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일 아들 씁쓸한 소식 “올림픽대로 전복 사고로 결국…” 그의 안타까운 상황을 확인해 보세요

이주일 씨는 80~90년대를 아우르는 전설적인 코미디언으로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콩나물 팍팍 무쳤냐’, ‘일단 한 번 와보시라니깐요’ 등 많은 유행어를 남겼습니다. 이주일 씨는 모두가 원하는 최고의 스타였지만 그의 인생사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을 만큼 슬픕니다.

그는 결혼식을 앞둔 아들을 일순간에 떠나보내야 했고, 그럼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고 무대 위에 올라 웃음 지어야 했습니다. 또 살아있는 날마다 고통스러워 술과 담배에 의존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은 최고의 스타였지만 행복하지만은 않은 인생을 살았던 이주일 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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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의 탄생

유랑극단을 전전하던 그는 당시 톱스타 하춘화 씨의 발탁으로 하춘화 리사이틀의 전속 사회자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 하춘화 씨의 사회를 보다가 위험에 빠진 그녀를 도왔습니다.

자신도 폭발물 잔해에 맞아 머리를 다쳐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었는데도 하춘화 씨를 구해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하춘화 씨는 이리역 참사의 트라우마를 견디지 못하고 힘들어하다가 노래에 마음이 떠버렸고 결국 결혼을 선택하고 그렇게 연예계를 은퇴해 버립니다.

일자리를 잃고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이주일 씨에게 하춘화 씨는 MBC를 추천해 주었고, 당시 정주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2주일 만에 떠서 예명을 이주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정계은퇴하며 마지막 남긴 한마디

하루아침에 최고의 인기 코미디언이 된 이주일 씨는 밤무대를 뛸 당시 자고 일어나면 현금이 자루째 머리 밭에 놓여있다고 회고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사실 조용필 씨보다 더 큰 사회적 파급력을 가졌던 이주일 씨를 정치권에서도 가만두지 않고, 러브콜을 보내 정치에도 손을 대게 됩니다.

1992년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이주일 씨는 그 당시 44억 원의 재산을 공개했습니다. 이주일 씨는 국회의원으로서 적극적으로 의정활동을 했지만, 자신을 여전히 코미디언으로만 바라보는 지역구민과 동료 의원들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아 정치의 쓴맛을 톡톡히 보며 연예인으로서 정치 적응에 어려움을 느낀 그는 4년간의 의정활동을 끝내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는데 이때 남긴 말이 유명하였습니다.

“정치를 종합 예술이라고 하지만 코미디라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여기에는 나보다 더 코미디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4년 동안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전복 사고로 아들을 잃고..

그 이후로도 그는 200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많은 이들에게 웃음을 주는 코미디의 황제로 군림했습니다. 하지만 코미디언 생활이 그에게 늘 행복만 안겨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1991년 이주일 씨는 올림픽대로를 지나다 분리대를 들이받고 차가 뒤집히는 큰 사고를 겪었습니다. 이 사고로 이주일은 무사했지만, 그의 아들 정창호는 크게 다쳐 현장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정창호는 미국에서 공부하던 중 결혼식 때문에 잠깐 귀국했습니다.

이주일 씨와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중 차량 전복으로 아버지 앞에서 참변을 당했습니다. 7대 독자 외아들을 잃은 이주일은 혼자 살아있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어 매일 눈물로 지새웠습니다. 그중에도 방송에 나와 밝은 모습을 보여야 했기에 그의 속은 점점 더 까맣게 타들어 갔습니다. 그는 아들의 장례식이 끝나고 3일 후에는 SBS 개국 특집 프로에 출연하여 “여러분 죄송합니다.


그동안 김영삼 씨와 박철원 씨의 관계 개선을 해내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뜬금없는 말로 태연하게 청중을 웃겼습니다. 가슴이 아팠지만, 무대 위에서 청중을 웃겨야 하는 직업을 가졌기에 그 슬픔을 드러낼 수 없어 매우 힘들어했습니다. 이주일 씨는 절친하게 지냈던 엄용수에게 “내가 이렇게 슬픈데 TV에 나가서 다른 사람을 웃겨야 하는 게 너무 힘들다.”라며 당시의 괴로움을 토로했습니다.

방송에서는 어쩔 수 없이 밝은 모습을 보였지만 무대 아래로 내려왔을 때는 아들을 잃은 슬픔의 마음을 다잡을 수 없어 매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못 이겨 제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들었던 그는 매일 술과 담배에 의존했습니다.

폐암으로 결국..

이주일 씨는 수지큐 음악에 맞춰 엉덩이를 흔들며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를 외쳐대던 이주일 씨는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났다고 생각하는 이주일 씨에게 큰 위로를 받았고 열광했으며 그만큼 그는 더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못난 사람이 아니라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죽음을 앞두고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결단을 내리기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잦은 흡연 때문에 폐암 말기 선고받게 됩니다. 그는 하루에 담배를 두 갑씩 피울 정도로 애연가였는데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금연 광고 모델로 나와 흡연율을 뚝 떨어뜨릴 만큼 선한 일을 했습니다. 2002년 1월부터 금연 광고를 하기 시작해서 “담배 맛있습니까? 그거 독약입니다. 저도 하루에 두 갑씩 피웠습니다.”라고 호소하며 수많은 사람이 금연하도록 권장했습니다.

이 광고 덕분에 많은 사람이 담배의 해악성을 진지하게 고려했고 담배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고 봐도 될 정도로 성공적인 금연 광고였습니다. 지금도 이 광고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공익재단과 금연재단 설립을 꿈꿨으나 2002년 8월 불행하게도 결국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향년 61세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많은 이들은 큰 별이 졌다라며 고인을 애도했습니다. 그의 아들이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이주일 씨 역시 슬픔을 못 이겨 건강을 해치는 일이 없지 않았겠냐?라며 비통해했습니다.

이후 충격적인 소식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5년이 흘러 그는 또다시 대중에게 충격을 안겼습니다. 그의 묘소에 있던 유골은 사라졌고 그의 묘비는 버려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에 이주일 씨의 동생은 관리비가 없다라며 이주일의 부인이 유골을 가져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주일 씨의 부인은 딸을 통해 “관리비 때문은 아니다. 찾는 사람이 없어 항아리의 유골을 담아 방에 모셨다.”라며 사건의 경위를 밝혔습니다.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가족 간 갈등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후에도 편하게 눈 감지 못하는 이주일 씨를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컸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내를 잃은 남편은 ‘홀아비’, 남편을 잃은 아내는 ‘과부’, 부모를 잃은 아이는 ‘고아’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는 그 슬픔을 표현해낼 만한 단어조차 없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이주일 씨의 마음이 어떨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아들을 잃고 매일 술과 담배에 의지했던 그는 결국 폐암을 얻고 세상을 떠나며 큰 슬픔을 안겼습니다. 떠나는 그 순간까지 국민의 건강을 챙겼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주일 씨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먼저 하늘로 간 아들과 그가 지금은 함께 만나 행복하게 있기를 바라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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