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 가수 재벌 회장과 이혼 후 “40억 사기당하고 아들마저 결국…” 그녀의 안타까운 인생사를 확인해 보세요

‘커피 한 잔’으로 유명한 ‘펄시스터즈’는 친자매로 이루어진 듀오 그룹입니다. 언니가 배인순 씨, 동생은 배인숙 씨입니다. 그런데 언니 배인순 씨는 재벌가의 사모님이 되면서부터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해 결국 이혼했습니다.

이혼 후에는 더욱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혼 후 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세 가지 일을 겪었습니다. 그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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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하자마자 초대박

어렸을 때부터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던 자매 배인순, 배인숙 씨는 신중현 씨와 만나 데뷔합니다. 1968년에 1집 앨범으로 데뷔했는데, 신중현 씨가 작사 작곡한 커피 한 잔으로 초대박이 납니다. 그 당시에는 트롯이 유행하던 시절이었으며 커피 한 잔은 완전히 스타일이 다른 파격적이며 실험적인 노래였고 가만히 서서 노래 부르던 시절에 놀랍게도 댄스를 가미하며 노래를 불러 가요계를 뒤집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습니다. 또한 패션 리더이기도 했었습니다. 데뷔 1년 만인, 1969년 MBC 10대 가수 청백전에서 가수왕을 수상했습니다. 노래 커피 한 잔이 수록된 앨범은 무려 100만 장이 판매되었습니다. 그 시대 우리나라 경제는 전쟁이 끝난 후 개발도상국으로 아주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앨범 판매량이었습니다. 그 앨범에 수록된 ‘님아’ 등이 함께 히트하기도 했는데 나중에 신효범 씨가 리메이크하기도 했습니다.

재벌회장과 결혼

자기들의 뜻과 다른 스타일의 노래 부르기를 강요당하자 돌연 미국으로 가버립니다. 그러나 다시 방송 제의를 받고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재즈발레, 탭댄스 등 춤 연습하고, 발성 등 음악 공부를 하며 재기를 준비합니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만나오던 최원석 회장이 언니 배인순 씨를 만나러 직접 뉴욕까지 날아와서 청혼하자, 가수 재기의 계획을 버리고 재벌가의 사모님을 선택하고 맙니다. 그렇게 그녀의 불행은 시작되었습니다.

1976년 결혼하자마자, 결혼한 바로 그 해, 이혼하자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시어머니와의 불화도 한몫을 했었습니다. 그녀는 재벌가에서 환영받는 며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남편은 겉돌기 시작했고, 그의 화려한 여성 편력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결혼 22년 만에 이혼합니다. 커피 한 잔에서는 10분까지만 기다리고 자기는 떠난다라고 했으나, 최원석 회장을 20년 넘게 기다렸지만 끝내 그가 돌아오지 않자 결국 이혼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혼은 사회적인 매장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특히 여자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시련의 연속

그런데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그녀는 이혼했는데, 이혼하고 나서 더욱 끔찍한 일을 겪게 됩니다. 그것도 무려 3번씩이나. 먼저 어머니의 죽음입니다. 2010년 SBS 좋은 아침에 출연하면서 30년 만에 방송 나들이를 한 동생 배인숙 씨. 배인숙 씨는 그룹 해체 이후 샹송을 번안해 누구라도 그러듯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해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방송에 출연한 그녀는 언니의 이혼으로 어머니가 세상을 뜨게 된 사연을 털어놨습니다. 배인숙 씨는 “평소 강직한 성격의 어머니가 언니의 이혼 소식에 곡기를 끊었다.”라며,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던 언니가 이혼하자, 어머니는 식사하지 않은 채 사망했다.”라고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으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그녀는 이어 “어머니의 사망 이후 큰 오빠와 셋째 오빠가 연이어 사망했다.”라고 고백해 시청자들을 더욱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가족의 비극은 시작되었습니다.

효자 아들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은 총 4번 결혼하고, 4번 모두 이혼했습니다. 가장 처음 한 결혼은 1967년 미스코리아 출신의 신정현 씨인데, 두 사람은 슬하의 자녀 없이 결혼 2년째인 1969년 이혼했습니다. 이혼하자마자 바로 그 해 1969년, 두 번째 결혼합니다. 1960년대 당대 유명 배우였던 김혜정 씨였습니다. 두 사람은 1남 1녀를 두며, 결혼 5년째인 1974년 이혼합니다. 그 후 1976년 배인순 씨와 결혼해 슬하의 세 아들을 낳고, 1998년 이혼해 22년간 부부로 살았습니다.

그 후 아나운서 출신 장은영 씨와 1999년 결혼해 자녀를 낳지 않고 살다가 결혼 11년째인 2010년 헤어졌습니다. 사망한 아들은 최원석 전 회장에게는 차남이었지만, 배인순 씨에게는 첫아들이었습니다. 잦은 결혼과 이혼으로 자녀들이 모두 최원석 회장과 멀어졌다고 합니다. 이 아들만이 최원섭 회장의 곁에 있으면서 아버지와 함께 일하고 있었습니다.

고인이 된 아들은 아버지의 흥망성쇠를 모두 지켜보고 있던 아들이었습니다. 최원석 회장은 1983년 아프리카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수주해서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전 세계 동화건설의 이름을 떨치게 했고, 이후 동아그룹은 재계 10위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러나 1994년 동아건설의 시공사였던 성수대교가 붕괴한 후 동아그룹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1998년 채권단의 요구에 따라 최 전 회장이 회장직에서 강제 퇴진한 후, 2004년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재판 중 법정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이 와중에도 끝까지 살아남은 것이 바로 공산학원입니다. 공산학원은 대구에 있는 동아 마이스터고와 경기 안성에 있는 동아방송예술대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2000년 동아건설 부도가 난 후, 최원석 전 회장은 공산학원의 이사장을 역임했습니다.

최원석 전 회장의 아들 4명 중 고인이 된 아들만 공산학원의 상임 이사를 역임하면서 유일하게 아버지의 곁을 지킨 거였습니다. 이 아들은 재벌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아버지가 몰락하는 모습을 봤지만,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누구보다 특별했습니다. 2006년, 신장 이상으로 고생하는 아버지를 위해 선뜻 자기 신장을 내주기도 했었습니다. 그런 아들이 2013년 그만 세상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아들의 안타까운 비보

아들은 당시 결혼해서 초등학생 유치원생인 어린 두 자녀를 두고 있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별장이 있는 경기 가평군 미사리 홍천강에서 물놀이하려고 입수했다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수영하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강에 뛰어들었던 그가 갑자기 의식을 잃어 119 소방대원에 의해 구조되어 대학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받았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4시간여 만에 숨졌습니다.

경찰은 고인이 평소 수영을 잘했으며, 선착장에 있는 보트 상하차 기계에 누전이 발생한 것을 토대로, 고인이 강에 입소하자마자 감전당한 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 당시 아이들이 먼저 입수했다면 아이들이 참변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인 아들이 이 아이들을 구한 것이라는 말도 나왔었습니다.

그의 나이 겨우 36살이었습니다. 고인의 발인이 진행된 날, 아버지 최원석 전 회장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건 당일, 큰 충격을 받고 응급실로 실려 갔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가장 믿고 의지했던 아들이 황망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그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책 발간과 후회

그 후에도 배인순 씨의 불행은 그칠 줄 몰랐습니다. 1998년 이혼한 배인순 씨는 2003년 자전적 소설 커피 한 잔을 발표하며, 최원석 전 회장의 사생활을 공개해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책 속에는 재벌그룹 회장의 외도 대상으로 여배우, 탤런트, 대형 가수 등 이니셜로 다수의 연예인이 등장하는데, 누구인지 알게끔 인물을 묘사해서 더욱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당시 고인이 된 아들은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고 기자들과 만나며 적극적으로 소설 속 이야기가 아버지와 무관하다고 해명했습니다. 그 편지에는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에 대한 효심 또한 절절히 묻어나 감동을 주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배인순 씨는 자녀들에게 상처를 준 그 책을 쓴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습니다.

그 당시 자신이 방송에 출연해 결혼 생활에 대해 언급하자, “최원석 전 회장이 자신이 낳은 자녀들의 용돈을 끊어 경제적으로 힘들게 하고, 자녀들을 못 만나게 하는 등 감정적인 대응을 하자, 주위에서 책을 쓰라라는 부추김에 그런 책을 쓰고 나중에 크게 후회한 것입니다.

40억 사기

후회할 일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혼 후 그녀는 연달아 사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재벌가의 울타리 안에서 살던 시절에는 언제나 현금을 받아서 썼기 때문에 은행을 이용하는 방법도 몰랐고, 세금을 내는 방법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때는 항상 누군가 다 알아서 해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진짜 세상살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그녀는 그다음부터 혹독한 인생 경험을 합니다. 이혼 후 얼마 되지 않아 믿고 의지하던 지인이 15억 원의 돈을 가지고 잠적했습니다. 은행 거래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 금융업계에서 일하는 친한 언니에게 돈 관리를 부탁했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한 번 사기를 당하고 나니, 어떻게든 만회해 보려는 조급함이 계속 화를 불렀습니다.

5억을 투자하면 25억으로 불려주겠다는 말도 덜컥 믿고, 투자할 만큼 세상 물정을 몰랐다고 합니다. 그렇게 날린 돈을 모두 합치면 40억 원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또한 50대 중반에 노래하고 싶은 마음에 카페를 개업했지만, 점점 술집으로 변질하여 실패하며, 결국 그만 살고 싶다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그렇게 우울증에 시달리며 고생을 했는데 다가 대오각성합니다. 약을 끊고 뜨거운 한여름에도 20km씩 자전거를 타며 무작정 길을 달리며 우울증을 이겨냈다고 합니다. 진짜 너무너무 가혹한 시련을 겪은 것 같습니다. 이혼의 대가가 너무 커서 그녀는 이혼을 후회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바로 아들의 죽음이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최근 2022년 배인순 씨는 동치미 방송에 나와 근황을 전하며 그때의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아주 소름 돋는 말도 했습니다. 아들이 사망하기 며칠 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자기가 피아노곡을 연주해 줬는데 그 피아노곡의 제목이 이별이었다며, 너무나 기가 막혀 며칠 동안 울었다고 합니다. 이제 그녀의 인생에 더 이상의 고통이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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