그 후 장덕은 이선희, 정수라와 함께 여성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하며 80년대 중후반까지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로 군림했습니다.

가수 활동뿐 아니라 이선희, 이은하, 양하영, 임병수 등의 가수들에게 곡을 주거나 음반 프로듀서로 참여한 명실상부한 히트 메이커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녀의 뒷바라지를 위해 오빠 장현 역시 가수 생활을 청산하고 매니지먼트사를 설립했고 이제 남매에게 또 한 번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것만 같았습니다.

충격적인 비보 그리고 아버지의 충격적인 행동

하지만 운명은 이번에도 그녀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뜻밖에도 오빠 장현에게 내려진 설암 판정을 받았고 혀의 반을 자르면 살 수 있었지만 가수로서 이는 사형 선고와 같은 것이어서 거부했습니다. 이후 장덕은 실의에 빠져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병석에 누운 오빠를 대신해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그녀는 급기야 다시 우울증 증세까지 도져 외부 활동에 의욕을 잃고 말았고, 결국 그녀는 1990년 2월 4일 약으로 자택에서 29세의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장현도 동생이 세상을 떠난 지 6개월 후인 1990년 8월 16일 본인도 동생의 뒤를 따라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지만 그들의 아버지는 딸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자, 그녀를 집으로 데려와 소생시키겠다고 심령사를 동원하는 등 논란이 되었으나 당연히도 그것이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장덕의 영혼과 소통하는 데 성공했지만, 영혼이 세상이 더러워서 다시 오기 싫다고 했다라고 주장했다는 둥 황당한 이야기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떠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은 그들을 그리워하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이와 덕이의 앨범이 lp로 다시 만들어졌고 후배 가수들은 리메이크 앨범을 발표하며 장덕이 출연한 드라마 촬영지에는 노래비도 세워졌습니다. 파란을 몰고 왔던 그들이었지만 너무도 빨리 우리 곁을 떠난 장덕, 장현이 부디 그곳에서는 아프지 않고 편히 쉬고 계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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