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배우 간암 말기로 결국 “전재산 다 잃고 10년째 모텔 전전하다가…” 그의 안타까운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서 원조 신스틸러였던 ‘남포동’이 10년째 모텔에서 생활 중인 안타까운 모습을 공개했습니다. 남포동은 한 방송에 출연하여 근황을 전했습니다. 오늘은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모델 생활을 하는 이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배우
👉명품 조연 배우 뇌출혈로 결국 “두통 때문에 주먹으로 머리 치다가…” 그녀의 안타까운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귀한 아들 남포동

사실 남포동은 스스로 인정하는 금수저 출신입니다. 아버지는 운송업을, 외가는 학교 재단을 운영해 양가가 모두 부자였는데,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급격히 가세가 기울었다고 합니다.

남포동은 “6학년 때 아버지 운송업이 망해 시골로 이사를 갔다. 그럼에도 밥상에 갈치가 없으면 상을 걷어 찰 정도로 버르장머리가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어서 어릴 때, 형 두 명이 백일도 안 되고, 돌도 안 되고, 세상을 떠났다. 그 핑계로 내가 장남이 됐다. 또 죽을까 싶어서 부모님이 얼마나 귀하게 했겠나? 그래서 내 멋대로 살았다.”라고 말합니다.

승승장구

성인이 되어서는 영화 영화사 직원으로 시작하여 제작부장까지 올라갔는데, 우연한 기회의 단역을 맡았다가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사실 최민수도 어렸을 때 부친이자, 당대 최고 스타 최무룡이 집으로 데리러 온 제작부장 남포동을 본 기억이 있었다고 증언했을 정도입니다. 당시 한국 영화 산업은 활황기였는데 시스템이 주먹구구식이라 스타 배우가 영화 5편을 동시에 찍던 형태였습니다.

게다가 전문 매니저가 없던 시절이라 스케줄 사전 협의도 되지않기에 아침마다 주연 배우의 집 앞에는 제작부장들이 대기했고, 먼저 배우를 데려가 찍으면 영화를 빨리 개봉해 수익을 보는 형태였습니다. 배우를 모셔 오는 수완이 좋아서 잘 나가던 제작부장 남포동은 배우가 되고 나서는 더 큰 돈을 벌었습니다.

제작부장으로 일했던 인맥과 영화의 사정을 잘 아는 그로서는 당연한 결과였고, 대중도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를 쓰며 스크린을 활보하는 남포동을 좋아했습니다.

돈을 쓸어 담을 정도였지만…

과거 남포동은 정말 화려했던 배우 시절을 누렸습니다. 1965년 영화 나도 연애할 수 있다로 데뷔해 오박사의 사람들, 머나먼 쏭바강, 형제의 강 등 여러 히트작에 출연해 사랑받았습니다. 특히 남포동은 출연한 영화만 400여 편은 된다고 합니다.

“하루에 2~3씩 찍었다.”라며 “돈 천만 원은 우스웠다. 마이크 한번 쥐면 다 돈이었다.”라고 전성기를 회상했습니다. 그는 “차를 6개월마다 바꿨다, 단발 광고로 6개월만 되면 통장이 돈이 들어왔다. 그때 모았으면 빌딩을 몇 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돈이 많이 모이면 주위에 탐내는 사람이 모이기 마련이다. 돈을 많이 벌었지만 사기도 많이 당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시련의 시작

2000년 투자했던 사업에 부도가 나면서 가정이 파탄이 났고 이혼한 아내는 딸들을 데려갔습니다. 이후 남포동은 재혼하면서 아내와 같이 술집을 차렸는데 배우 이영하 등 영화 관계자들이 단골이었습니다. 이영하가 “가게의 매출의 10%는 내가 책임졌다.”라고 말할 만큼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뤘는데 10년 만에 남포동은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아내가 아는 자동차 딜러의 권유로 증권 투자해 돈을 날리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두 달 만에 아파트와 가게가 모두 날아갔다.”라며 수십억을 사기당했다고 합니다. 남포동은 “이혼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아내가 저지른 일이니 내가 책임져야 하는데 나도 책임질 능력이 없었다.”라며 다시 혼자 살게 된 이유를 밝혔습니다.

20년동안 딸을 보지 못한 이유

과거 비디오 대여점이 동네마다 있던 시절에는 영화배우 남포동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액션 영화, 가족 오락 영화 그리고 성인 영화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했던 그가 노년을 혼자 모텔에서 보낸다는 사실이 충격적입니다. 한편 그는 20년 동안 보지 못한 막내딸에 대한 그리움을 내비쳐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수술 다음 해인 2010년 남포동은 아침 방송에 큰딸과 함께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큰딸은 사회생활 시작 후 “내가 먼저 용기 내 아빠를 찾았다.”라고 밝히면서 “아빠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냥 아빠인데 얼굴 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털어놨습니다. 이런 딸의 말에 남포동은 “이혼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라며 어린 두 딸을 떠나보내야 했던 미안함의 눈물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큰딸은 “안 그래도 아빠의 간암 소식에 내가 간을 이식해 주려고 했다. 그런데 엄마와 동생도 그런 생각을 했다.”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남포동은 “시집도 가지 않은 딸을, 그것도 이혼해서 키우지도 않은 딸에게 간이식을 받으면 또한 수술하면 배에 상처가 날 텐데 그건 참아 볼 수 없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식을 고려할 정도로 아버지를 생각했음에도 여전히 막내딸은 아버지와의 만남은 거절했다고 합니다. 이혼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막내딸은 아버지와 연락하지 않았고, 2020년 한 방송에 출연한 남포동은 “큰딸은 결혼해 가정을 꾸렸고 지금이라도 찾아가 만날 수 있지만, 막내를 못 본 지 20년이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린 딸을 두고 떠난 아버지로서 먼저 딸을 찾아가기가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백바지와 백구두

한편 남포동은 지인과 외출하면서 하얀 정장에 모자를 정성스레 챙겨 입었습니다. 그는 “남포동 하면 경상도 사투리에 백바지, 백구두라는 인식이 있지 않나? 지금도 나를 알아봐 달라고 입는 게 아니라, 이 옷을 입는 게 몸에 베었다. 속옷도 흰색으로 입는다.

가끔 진짜인가 싶어서 확인하는 사람도 많다.”라며 웃음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지팡이 없이 걷기 힘들어했고 짧은 거리를 걷고 숨이 가까울 만큼 그의 건강 상태는 좋지 못했습니다.

간암 말기 진단 그리고 10년간 모텔생활

1944년생으로 올해 79세인 남포동은 현재 “독거노인 돌봄 서비스받고 있다.”라며 “모텔 생활한 지 딱 10년 됐다. 여관이나 마찬가지인데 콘도처럼 방마다 밥 먹을 수 있게 싱크대도 있다. 부곡에는 그런 집이 많다.”라며 거처를 소개했습니다. 너무나 수척해진 모습에 그는 2009년 간암 말기 선고를 받고 15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은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남포동은 “2009년 간이식 수술을 했다. 10년 동안 얼마나 술을 마셨으면 간암 말기가 돼 이식해야 했을까…. 육 남매인데 막냇동생에게 간을 이식받았다. 딸도 이식 조건이 맞았는데 시집을 안 갔을 때였다. 배를 절개해야 하는데 차마 딸에게서는 간을 못 받겠더라.”라고 털어놨습니다. 앞서 2020년 SBS 예능 밥은 먹고 다니냐? 방송에서 친구 이영하와 함께 출연한 남포동은 간암 진단 당시를 들려줬습니다. “삶을 포기했었다. 간이식 하면 산다고 하더라.

큰 병원에서 그 얘기를 듣고 처음에는 수술을 안 받고 돈과 여권을 챙겨 필리핀으로 가려고 했다.”라며 그대로 살다가 죽자라는 마음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친했던 황경수 감독에게 붙들려서 동생으로부터 간이식을 받았습니다. 현재 그는 간이식 수술 후 후유증으로 면역 상태가 떨어져 각종 약으로 버티고 있는데, “하루에 먹는 약이 다 다르다. 그래서 약통에 요일을 써놨다.”라며 보여주었습니다. 최근에는 숨쉬기도 힘든 상태에 호흡곤란 증상까지 있다는 진단을 받았는데 그나마 기초 체력이 좋아서 이 정도 유지하는 것이라는 의료진의 말이 전해져 안타까움을 더했습니다.

관련 영상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You may also like...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You cannot copy content of this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